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유세문 쓰기

보좌관님이 꼬마 비서에게 유세문을 쓰라는 미션을 내렸다. 논문만 써 버릇하다보니 영 글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보좌관님, 좋은 유세문이란 무엇입니까?”

“좋은 유세문이라… 좋은 유세문이 뭐냐?”

보좌관님은 수다를 좋아하신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다. 꽤 좋은 노하우라 생각해 잊지 않기 위해 글로 남긴다. 여기 남기는 글은 그가 말한 그대로라기보다, 내가 소화한 바이다.

유세(遊說)는 말하며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그래서 유세문은 말이면서 글이다. 유세문은 문학이 아니다.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유세문의 목적은 듣는 이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읽어서 잘 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면, 들어서 잘 들리는 말이 좋은 말이다. 그래서 유세문은 잘 들려야 하고, 들은 사람이 생각을 바꾸게끔 해야 한다. 열심히 떠들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좋은 유세문이 아니다. 잘 들었는데 생각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면 좋은 유세문이 아니다.

좋은 유세문의 첫 조건은 유세 현장에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유세(campaign)는 현장(campus)의 말이다. 유세문은 말을 위한 글이다. 좋은 유세문을 위해서는 말하는 상황을 상정해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읽을 때에는 앞뒤 문장이 한번에 눈에 담긴다. 어떤 문장이 맥락에 어긋나면 독자는 집중력을 잃는다. 맥락이 없거나 이어가는 힘이 부족하면 좋은 글이 아니다. 한편, 말을 들을 때에는 여러 단어가 귀에 담긴다. 길어봐야 한 문장이다. 맥락이 없어도 문장마다 힘이 있으면 잘 들린다. 문장 사이에 맥락이 어긋나거나 부드럽지 않아도, 문장이 주는 인상이 적절하다면 듣기에 거북하지 않다. 한 문장에 주어가 두세 개 되는 문법에 틀린 말을 하더라도 듣는 사람은 알아서 고쳐 듣기 때문이다. 간투사가 개입해도 의사소통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문법을 어기거나 간투사가 있다면 힘이 없어 보이는 인상을 주긴 하지만 말이다.

좋은 유세문의 다른 조건은 듣는 이를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은 첫 조건에도 부합한다. 유세 현장에 어울리는 말은 선동에 가깝기 때문이다. 유세 현장은 지지자 다수와 소수의 중도 혹은 반대자가 한 사람의 말을 듣는 무대이다. 설득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은 파토스, 즉 감정이다. 많은 사람들의 고양된 감정은 사회적 강제력 또는 정치적 권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 주제로 깊고 길게 말하는 강연은 감정의 고양보다 지식의 전수를 목적으로 한다. 연설은 지지를 호소하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런데 유세는 간결하고 강력해야 한다. 장황하거나 길면 청중은 떠난다. 지지를 호소해야 하고, 청중의 호응을 만들어내야 한다. 호응도 즉각적인 호응이어야 한다. 곱씹게 만들면 안 된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어떤 내용에 사람들이 호응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유세 현장을 보면 내용보다는 현장의 분위기가 호응 여부를 더욱 좌우하는 것 같다. 그런데 호응을 일으키는 데 반드시 성공한다 하는 유세문은 없어도, 반드시 실패한다 하는 유세문은 있다. 바로 에토스를 잃은 글이다. 에토스는 흔히 태도로 번역되지만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그리스어다. 에토스의 존재는 로고스(논리)처럼 명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거나 파토스(감정)처럼 글이 불러 일으키는 무언가가 아니라, 글의 내용이 화자와 맞지 않을 때 사라지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유세 현장에서 젊은 사람의 연설은 강력하다. 대부분의 후보는 저물어가는 세대인 중년임에 반해 연사가 떠오르는 세대인 청년이라면, 그 후보가 시대를 관통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 연사가 반대 후보를 비판하거나 비난한다면 그 유세는 곧바로 힘을 잃는다. 모든 반박에는 식견과 경륜이 전제되어야 동의할 수 있는데, 연사의 젊음이 그러한 전제에 반하기 때문이다. 지지는 젊을 수록, 반박은 원숙할수록 힘을 갖는다.

설득에 스토리 텔링이 힘을 갖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나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나오면 좋은 유세이다. 연사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나열한다거나 잘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한다면, 그에 동의할 사람은 많을 수 없다. 연사가 확신하지 못하니 호응을 보내려던 사람도 주저하게 된다. 내 이야기를 하면 누구도 반박하기가 어렵고 오직 나만이 가장 강력하게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이 에토스의 힘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유세문 두 가지를 썼다. 1안은 스토리 텔링에 집중한 글이었고, 2안은 감정을 절제한 글이었다. 1안은 생계를 위해 꿈을 포기한 나와 아버지, 친구들의 이야기를 후보의 공약과 연관지었다. 2안은 갈등을 원인과 결과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후보의 공약과 연관지었다. 보좌관님께 보여드렸더니 너무 어렵다고, 쉽게 쓰라고 하셨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곱씹게 만들면 좋은 연설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좋은 유세일 수 없다고 하셨다. 다른 비서님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특히, 한 분은 1안에 자기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가 적다는 점을 지적했다. 1안과 2안을 합쳐보면 좀 더 좋은 유세문이 나올 것이라 말했다.

나는 이렇게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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