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선배

인생 선배가 될 것 같았던 사람을 만났다. 나와 비슷하게 군 생활을 했고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분야를 먼저 연구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몸 담던 기관에 들어가도 될지 조언을 구했다.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통화를 성사시켰다.

그런데 웬걸 너무나 무식한 사람이었다. 뻔히 반박될 수 있는 말을 서슴없이 지껄이는 사람은 무식하다. 더군다나 그 말이 다른 사람에 대한 무시라면 더욱. 그는 이런저런 책에 있는 내용을 주절거리며 제가 잘났다고 말했다. 내가 한나 아렌트를 공부했다 하니 그건 30분만 책을 들여다보면 배울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 하나면 끝나는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사람을 연구하지 말고 주제를 연구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던 말이, 피를 뽑으면 도덕성을 측정하는 등의 ‘도덕심리학’을 공부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너무 우스워서 어쩌면 바람 새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공부를 위해서는 영어를 열심히 익히고 어디 학원이라도 다녀서 통계를 공부한 다음 미국으로 가라고 했다. 졸업논문이야 당장에 그만두라고, 어차피 국내 상위권 대학도 아닌데 학사, 석사가 같은 한국 학교로 찍혀 나오면 좋을 게 없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50분 정도 들었다. 나는 끊을까 하다가, 언젠간 만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네, 네, 하고 들었다.

나는 이 사람이 지껄이는 걸 들으면서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했다. 하나는, 전업으로 하는 공부를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따위 사람이 자리를 꿰어차고 있는 곳이라면, 적어도 이런 자들이 죽거나 사라지기 전까지 당분간 내가 낄 자리는 없다. 국내 학계는 생각보다 불쾌한 곳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전세계 석학들을 읽으며 환상에 빠졌던 것일 수 있겠다. 밥벌이를 걱정하면서 수년 간 공부해도 이런 사람이 물러나주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만 맥이 풀려버렸다.

다른 하나는, 오히려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요즘 많은 시장이 세대교체를 겪는 중이라고 들었다. 전기공사나 타일마감 같은 소규모 기술시장에서는 기성 업자들이 고령에 가격도 불합리한 데다 서비스 품질도 엉망이어서, 내 또래 신흥 업자들이 상식적으로만 운영해도 고객들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국내 학계도 그러한 상황에 놓인 것은 아닐까? 엉망인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리고 내가 그처럼 엉망이 아니라면, 오히려 감사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제 잠들기 전까지 책을 읽으면서 고민했다. 결론은 아무것도 바꾸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던 일을 마저 한다. 내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사건이 아니라면 개의치 않는다. 앞에 매복이나 지뢰를 발견한 게 아닌 이상 행군하는 군인이 방향을 바꾸면 오히려 목숨이 위태롭다. 사선에 섰다는 사실은 그들이나 나나 다를 바 없다.

그 사람은 내게 한편으로 인생 선배가 되어주었다. 반면교사도 그런 반면교사가 없다. 귀중한 경험하고 나는 다시 책을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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