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의 사상에서 법이 행위(변화)의 조건인 세계와 안정성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살펴봤다. 다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법 개념이 아렌트의 사상에서 얼마나 강조되고 있냐는 것이다. 여러 문헌을 살펴보았을 때, 법철학적 맥락으로 아렌트를 읽는 시도는 꽤나 도발적일 수 있다. 아렌트 스스로는 법의 이념이 무엇이라고 정의하지도, 법의 중요성을 설파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아렌트 사상을 해석하다보면, 해석을 위해 아렌트의 문헌을 ‘끼워맞추는’ 불상사를 저지를 수도 있다.
이론(거짓말)과 현실(참말) 사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법 이야기를 하기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유대인과 전체주의 문제이다. 폭력과 행위의 관계를 명확히 나타내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유럽의 왕따였다.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아온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원죄 때문에 기독교인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 스스로도 그러한 환경에 맞추어 기회주의적 태도로 살아나갔다. (둘 중에 무엇이 먼저인지는 매우 알기 어렵다) 유대인은 유럽인과 같아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유대인에게는 유대교의 율법이 있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선택된 민족으로서 유대인은 ‘랍비의 법’에 따라 혈통을 지켜야 했다. 유대인들은 선택받지 못한 유럽인들을 오히려 차별하고 있었다.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오히려 유대인에게 종교적 숭고함을 드러내는 계기로 이해되었다. 이에 유대인들은 그들이 받아온 고통들이 실은 영원한 것이었다는 이론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테오도어 헤르츨은 이러한 영구적 반셈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유대인만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온주의라고 일컫는 이러한 정치적 운동을 지지하는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위해 영국과의 공조하여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젊고 유능한 유대인들을 이주시킨다.
시온주의자들의 이상을 추구하는 태도는 국가사회주의자(나치)들의 그것과 들어맞았다.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헤르츨의 책을 탐독하며 시온주의에 빠져들었고, 그 스스로를 시온주의자로 지칭하기에 이르렀다.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당원들에게 유대인 추방은 시온주의를 위한 ‘법적 해결책’이었다.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과 성교를 금지한 ‘뉘른베르크 법’은 어떻게 보면 ‘랍비의 법’을 성문화한 것에 다름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이히만 재판을 관람하던 아렌트의 즉감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도 정치적 권리를 명시적으로 침해하는 그 법을 나름대로 정당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일종의 간섭으로 여겼고 경제적 생활만을 보장하는 상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시온주의자들은 나치당원과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러한 협력관계를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은 루돌프 카스트너 박사와 아이히만의 거래였다. 저명한 시온주의자였던 카스트너 박사는 저명한 유대인 수천 명을 구출하는 조건으로 일반 유대인 팔십만여 명을 나치의 손아귀에 넘기기로 협의했다. 이상적인(관념적인) 상태를 추구하기 위해 우생학적인 태도를 취하고 타인의 생명을 수단으로 삼는 행동은 나치와 시온주의자들이 공유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아렌트는 유대인들이 나치와 시온주의라는 두 적을 상대해야 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두 가지 경직된 이론 아래 놓인 무력한 현실을 묘사하는 데 이것보다 정확한 묘사가 어디 있을까?
아렌트의 고찰을 좀 더 따라가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아이히만이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이유 두 가지를 꼽자면, 현실감을 결여하도록 조장하는 나치의 언어규칙이 하나요, 양심의 가책을 벗도록 유도하는 복종의 명예심(힘러)과 죽음의 평범성(히틀러)이 하나였다. 나치의 언어는 기묘한 거짓말로 가득했는데, 이를테면 유대인 학살을 ‘최종 해결책’이라 일컫는 것들이다. 이러한 언어습관으로 나치당원들은 추방, 수용, 학살이라는 인류에 대한 범죄를 일상적 업무로 여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선에서 실무를 수행하던 집행자들은 양심의 거리낌을 느꼈는데, 이러한 마음을 힘러는 고귀한 의무에 따르는 부담감이라고 분칠했다. 히틀러는 전쟁 상황에 사람들을 내몰면서, 죽음이 도처에 깔렸으니 차라리 고통 없이 죽도록 돕는 게 더 나은 일이 아니겠냐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당연하다는 듯 발표했다. 이러한 사상은 먼저 열등한 독일인을 몰살시키는 안락사 계획으로 등장했다가, 이내 내부의 저항을 받고 유대인을 학살하는 ‘최종 해결책’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발견이 시사하는 바는, 폭력 앞에 선 인간은 선택에 내몰린다는 사실이다. 안락사를 지지하는 독일인과 운명적 의무에 복종하는 나치당원, 구원받을 유대인을 선별한 시온주의자들과 유럽인에 동화되고자 최선을 다했던 유대인 모두 폭력 앞에서 선 무력한 인간들이었다.
[이 대목에서, 영미 윤리학자들의 트롤리 사고실험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우리는 우리 선택에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개입하지 않고 다수를 죽일지 개입해 소수를 죽일지 고민한다. 그런데 전체주의의 소용돌이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선택이 실제로 자기 자신을 포함해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한 가지 여담을 하자면, 폭력과 선택이라는 구도를 능력주의 사상과도 연결지어볼 수 있겠다.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 유능한 의사를 찾는 게 인지상정이다. 능력은 삶의 절박함이 개입되는 순간 전능해진다. 능력 이외의 가치를 추구하자고 주장할 수 있을 때는 ‘살만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