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14. 요약생활 80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정독하고 있다. 학부생들과 함께 『공화국의 위기』도 읽고 있는데, 그중에서 「정치에서의 거짓말」을 이번주에 뗐고 다음주에는 「시민불복종」을 읽을 차례다. (동시에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절반을 넘게 읽었지만 지금 논의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법대에서 공부 못 한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자꾸 아렌트 논의에서 법을 다루는 맥락만 보인다. 오늘까지 알게된 것들을 조금씩 정리해본다.

세계를 구성하는 법

아렌트가 “세계”라는 용어를 다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세 가지 의미로 줄여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주어진 조건으로서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지구라는 의미, (2) 인간이 구성하는 조건으로서 사물세계라는 의미, (3) 인간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공적 영역이라는 의미. (벤하비브였는지, 당트레베였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찾아보면 나올 것이다) 여기에서 세 번째 의미로 쓰이는, ‘공적 영역으로서 세계’는 아렌트가 중심적으로 사용하는 세계 개념이다. 이 세계는 인간이 복수적으로 존재한다는 조건으로 인해 나타나는 세계이며, 삶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누리게 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공간이다. 요컨대, 먹고 살 걱정 없는 공간에서 인간은 타인에게 스스로를 드러내고 의견을 교환하는 정치 행위를 할 수 있다. 따라서 먹고 사는 일을 사적 영역으로 제한하고, 그 외의 일이 벌어지는 공적 영역을 구분하는 경계가 필요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인식했던 법 개념인 노모스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기능했다. [‘나눈다’는 의미의 nemein(복수의 여신 nemesis의 이름도 여기에서 왔다)에서 법을 의미하는 nomos라는 단어가 파생됐다. 고대 로마의 민법과 같이 권리와 의무의 관계를 나타내는 법 개념은 고대 그리스에 등장하지 않았다.]

물론 노모스적 법 개념은 행위의 결과로서 법이 아니라 제작의 산물로서 법이었다. 그러므로 노모스는 전정치적(prepolitical)이었으며, 폴리스를 구성하는 일종의 성벽처럼 이해됐다. 이러한 세계에서 비로소 인간은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의견은 진리가 아니므로 거짓이 될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에 대한 의견은 각기 다른 진술로 공적 영역에 나타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동일한 사실이나 사건에 대해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한 바를 공적으로 소통하는 것은 서로의 의견을 교정하여 각자의 이성이 지닌 오류가능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때 아렌트는 칸트가 제시한 판단력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발전적으로 계승한다. “이성의 공적 사용”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순수이성이므로 물자체를 인식하는 데 이르지는 못하겠지만 일정한 수준의 사실성을 담보하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렌트에게 정치적 행위는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세계를 구성한다. [이 대목에서 피터 버거의 『실재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책과 대위를 이루고 싶은데 아직 구상 중이다] 정치적 행위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실재성이 나타나는 공적 공간을 구성하는 법은 세계를 구성한다.

행위의 조건을 구성하는 법

행위(action)는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다. 이때 새로운 시작이란 헤브라이즘적 신의 ex nihilo로서 시작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에서 다른 것을 만드는 새로운 시작이다. [헬레니즘적 세계관에서는 시작도 끝도 없으므로 세계는 원래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데미우르고스 일화에서 보듯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완전한 창조와 종말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말(words, speech)과 행위(deeds, action)를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인간의 행위는 홀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는 복수의 인간이 말과 행위로 만들어내는 변화를 의미한다. 변화는 행위라는 인간의 활동이 그 자체로 내재한 속성이다. 그 속성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1) 행위자를 떠난 행위가 인간사의 영역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재생산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무제약성(boundlessness), (2) 행위자를 비롯해 모든 인간이 행위가 맺을 결과를 사전에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예측불가능성(unexpectability), (3) 인간사의 영역에 한 번 등장한 행위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불가역성(irreversability). 행위가 초래하는 변화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한 행위자가 그 이전의 상태와 다른 상태를 야기하는 개인적 변화 양상이고, 다른 하나는 한 세대가 구성한 상태를 다음 세대가 바꾸어버리는 세대적 변화 양상이다.

이때 이러한 변화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바로 안정성이다. 안정된 것이 없으면 변화도 없다. 고정된 것이 있어야 매순간 바뀌는 것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nunc stans(서있는 지금) 개념에서 안정성이라는 개념을 도출한 것 같다. 아렌트는 박사 논문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을 중심으로 작성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매순간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과거와 미래를 현재를 기준으로 기억과 기대라는 정신활동과 연계하여 정의했다. 그래서 ‘지금’이라고 일컫는 순간은 언제나 그 ‘지금’이 아니라는 생각을 유명하게 퍼뜨렸다. 이때 nunc stans는 시간의 흐름과 무관한, 그래서 영원한 신적 경험이다. 자세한 이해는 질송의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이해』를 바탕으로 시도해봐야겠다.] 그래서 인간은 정치체제를 구성하고 역사를 작성한다. 개인적 행위의 무제약적 변화 속에서는 약속이라는 제한을 통해서만 안정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대적 변화 속에서는 동료 시민의 행위를 통한 증언과 기록이나 유물과 같은 사물을 통한 증거로 역사를 구성할 때 안정적인 인간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 [이때 법은 혁명적 행위를 응고시켜 권위를 전달하는 헌법이나, 헌법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법적 인격들 사이에서 권리와 의무 관계를 구성하는 약속의 총체인 법률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법은 그 자체로 안정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생각들을 고대 로마의 lex와 연계해 해석해보고 싶다. 아렌트가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에서 법을 관계(rapport)로 해석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가 아마도 지금 내 해석과 연관될 것이다.]

이론(거짓)과 현실(사실)의 대비에서 법

사실 오늘 쓰고 싶었던 본론은 이 부분부터였는데, 시간이 늦어 이만 줄인다.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타나는 법 개념이 대체로 이와 같다.

진리(도덕, 정의)와 의견(정치, 위선)의 대비에서 법

『과거와 미래 사이』(중에서 특히 「권위란 무엇인가」와 「자유란 무엇인가」, 「진리와 정치」), 『혁명론』에서 나타나는 법 개념이 대체로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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