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 ‘함께 살자’는 말을 멈출 때 나타나는 일들…

유대인 갈라치기 → 인종 우월주의 주장하기 → 장애인 학살하기(약 30만) → 유대인 학살하기(약 600만)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장애인을 상대로 검증된(!) 학살 시스템이었다. ‘안락사 프로그램(Aktion T4)’이라 명명된 장애인 학살은 ‘독일민족의 피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선동으로 30만 명을 죽인 정책이다. 그 학살은 당시 독일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시기를 앞당길 뿐이라고 거리낌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히려 장애나 전쟁으로 고통받기보다 안락하게 죽을 수 있으니 더 나은 것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살인공장 홀로코스트를 만들었다.

왜 나치 독일의 국민들은 장애인을 학살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스스로 우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태 독일민족이 소수자들과 함께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우월한 그들이 시혜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오만한 생각 때문이었다. 결단의 순간에 그 시혜를 끊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나마 장애인과 소수민족이 가는 길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게 가스실에 넣는 만행이었다.

왜 나치 독일의 국민들은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했을까? ‘함께 살자’는 말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정치영역에서 ‘함께 살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죽인 자들’로 암암리에 온 유럽인들의 미움을 받고 있던 유대인을 지목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고립됐기 때문이다. 고립된 그들로 인해 독일인들이 겪는 불편을 열거했기 때문이다.

이준석이 장애인 시위로 인해 사람들이 겪는 불편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립되지 않았다고 끊임없이 말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장애인과 ‘함께 살 수 없다’는 몰상식한 말을 입밖에 꺼내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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