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에 대하여 1] 정의의 여신은 정말 칼을 들었나

들어가며

복수는 흔히 정의로운 폭력으로 해석되곤 한다. 이 글에서는 신화와 어원을 통해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와 언어에 녹아든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살펴보고, 복수와 정의, 폭력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복수, 정의, 폭력

신화: 복수와 폭력의 만남

네메시스와 에리니에스

네메시스Nέμεσις는 복수의 여신으로서, 개념신인 어둠의 신 에레보스와 밤의 여신 닉스의 딸이다. 네메시스는 신들의 확고한 정의를 상징하며, 오만한 자들에 대한 분노를 상징한다. 네메시스는 신에 대한 범죄에 대해 복수한다. 그리스어에서 네메시스는 분노νέμεσις를 의미하는데, 분배하다νέμειν라는 단어의 명사형이며, 복수/처벌νεμέτωρ의 어근이 된다. 네메시스는 제우스의 불륜으로 인해 쌍둥이를 낳게 된다.

로마에서 네메시스는 질투와 째려봄evil eye을 상징하는 인비디아Invidia라는 여신으로 바뀌었다. 라틴어 invidia는 질투를 의미하고, 째려보다, 싫어하다를 의미하는 invideō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인비디아는 정의롭지 못한 상황 또는 부자가 될 자격 없는 사람들이나 부끄럼 없이 자기 권위를 남용하는 사람들로부터 슬픔을 겪는 상황과 밀접하다. 인비디아는 칠죄종Seven deadly sins 중 하나를 상징하는데, 칠죄종은 각각 자만, 욕심, 분노, 질투, 성욕, 식욕, 나태로 구성된다.

한편, 에리니에스Ἐρινύς는 우라노스의 피에서 탄생한 가이아의 세 딸들을 의미하는데, 티시포네, 알렉토, 메가이라이다. 티시포네는 살인에 대해 복수하는 여신으로서, 특히 근친살해에 대해 복수한다. 티시포네는 지하세계인 타르타로스Τάρταρος의 문을 지키기도 한다. 알렉토의 이름은 ‘멈추지 않는 분노’를 의미하는데, 타인에 대한 분노와 같이 도덕적 범죄에 대한 징계를 관장한다. 네메시스와 유사한 일을 하는 여신이다. 메가이라의 이름은 ‘질투하는 자’를 뜻하며, 간음이나 불륜에 대해 정죄한다.

테미스와 디케

그리스 신화에서 디케Δίκη는 제우스와 테미스Θέμις의 딸이다. 테미스는 티탄 족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딸로서, 질서와 법의 여신이다. 테미스는 양 손에 저울과 칼을 들고 옳고 그름을 관장한다. 델피 신전에서 신탁을 내리는 여신이었으며, 테미스로 인해 인간사에 법적 정의와 도덕성이 갖추어졌다. 그리스어에서 θέμις는 관습이나 법에 의해 정해진 것을 의미했는데, 이로부터 강제로 가져오다θεμόω, 놓인 것θέμα 등의 단어들이 파생됐다. θέμα는 이후 라틴어 thema의 어원이 되어 주제나 천궁을 의미하게 된다.

제우스와 테미스 사이에서 에우노미아Εὐνομία, 디케Δίκη, 에이레네Eἰρήνη가 태어났다. 각각 질서, 정의, 평화의 신이다. 이 셋을 합쳐 호라이Ὅρα라 부르는데, 정해진 때 혹은 계절을 의미한다. 호라이는 에리니에스의 티시포네와 비슷하게 올림포스Ὄλυμπος의 문을 지킨다. 테미스는 운명의 여신들인 모이라이Μοῖραι도 낳는다. 모이라이는 운명의 세 여신들을 의미한다. 운명이 죽음으로 끝날 때 운명의 여신은 죽음의 여신들Μοῖραι θανάτοιο로 바뀐다. μοῖραι는 운명이나 분배를 의미하는 μοῖρα의 복수형인데, μοῖρα는 ‘내 몫을 받았다’는 μείρομαι를 어원으로 두고 있다.

Statue of Themis
저울과 칼, 감은 눈은
정의의 여신을 묘사하는
클리셰이다

모이라이는 각각 클로토Κλωθώ, 라케시스Λάχεσις, 아트로포스Ἅτροπος이다. 클로토는 실 감는 일이나 회전을 상징하는데, 인간이 태어날 때 운명의 실을 감는다. 라케시스는 정해진 운명을 상징하며 운명의 실의 길이를 정함으로써 필멸하는 인간이 얼마나 살지를 정한다. 운명의 실은 탄력적이지 않아서 운명을 바꿀 수는 없는데, 제우스만이 운명으로부터 인간을 구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아트로포스는 실을 자르는 역할을 하며 바꿀 수 없는 영원, 늘거나 줄지 않는 고정된 운명을 상징한다. 아트로포스는 로마에서는 Morta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Morta는 인간의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성질을 의미하는 mortality의 어원이 된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서 디케는 인격화된 정의로서, 어머니 테미스와 함께 모이라이의 판단을 수행한다. 일종의 질서로서 관습이나 법과는 달리 응보나 심판의 인격화된 상징이 된 것이다. 특히 디케는 정의가 훼손된 곳에 직접 나타나 응징하는 일을 하는데, 이러한 의미를 담은 그리스어 δίκη는 관습, 법, 질서, 정의, 소송, 처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처벌은 각자의 몫에 맞도록 정의롭게 배분하는 일을 의미할 것이다. δίκη에서 정의롭다δίκαιος와 권리를 주장하다δικαιόω라는 단어가 파생됐으며 δίκη와 말을 의미하는 λόγος가 합쳐져 변론하다δικαιολογέομαι라는 단어가 합성됐다. 그리스어에 반영된 의미를 통해 볼 때, 테미스는 단지 정해진 것, 놓인 것을 의미할 뿐이므로 신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반면, 디케는 인간사에 나타나는 법적 정의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디케와 유스티티아

디케의 법적 의미가 로마에 전승되어 유스티티아Iūstitia라는 법과 정의의 여신으로 나타났다. 로마는 특히 법의 지배를 의미하는 공화정을 채택한 사회였으므로, 로마인들은 유스티티아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라틴어 iūstitia는 법, 권리, 의무를 의미하는 iūs에서 파생됐다. iūs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상고시대 베다 경전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iūs에서 법에 따르는 공정하고 정확한 모습을 의미하는 형용사 iūstus가 나왔고, iūstus가 영어 justice의 어원이 된다.

양 손에 저울과 칼을 들고 옳고 그름을 관장하는 정의의 여신Lady Justice 테마는 테미스인지 디케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 없다. 다만, 형평과 공정을 상징하는 저울의 이미지는 이집트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 여신 Maat/Mayet는 정의와 진리의 여신으로서, 머리에 타조 깃털을 꽂고 있다. 인간사를 규율하는 파라오의 법을 상징하는 동시에 죽은 사람의 영혼을 내세로 데려가는 역할을 한다. 사람이 죽으면 신 중의 왕인 오시리스Osiris가 저울을 통해 망자를 심판하는데, 저울의 한 편에는 망자의 심장을 담은 항아리를, 다른 한 쪽에는 여신 마트의 깃털을 올린다. 접시가 균형을 이루어야 망자는 죄가 없는 것으로 정해진다.

폭력과 복수를 상징하는 칼의 이미지는 디케와 아디키아Ἅδίκιον의 일화에 잘 나타난다. 에리스의 딸 아디키아는 부정의함과 나쁜짓을 상징하는 여신인데 온몸이 문신으로 뒤덮여있고 매우 못생긴 것으로 묘사된다. 파우사니아스의 『그리스 이야기(Description of Greece)』에, 추한 아디키아가 아름다운 디케에게 몽둥이로 얻어맞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접근할 수 있는 문헌이 없어 직접 확인해볼 수는 없었다] 아이스킬로스 비극 『오레스테이아』에서도 복수와 폭력이 연관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아내와 아내의 정부精夫에게 살해당한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누이 엘렉트라와 함께 복수를 감행한다. 이때 “정의의 여신의 손에 들린 칼은/ 신에 대한 외경심을 발로 짓밟고/ 그분의 정의를 위배한 자의 가슴을 찔러/ 깊은 상처를 입히리라./ 그러게 하는 것이 온당하니까!”(p.182)라는 코러스가 등장한다. 이때 디케의 칼은 운명의 여신(Αἶσα)이 만든 칼이다. 칼을 쥔 정의의 여신 이미지는 테미스와 디케 모두에게 다소 혼란스럽게 등장하는데, 칼을 쥔 테미스의 모습이 16세기 라파엘로의 그림에 등장한다.

어원: 복수와 폭력의 결별

외국어

영어에서 복수를 의미하는 vengeance는 복수하다를 의미하는 venge의 명사형이다. venge는 중세 프랑스어 venigier에서 왔다. venigier는 복수하다는 의미인데, 라틴어 vindicāre에서 기원한 단어이다. vindicāre는 복수하다, 해방하다, 보호하다를 의미한다. 라틴어 vindicāre의 과거분사는 vindicātus인데 여기에서 영어 vindicate가 기원했다. vindicate는 무죄를 주장하다, (남들과 달리) 정당성을 입증하다를 의미한다.

라틴어 vindicāre는 힘을 의미하는 vīs와 말을 의미하는 dīcō의 합성어이다. vīs에서 폭력을 의미하는 violentia가 나타났으며, dīcō에서 소송을 의미하는 dica가 나왔다. vīs의 복수형 vīrēs는 힘들을 의미하는데, 독이나 점액을 의미하는 virus가 여기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는 힘들인 것이다. 모든 말dīcō이 소송dica인 것은 아닌 것처럼, 모든 힘vīs이 폭력violentia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vindicāre는 폭력적인 말을 의미한다기보다, 그보다 높은 차원에서 ‘힘 있는 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옳다. vindicāre는 로마 공화정에서 특히 법적인 의미를 얻게 됐다. 복수는 말로 해야 하고, 힘을 얻어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힘은 법정에서 일어나는 힘으로서, 법이 가진 힘이다. 말하자면 vindicāre는 법적인 복수, 즉 사법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법권을 그 폭력의 일종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폭력과 권력을 정의하는 사람들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사적 제재의 반대 개념으로 사법권을 이해하는 통상적 시각에서 볼 때, 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폭력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법과 복수가 연관되는 형태는 독일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복수를 뜻하는 독일어 Rache는 법을 의미하는 Recht의 어원이 된다.

https://etymologeek.com/lat/vindicare

다시 돌아가서, vindicāre에서 “Deo vindice”라는 용어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미합중국의 모토로서,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런데 vindicāre하는 자라는 vindice의 의미를 볼 때, 복수하시는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우리말

우리가 사용하는 복수라는 단어는 한자어 復讐인데, 회복할 복復에 원수 수讐로 이루어져 있다. 회복할 복復자은 조금걸을 척彳자와 갈 복复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갈 복复자는 성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뜻하는 글자로서,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회복할 복復자는 원래 상태로 돌아가도록 한다는 뜻을 갖는다. 원수 수는 말씀 언言자 위에 새한쌍 수雔자가 합친 글자다. 새한쌍 수雔자는 새 추隹자가 두 개 있는 모습으로, 상대를 맞아 말로 대응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양의 복수는 말로 대응해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으로서, 서양의 ‘힘 있는 말’과 비슷한 의미가 드러난다.

요약

복수를 폭력과 동일시하는 것은,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의 기원인 신화나 우리의 사유세계를 구성하는 언어의 기원인 어원을 통해 살펴볼 때, 무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 동서양을 통틀어 복수는 말과 연관된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신화를 살펴볼 때 복수는 테미스와 디케로 형상화되어 법과 연관된다. 그리스에서는 디케나 테미스가 칼을 통해 폭력을 휘두르는 묘사가 나타나지만, 로마에서는 유스티티아가 칼을 통해 폭력을 휘두른다는 묘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스의 네메시스가 로마에서 질투의 화신인 인비디아로 변형되는 것을 볼 때, 로마인들은 사적 감정에서 비롯된 복수를 긍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원을 살펴볼 때, 라틴어에서 파생된 복수vengeance는 되갚아주는 것인데, 그 되갚음은 ‘힘 있는 말’이어야 하며 정당한(법적인) 폭력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복수에 대한 그리스적 이해는 단순한 질투를 의미하는 수준에 그쳐 일상적인 개념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말에서도 복수는 ‘말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복수의 어원에 담긴 의미는 내가 당했다고 똑같은 행동으로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을 통해 힘을 얻어 다시 분배하거나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09.
아이스킬로스, 오레스테이아, 두행숙 역, 열린책들, B.C.458/A.D.2012.
김한, “호메로스의 신들, 제우스, 모이라이(운명)와 성서의 하나님”, 영어영문학, 65(4), 2019, 683-714.
성염, “IUSTITIA의 어원학적 고찰”, 서양고전학연구, 4, 1990, 175-204.
최자영, “고대 그리스 법제의 다양성과 초기 입법의 사례 – 스파르타 리쿠르고스법과 그 해체를 중심으로”, 대구사학, 72, 2003, 243-276.
한승수, “정의(正義)의 여신(女神) 유스티티아(Iustitia)의 모습과 정의(正義)의 상징”, 문화·미디어·엔터테인먼트 법, 11(2), 2017,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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