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 Ⅱ

사랑하는 이들의 기억에 남는 것도 좋지만,
내가 사랑하는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아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이 글은 지난 1월 하순에 썼던 내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의 속편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다른 글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학자에 푹 빠져 지낸 한 학기였다. 이제야 아렌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대강 알겠다. 아렌트는 폭력을 거부했다.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하나의 가치 기준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사유도, 현상을 은폐하는 이론도 결국 인간사의 영역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 같다. 이제 아렌트가 어떻게 말했는지 알면 된다. 어떻게 말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어느 책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 읽고 쓰는 기술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지금 테크네(τέχνη)의 문 앞에 서있다.

내 삶을 관통하는 문제도 나름대로 정리한 것 같다. 나는 진리나 선과 같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인간사의 영역에 들어올 때 왜곡되는 현상을 자세히 관찰하고 싶다. 진리는 인간의 입을 거치면 의견이 되고, 선은 인간의 행위를 거칠 때 위선이 된다. 진리나 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보다, 결국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의견이고 위선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의견 아닌 진리가 없고, 위선 아닌 선이 없다. 달리 말해 진리와 선은 있더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 없다. 우리는 진리를 찾고 선한 삶을 살자고 이 무대에서 연극을 펼치고 있는 게 아니다. 탁월하게 살면서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의 기억에 남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평생 일하다 죽는다. 죽기보다 더 두려운 건 호랑이도 남기는 무언가를 내가 남기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

나는 꽤나 고리타분한 사람이다. 맞는 건 맞는 거고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점점 주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살아간다. 이런 성품은 어릴 때부터 드러났다. 어머니께서 내게 잘못을 하시면 나는 꼭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한다. 나는 가족 사이마저도 좋은 게 좋다고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중학생이 되어 친구들이 다 담배를 피울 때, 나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아버지의 담배 냄새가 혐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 한 명이 같은 과 동기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나는 그 즉시 동기들을 가증스럽게 여겼고 그 친구와는 아직도 연락하고 지낸다. 군대에 들어가서는 후보생 시절 군사학교에서 배운 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병신이 되어 있었고 날마다 욕을 들어먹었다. 그래서 군에서 정한 대로 내게 모욕을 준 상관을 고발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재활용이 불가능한 사람으로 평가 받았다. 그래도 한두 명은 남겼다. 전역하고 회사에 들어갔더니 꽤나 큰 돈을 받았다. 그런데 돈값이나 하라는 듯이 모멸감을 주면서 기를 꺾으려 들었다. 나는 내 자존감을 매물로 내놓지는 않았다고 생각해 연봉을 깎았다가, 그래도 바뀌는 게 없기에 제발로 걸어나왔다. 그래서 지금 철학을 공부하는 삶을 살고 있다.

나는 내가 선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내가 정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대로 살았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내가 맞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했다. 그에 수반되는 고통은 영웅적 행위를 위한 비용 쯤으로 여겨 오히려 달가워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가해자이기보다 피해자였으며 그래서 피해자는 언제나 선한 사람이어야 했다. 내 기준에서 피해자는 결코 악인일 수 없었다. 반대로 내 영웅적 행위의 제물이 된 가해자들은 반드시 악인이어야 했다. 그래서 종종 뉴스에서 떠드는 소리를 듣다 보면 피해자들의 위선에 배신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피해자는 피해자답게 행동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건 없다. 인간사는 예측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으므로 가해와 피해의 연속이고, 그래서 그 연쇄를 끊는 것은 약속과 용서밖에 없다. 악해서 피해를 주고 선해서 피해를 받는 게 아니다. 나는 틀렸다. 인간은 시시때때로 악당이면서 성자다. 선악이라는 기준도 그냥 내 생각 안에서만 절대적이고 입밖으로 나가는 순간 말 그대로 ‘내 생각’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 문장에 이미 ‘내 생각에는’이 붙어 있다. 우리 생각은 선행을 하는 악인을, 악행을 하는 선인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지 사실 모든 인간이 이미 그러하다.

이런 생각이 특히 강하게 지배하는 영역이 정치의 영역이다. 위정자에게는 선할 의무가 없다. 투표하는 이들에게도 선할 의무가 없다. 투표의 결과나 여러가지 정치적 사건들은 어떤 도덕적 의미도 함축하지 못한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각각의 사람들이 그렇게 도덕과 결부해 평가하기로 마음먹은 것일 뿐이다. 정치적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과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는 신화를 형성한다. 신화는 이론의 일종으로 현상을 가린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희생양이 됐던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을 비판했던 것과 같이, 나도 일제강점이나 군사독재와 같은 정치적 사건들의 피해자가 됐던 사람들이 그 고통을 명분으로 정적을 배척하고 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행태를 비판하고 싶다. 그렇다고 그들의 피해를 마치 지어내기라도 했다는 듯이 평가절하하는 쓰레기 같은 생각들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사실을 왜곡하면서 혹은 직접 사람을 죽이면서 누군가를 이 세계에서 영원히 몰아내려는 짐승들은 유일하게 우리가 절대 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여전히 철학을 공부하면 재미있고, 이미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멋져 보이고, 앞으로 철학을 계속 공부한다면 살면서 맞닥뜨리는 무수한 문제들을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생겼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죽는다. 나는 살고 싶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살고 싶다. 내가 죽어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고 싶다. 사랑하는 이들의 기억에 남는 것도 좋지만, 내가 사랑하는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아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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