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불리 어떤 공동체에 끼어들려 하지 말라. 혐오를 불러 쫓겨날 수 있다.
공동체는 집단 이상이다. 공동체는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기만 한 집단이 아니라, 언어와 관습으로 묶인 관계이다. 그들만이 아는 말이 있고, 그들만 하는 행동의 양식이 있다. 그걸 아는 사람은 공동체에 빠르게 녹아들 수 있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공동체에 있더라도 쫓겨날 수 있다.
공동체 밖에 있던 사람은 공동체의 언어와 관습을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잘 모르면서 공동체 근처를 어슬렁거리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공동체가 변화를 희망하는 순간이었다면 외부인이라는 존재가 때로 환영받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공동체는 생각과 행동이 오랜 시간 누적될 때 형성된다. 공동체에 변화란 자기분해에 버금가는 사건일 수 있다. 그래서 외부인은 언제나 불청객이다. 공동체에 맞게 외부인이 스스로 조심하는 것만큼 공동체도 외부인에 맞게 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구성원에게 익숙함을 느끼게 하는데, 바로 그때 호감과 혐오감의 기준이 나타난다. 적지 않은 변화들이 초창기에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다. 변화된 상태를 익숙하게 느끼는 구성원이 점차 많아지면 그 변화는 공동체의 새로운 모습이 된다. 그러나 공동체는 축적된 시간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대체로 견고하다.
따돌림의 사례가 적절할 듯싶다.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은 그런 일을 당할 만한 큰 이유를 제공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저 어떤 공동체에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일 따름이다. 그의 언어와 행동이 그 공동체에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공동체 언저리를 떠도는지, 아니면 공동체가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그를 주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공동체 안에 그를 혐오하는 언어와 관습이 새로운 모습으로 이미 자리를 잡아버렸다는 점이다. 따돌림은 혐오가 익숙해져버린 불쌍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범죄이다. 슬픈 사실은,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과 그 공동체가 어찌됐든 조우한 시점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상식적인 선에서 공동체에 들어가려 했을 것이고, 공동체는 어떤 계기로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다만 그 거절이 얼마간 드러나지 않고 지속되다 어느날 폭발하듯이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살면서 내 주변에 어떤 공동체들이 형성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사실 사회생활에서 그 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소위 줄을 댄다는 말이 바로 그런 상황을 묘사한다. 공동체를 살피고 적절히 골라 관계맺는 능력이 호감을 사거나 혐오를 맞는 일에 상관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거기에도 역시 운의 요소가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