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운동 2

2021. 7. 8. 목. – 9. 금.

Walter gibt ihm für seine Reise nach Deutschland Ratschläge.
Walter는 그에게 그의 독일로의 여행을 위해 조언을 했다. → Walter는 그의 독일 여행에 대해 조언했다.
jdm [in etw Dat] einen Ratschlag geben [o. geh erteilen]
to give sb a piece of [or some] advice [on sth]

Pedro: Du, ich fahre nach Deutschland.
Walter: Sag mal, wie hast du denn das gemacht?
Pedro: Ich habe ein Stipendium bekommen.
Walter: Gratuliere! Das hat ja prima geklappt.
Pedro: 야, 나 독일에 간다.
Walter: 말해줘, 대체 그걸 어떻게 한 거야?
Pedro: 나 장학금 받았어.
Walter: 축하해! 그것 참 잘된 일이다.
Sag mal = Tell (me) once → (Just) Tell (me)
das Stipendium = scholarship
bekommen = get
klappen = valve / strike / work

Q. 어떤 것이 변화했다는 사실의 성립 조건에 대하여 논하시오.

변화는 서양철학에서 오랜 문젯거리였다. 변화에 대한 문제는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자들의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는데,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상반되는 주장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그의 단편들에서 “같은 강에 발을 담글 수 없다”라고 주장함으로써 모든 것이 변화 안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강물은 언제나 흐르기 때문에 이때의 강물이 그때의 강물과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늙고 쇠약해지며, 심지어 바위도 풍화작용과 같은 현상들로 인해 변화를 겪는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그 속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변화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이다. 반면 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없다는 것은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생성이나 소멸은 무에서 유로,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존재가 변화하는 현상이다. 운동도 마찬가지로 이때 이곳에서 있던 것이 없게 되고 저때 저곳으로 없던 것이 있게 되는 현상이다. 그런데 존재는 있는 것이고 무는 없는 것이므로 서로 모순관계이다. 생성이나 소멸, 운동은 어떤 사물이 있기도 하면서 없기도 하다는 표현이므로 모순율에 위배된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운동해서는 안 된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이후의 논의는 모두 이 치열한 싸움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물은 제1실체와 제2실체로 구성된다. 제1실체는 인간의 언어생활에서 주어로 지칭하는 대상이고, 제2실체는 술어로 지칭하는 대상이다. 이를테면 빨간 사과가 있을 때, 우리는 ‘사과가 빨갛다’라고 말함으로써 제1실체로 사과를, 제2실체로 빨갛다를 말한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도는 그의 존재론 안에 변화 현상을 포섭하기에 용이했다.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을 나눔으로써 ‘변화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다’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것이 변화했다’고 말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실체의 동일성이고, 다른 하나는 속성의 차이이다. 속성과 함께 실체도 변해버리면 ‘그 사물’이 변한 것이라 할 수 없고, 실체와 함께 속성도 동일한 상태로 머물면 그 사물이 ‘변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성이 변화했음에도 실체가 유지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물에 대한 변화 사례로는 플루타르코스가 쓴 NINE GREEK LIVES의 테세우스 전기에 등장하는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크레타 섬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아테네로 돌아온 테세우스는 아테네인들의 환대를 받는다. 아테네인들은 테세우스의 영웅적 업적을 기려 그가 타고 온 배를 보존했는데, 주기적으로 낡은 목재를 제거하고 적절한 다른 목재로 교체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사례는 성장과 변화에 관한 철학적 질문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교체 전의 배와 이후의 배가 같은 배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쪽은 서로 다른 배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의 배가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나타나는 이유는 변화라는 현상에 대해 두 가지 층위에서 살펴볼 수 있고 그 층위들이 서로 모순된다는 점 때문이다. 첫째는 인식론적 층위이고, 둘째는 존재론적 층위이다. 인식론적 층위는 신체의 감각기관에 제공된 정보를 받아들이고 기억과 조합해 우리 정신에 그 인상을 띄우는 층위이다. 이 사례에서는 ‘그 배가 테세우스의 배임을 아는 것’이다. 존재론적 층위는 인식과는 독립된 사물을 상상하는 층위로서 이 사례에서는 ‘테세우스의 배와 그 배를 서로 분리시켜 떠올리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으로 이 사례를 본다면, 인식론적 층위에서는 우리가 지칭하는 ‘그 배’의 속성은 ‘테세우스의 배’인 반면, 존재론적 층위에서는 ‘그 배’의 속성이 ‘특정한 목재들의 구성’으로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기억에 독립된 인식과 인식에 독립된 존재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한 변화 사례. “나는 나 자신에게 문제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변화하는 나와 그 변화를 지켜보는 나 자신.
인격 동일성

인간의 본질을 거부한 실존주의 철학. 아렌트의 무엇됨과 누구됨.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