인간이 십자가를 우상으로 만든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의 희생을 기리자’는 주장은 십자가를 성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십자가에 기도하면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인간의 주장은 십자가를 우상으로 만든다. ‘십자가 앞에서 하지 않는다면 어떤 기도도 신께 닿지 않는다’는 주장도 십자가를 우상으로 만든다. ‘우리 교회에 오면, 혹은 내 설교를 들으면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그 오만한 말이 우상을 만들어낸다. 그 외 모든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물이든, 개념이든, 그곳에 반드시 신적인 무언가가 깃들었다는 생각이 우상을 만든다.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할 때에만 인간은 우상숭배를 피할 수 있다.
민주주의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직접투표를 시행하면 반드시 민주주의인가?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조항이 헌법에 들어있으면 반드시 민주주의인가?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이냐 아니냐는 판단의 문제다. 마치 수학공식처럼 어떤 판단도 허락하지 않고 반드시 민주주의로 귀결되는 제도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마치 그런 제도가 있다는 듯이 주장하는 사람은 민주주의를 우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민주주의적 제도가 아무리 잘 갖추어진 국가여도 인간이 그 제도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그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게다가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문제는 다른 여러 사람의 동의를 구할 문제이다. 나 혼자만 어느 한 국가가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들 수많은 사람들이 부정하면 그건 결코 민주주의 국가일 수 없다. 모든 제도를 동원해 가능한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더 위험한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넘어 자유라는 개념 자체를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자들이다. 인간이 만든 어떤 제도도 ‘반드시’ 혹은 ‘무조건’ 어떤 상태를 낳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헌법에 자유라는 단어를 반드시 넣어야만 자유로운 국가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유라는 우상으로 광신도들을 몰고 다니는 거짓선지자들이다. 그런 거짓선지자들의 해악은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예수를 팔아 헌금을 챙기는 자들처럼, 자유를 팔아 경제적 이익을 노린다. 자유라는 개념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자들은 정치와 경제의 경계를 흩뜨려 놓는다.
정치는 경제가 아니다. 당연히, 정치에서 말하는 자유도 경제에서 말하는 자유와 전혀 다르다. 정치적 자유가 ‘나와 함께해 줘’에 가깝다면, 경제적 자유는 ‘나를 내버려 둬’에 가깝다. 정치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경제의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무능할 수밖에 없다. 간섭을 피하려는 사람은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숭배자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적으로 배제된 자들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형식으로 경제적 간섭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다. ‘당신들이 동의한 대표가 만든 법이니 따르라’는 강제력을 얻기 위한 노력이다. 그 법을 어떻게든 사익추구에 협조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또는, 다소 소박한 이들에게는 무한한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다. 자유롭지 못한 공허한 자유만이 신문과 텔레비전, 유튜브와 논문, 책과 잡지를 떠돌아다닌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아직도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사람이 참 많다. 우리나라에는 밤하늘을 수놓은 붉은 십자가만큼 자유를 부르짖는 거짓선지자들이 많다. ‘헌법에 기재된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배제된 자를 떠올리라’는 초대교회 제자들은 이미 카타콤으로 들어갔다. 대중들은 판단을 그만두고 가장 소리높여 외치는 자들만 맹신한다. 정치와 경제의 경계는 벌써 모호해졌다. 자유라는 기표는 기의를 삼켜버렸다.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이에게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 자유와 다르다’고 말하면, ‘그럼 너는 공산주의자냐’는 대답이 돌아온다. ‘단지 민주주의의 요체에 대해 말했을 뿐’이라고 답하면, ‘북한도 국호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쓴다’고 쏘아붙인다. 모두가 자유를 외치지만 아무도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거짓선지자들은 자유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예수와 십자가의 경계를 흩뜨린 우상숭배자들처럼, 자유로운 국가와 자유라는 개념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 모호한 경계에 깊은 심연이 있다. 그 심연에 빠져 익사한 사람이 몇이던가. 민주주의라는 개념도 그 익사자 중 하나다. 해묵은 문제만큼이나 해묵은 편견이 세상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정치적 자유이지 경제적 자유일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문구가 헌법에 있더라도, 대한민국이 자유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게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정치이지 구호가 아니다.
같이 읽어보면 좋을 글귀를 소개한다.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의 유권해석에 따르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기본권 보장, 국민주권, 권력분립, 정당 활동의 자유, 사법부의 독립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영어 ‘리버럴 데모크라시(liberal democracy)’를 번역한 용어이며, 자유주의적 질서를 토대로 대통령, 국회의원과 같이 선출된 공무원들이 국민을 대신해서 의사 결정을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뜻한다. 국제인권기구인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도 자유민주주의를 “자유권 보호와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 즉 수구세력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을 명분 삼아 인권과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독재를 옹호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였다. 또 한국에서 수구세력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무시했을뿐만 아니라 경제적 평등 정책이나 재분배 정책을 사회주의적 정책이라고 매도하였다.
최진열, 『헌법은 밥이다2』 (2018), 18-19쪽.
이런 진술도 있었다.
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교수는 '우리나라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채택하였다'고 말했고, 정헌주 개정안 기초위원장도 1960년 헌법 개정 당시 '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사회질서와 정치질서이며, 이는 경제적 질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뉴시스, "새 역사교과서 '자유민주주의'서 '자유' 삭제 논란…보수-진보 '충돌'", 2018.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