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에 기여한다는 것

왜 공부를 할까? 사람은 세계 속에 산다. 본인만을 가꾸며 사는 방법도 있겠으나 세계를 가꾸는 데 힘을 보태며 사는 방법도 있다. 공부는 모르던 것을 알게 하고 알게 된 것을 잊지 않게 하는 작업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망각의 구멍으로 끊임없이 쏟아져내리는 지식을 주워담기 위해 노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틈에서 나라는 인간을 알리기 위해 행위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공부는 노동의 차원과 행위의 차원을 동시에 갖고 있는 작업인 것이다.

공부는 나를 세계 속에 끼워넣는다. 공부를 하다보면 내가 한없이 작아진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먼저 거인들 틈바구니에 끼어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탁월한 통찰, 철저한 논리, 신선한 시각, 다양한 취향, 모든 것들이 무한히 넓고 깊은 것처럼 느껴지는 학계에서 무한히 작은 듯한 내가, ‘무언가 기여할 수 있다니?’ 매일 세계적인 학자들을 머릿속으로 마주하다보면 때로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스러울 때가 있다. 나의 무지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언젠가는 이 거대한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두 발 딛고 서있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고통과 함께 찾아오기 때문이다.

공부는 학문적 세계를 구성한다. 한 학자의 사상을 깊이 탐구하다보면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 사람의 언어로 문제들에 답하게 된다. 그러면 이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맞닥뜨린다. 예컨대 내가 공부하는 아렌트의 사상에서 개인의 이익과 공적 영역의 관계가 그렇다. 아렌트는 공적 영역에서 개인이 이익을 추구하지 않기를 요구하는데, 이미 우리는 이익 없이는 공적 영역에 참가하지 않는다. 경제 문제에 문외한인 정치인은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하게 된지 오래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아렌트라는 사람이 쓴 작품의 빈 공간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나만의 세계를 구성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학계에 기여한다는 것은 내 이야기를 세계에 풀어낸다는 말이다.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나는 세계의 빈틈을 찾아내야 하고, 내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구성해야 한다. 공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허물어져가는 거대한 건축물에 내가 만든 벽돌을 끼워넣는 것이다. 내가 공부한 선학들의 사상으로부터 권위를 가져오되 그들을 신격화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칸트에게도 빈 구석은 있다. 누가 이 세계를 더욱 잘 구성하느냐. 공부하는 사람은 그 순간 권위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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