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김여정 아님) 배우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라고 기자들은 신이 났다. 심지어 몇몇 기자들은 윤여정 배우에게 볼멘 소리를 했나보다. ‘해외 신문하고만 인터뷰하고, 국내 신문에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논조였다. 윤여정 배우 얼굴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영화에 이런 말이 나온다. 기억에 의존해 옮기니 토씨가 다를 수는 있다는 점 양해하길.
모니카: 여기(아칸소)에는 한인 교회가 없나요? 열다섯 명이면 만들어도 될 텐데... 동료: 여기 온 사람들은 다들 한인 교회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영화에는 이런 장면도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이콥: (한국인에 사기를 당해 화를 내며) 당일에 말을 바꾸는 게 어디있어!
소위 ‘국뽕’ 뒤에 숨은 ‘사기꾼’들이 보여서 우스웠다. 영화 속 미국에서 제일 못 믿을 사람들이 바로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스포일러도 괜찮은 사람만 읽으시기 바란다.
배경과 요약
‘생각’과 ‘느낌’
「미나리」는 그야말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고스란히 담은 영화다. 산다는 건 가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을 때가 있고, 생각보다 더 어설플 때가 있다. 어린 시절 ‘멀쩡한 나뭇잎’을 찾기 위해 동산을 헤맨 적이 있다. 예쁜 그림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무 하나하나 눈길을 돌릴 때마다, 벌레 먹은 잎, 기형으로 비틀린 잎, 미묘하게 좌우 잎맥이 안 맞는 잎만 보였다. 그때 알았다, 숲에서는 상처 입은 잎이 오히려 멀쩡한 잎이라는 사실을.
우리를 아프게 하는 건 오히려 생각이다. ‘멀쩡한 나뭇잎’을 찾겠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온 산을 헤매다 지치게 했다. 사실, 있는 그대로를 그리면 될 일이었다. 현대인은 느낌이 아닌 생각 속에 살고 있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미 인위(人爲)와 당위(當爲)라는 허위(虛爲)에 익숙해졌다. 도시 속의 삶, 합리적인 삶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아득히 먼 곳으로 옮겨 놓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무위(無爲)의 삶을 꿈꿀 수 있는 이유는, 아직 「미나리」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지구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줄거리
영화는 제이콥(Jacob, 남편)과 모니카(Monica, 아내), 앤(Anne, 딸/누나)과 데이빗(David, 아들/동생), 그리고 순자(외할머니)로 구성된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198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에 이주해 살던 가족이 아칸소라는 깡촌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부부는 병아리 부화장에서 병아리 성별을 감별하는 단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자기 농장을 짓고 싶어하는 제이콥은 ‘흙 좋은’ 아칸소 시골로 온 가족을 이끌고 이주한다. 그런 제이콥을 보며 모니카는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선천적으로 심장에 병이 있는 데이빗을 키우기에, 가장 가까운 병원이 한 시간 넘게 걸리는 시골이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부는 격렬한 싸움 끝에 한국에 사는 순자를 불러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영화에 등장한 가족의 삶은 크게 네 가지 국면으로 진행된다: (1) 아칸소라는 깡촌에 이주해 삶을 시작하는 가족들, (2) 외할머니가 한국에서 건너와 함께 사는 가족들, (3) 외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의 가족들, (4) 헛간의 화재를 겪고 난 후의 가족들. 국면마다 ‘생각’과 ‘느낌’의 관계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변화’와 ‘안정’이나 ‘신앙’과 ‘이성’, ‘혐오’와 ‘사랑’이라는 대립된 여러 개념쌍들이 서로 다투기도, 화해하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이끈다. 이러한 양상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인위’와 ‘무위’의 상반된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톺아보기
(1) 아칸소에 이주하다
첫 번째 국면에서는 제이콥의 ‘변화’와 모니카의 ‘안정’이라는 두 테마가 트레일러 집이라는 장소에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한다.
제이콥은 능숙한 병아리 성별감별사다. 부화장에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는 성별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고기도 맛있고 알도 낳는 암평아리는 양계장으로, 맛도 없고 알도 못 낳는 수평아리는 소각장으로 간다. 소각장 굴뚝에 피어나는 연기를 보며 ‘폐기’가 무엇이냐고 묻는 데이빗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제이콥은 당부한다. 언제까지 ‘병아리 똥구멍만 보’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제이콥은 생각한 것이다. 나는 불쾌하게도 이 장면에서 아우슈비츠의 굴뚝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가 손가락을 들어 몇 백 야드 떨어진 곳에 있는 굴뚝을 가리켰다. 굴뚝은 폴란드의 회색빛 하늘 위로 불기둥을 내뿜고 있었다. 불기둥은 곧 불길한 연기구름으로 변했다. / “당신 친구가 간 곳이 바로 저기요. 아마 지금쯤 하늘 위로 올라가고 있을 겁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쉬운 말로 사실을 얘기해 줄 때까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p.40.
쓸모라는 생각은 사람에게서 느낌을 지우는 가장 강력한 장치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쓸모라는 이데올로기 앞에 제이콥도 아우슈비츠 수감자도 모두 동일한 단독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제이콥이라는 단독자 안에서 나타나는 여러 모습들도 쓸모라는 형식 앞에 무기력하게 의미부여된다. 가장(家長) 제이콥과 인간 제이콥은 서로를 쓸모라는 틀로 재단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콥은 ‘지영 아빠’이기보다 인간이기를 선택했다. 제이콥의 고뇌는 아마 이런 식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병아리 똥구멍을 보면서 가족을 부양하던 지영 아빠는 쓸모 없는 인간이다. 50에이커의 농장을 이룬다면 인간 제이콥도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자식에게 보여줄 수 있다. 비록 사업에 도전하는 동안 가족들은 잠깐 힘들겠지만, 더 쓸모 있는 인간이 되면 더 쓸모 있는 가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제이콥은 변해야 산다.
집과 농장이라는 공간적 대비는 제이콥의 선택을 드러낸다. 제이콥은 ‘흙이 좋아서’ 아칸소 깡촌을 골랐다. 아칸소의 기름진 흙에서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의 모습이 역력히 드러난다. 한국의 채소들을 미국 땅에 심어 틈새시장을 공략한다는 제이콥의 계산과 마찬가지로, 제이콥의 가족들은 아칸소의 시골에 ‘옮겨 심겨’ 이제 막 뿌리를 내린다. 바퀴달린 집의 ‘움직일 수 있음’은 아직 뿌리박지 못한 제이콥의 가족들을 형상화한다. 가장 안정적이어야 할 공간인 집이 땅에 박혀있지 않기 때문에 가족의 비극은 시작된다. 허리케인에 집이 날아가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은 제이콥의 선택으로 인해 가족들이 느끼는 원초적인 위험이다. 위협을 느낀 가족들을 보고도 아랑곳 않고 묘목을 돌보는 제이콥의 모습에 모니카는 경악한다. 아마도 제이콥이 생각한 ‘새로운 시작’은 모니카가 생각한 그것과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모니카의 새로운 시작은 좀 더 안정적으로 가정을 돌보기 위한 시작이었다. 모니카는 아직 병아리를 다루는 일에 서툴다. 아마도 데이빗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모니카가 병아리 감별 일에 뛰어든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한 캘리포니아의 한인사회에서 모니카에게 설 자리는 없었다. 모니카가 아칸소로 거처를 옮기자는 제이콥의 제안에 동의한 건,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곳에서 좀 더 안정적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화장에서 맞벌이를 하며, 데이빗의 수술비를 대고, 아이들 학비도 대서 어떻게든 가족을 부양하자는 믿음. 인간 제이콥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남편과 안정을 추구하는 모니카의 갈등은 허리케인의 천둥소리와 함께 폭발한다.
허리케인이 몰아친 다음날, 제이콥과 모니카가 죽일 듯이 다투고 나서 내린 결론은, 한국에 사는 순자를 불러 같이 살자는 것이었다.
(2) 순자가 건너오다
두 번째 국면은 두 가지 장소로 분할되어 진행된다. 여기부터 본격적으로 ‘생각’과 ‘느낌’이라는 테마가 드러난다. 농장에서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대립되고, 집에서는 ‘사랑’과 ‘혐오’가 갈등한다.
먼저 집 밖의 농장을 보자. 농장에 물을 대기 위해 제이콥은 우물을 판다. 미신에 가까울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시골 농촌의 백인들은 제이콥에게 수맥점(dowsing)을 권유한다. 그러나 제이콥은 데이빗을 데리고, “한국인은 머리를 쓴다”며 권유를 무시한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고 ‘나무는 물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데이빗을 대견하게 여기면서도, 제이콥은 냇가 아닌 기름진 땅에 우물을 파서 채소를 심는다. 제이콥의 이름은 ‘야곱’으로 알려진 성서 속 인물에서 왔다. 야곱이 신과 씨름을 해 이긴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제이콥은 그 자체로 인간 승리를 나타내는 합리적인 인물이고, 그런 제이콥의 우물은 이성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반면, 모니카라는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인 ‘모니카’에서 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헬레니즘)으로 대표되는 고대와 그리스도교(헤브라이즘)로 대표되는 중세의 점이지대에서 이성과 신앙의 화해를 시도한 인물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는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이었으나, 아버지는 제이콥과 마찬가지로 이교도였다. 영화에서도 모니카는 독실한 크리스찬이면서, 동시에 삶의 고난 앞에 어쩔줄 몰라하며 미신에 의지하기도 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내친김에 자식들의 이름까지 살펴보면, 앤은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한나)’에서 왔다. 안나는 ‘신의 아들 예수를 낳는 처녀 마리아’를 낳는 인물이므로 원죄로부터 벗어났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미나리밭에 갈 때 ‘엄마가 뱀 나온다고 했다’며 모니카의 말을 착실하게 따르는 모습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하던 원죄 이전의 하와(이브)와 닮았다.
한편, 데이빗은 성서 속 ‘다윗 왕’에서 온 인물이다. 신의 은총을 받아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무찌른 소년으로도 유명하지만, 인간 다윗이 지은 죄 역시도 성서에 여럿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부모의 말을 어기고 미나리밭에 들어가 결국 뱀을 마주하는 모습과 그 뱀에게 돌팔매질을 하려 드는 모습은, 죄를 지으면서도 동시에 회개하려 노력하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과 비슷하다. 순자는 성악설과 법치를 강조했던 중국 철학자 ‘순자(荀子)’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순자의 삶은 무위를 추구한 노장(老莊)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러니 순자의 이름에서 별다른 의미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1980년대 흔한 이름이었던 순한 아이, ‘순자(順子)’로 보는 게 맞겠다. 전형적인 할머니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인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굳이 이야기해보자면 물 흐르듯이(川) 삶을 대하는(頁) 사람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건너온 순자는 모니카에게 안정감을 준다. 순자가 가져온 한국 식재료들은 모니카가,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 제이콥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아칸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모니카가 그네를 만들어 집앞 나무에 거는 모습은, 이제 아칸소가 그들의 세계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작업은 자연세계를 문화세계로 바꾸는 첫 번째 활동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퀴가 사라지고 계단이 설치되면서 집의 모습을 점점 갖추어 나가는 장면들은, 모니카의 가족이 성공적으로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다음으로 집을 보자. 순자는 한국 할머니 그 자체인 인물이다. 순자는 군밤을 이로 깨주고, 화투를 치며 상스러운 말을 내뱉는다. 순자는 모니카에게 그리운 모성을 상기시키지만, 앤과 데이빗에게는 불쾌한 느낌을 일으킨다. 특히 데이빗은 할머니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같은 방을 쓰는 순자에게서 ‘할머니 냄새’가 난다며 누나 방에서 자고 싶다고 데이빗이 떼를 쓰는 장면은 느낌으로부터 발생된 순진한 혐오를 형상화한다. 그런데 ‘할머니 냄새’가 ‘한국 냄새’라는 표현으로 바뀌면서부터 데이빗의 혐오는 관념적으로 고차원화된다. “한국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한국 냄새가 난다고 하냐”는 누나의 핀잔은, 관객들로 하여금 데이빗의 혐오에서 유럽의 유대인 혐오(antisemitism)를 떠올리게 한다. 수천 년간 유럽인이 차별했던 유대인은, 유대인이라는 개개의 인간이 주는 느낌이 아니라, 불쾌하게 똑똑하다거나 고리대를 일삼는 욕심 등으로 묘사된 ‘유대인’이라는 관념이었다. “할머니는 할머니 같지 않다”며 데이빗의 할머니가 되기 위한 조건(‘쿠키를 만들 줄 알’고, ‘요리를 잘 해야’ 하고, ‘나쁜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을 나열하는 장면은, 물론 아주 귀여웠지만, 데이빗의 순자 혐오가 완전히 관념의 차원으로 넘어왔음을 암시한다.
「미나리」에서 혐오는 교회라는 또 다른 장소에서 드러난다. 모니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온가족이 찾은 교회에서 앤과 데이빗은 각각 백인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를 만난다. 백인 여자 아이는 관념적 혐오를 가진 인물이다. 백인 여자 아이는 앤 앞에서 ‘내가 한국말을 하면 멈춰달라’며 “칭챙총 치미치미추”라고 자기 생각 속의 한국어를 쏟아냈다. 물론 그 한국어가 순전한 무지로 인했다 하더라도, 혐오가 아니었다는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차라리 “너희는 왜 그렇게 얼굴이 납작하냐”던 백인 남자 아이의 혐오는 인간 ‘데이빗’의 느낌에서 생긴 ‘순진한 혐오’였다. 결국 남자 아이는 데이빗과 친구가 됐지만, 여자 아이가 앤과 친구가 된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관념적 혐오와 순진한 혐오의 차이와 그에 대한 감독의 입장은 그들이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 여부로 결정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데이빗의 엄격한 ‘할머니 관념’과 순자라는 불쾌한 느낌의 갈등은 ‘오줌 사건’으로 절정에 다다른다. 순자의 보약을 변기에 버리고 오줌을 담아 준 데이빗을 부부는 엄하게 혼낸다. 흥미로운 점은, 부부가 데이빗이 할머니에게 오줌을 담아준 이유나 계기에 대해서는 물으려 하지 않고, 다만 손자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는 사실로만 데이빗을 혼낸다는 사실이다. ‘올바른 손자’에 대한 부부의 관념이 데이빗을 혼내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순자는 데이빗을 감싸며, 오히려 ‘재밌었다’면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관념적 혐오를 극복하는 사랑의 느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어김없이 모니카는 ‘시골에 살아서 애가 배우는 게 없다’고 짜증을 내고, 제이콥은 ‘왜 거기서 그 말이 나오냐’며 맞받아친다. 서로가 서로의 느낌을 보지 못하고, 도시 여자, 시골 남자라는 관념을 세워 그 생각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실 데이빗은 모든 것을 관념으로 이해하려 드는 부모를 닮은 것이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니카나, 오히려 사업을 더 성공시켜야 가정도 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제이콥 모두,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 그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들을 무시하게 된 것이다.
(3) 순자가 쓰러지다
세 번째 국면에 이르러, 집과 농장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이야기에 ‘미나리밭’이라는 공간이 추가된다. 느낌과 생각, 신앙과 이성, 사랑과 혐오가 한데 섞여 폭발할 지경이 된다. 이 모든 이야기를 엮는 열쇠는 ‘물’이라는 소재다.
순자는 냇가에 미나리를 심는다. 미국 땅에 자라는 한국 토종 식물이라는 점을 볼 때 순자의 미나리는 제이콥의 ‘작물’과 공통적이다. 그러나 미나리는 제이콥의 작물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크게 세 가지 차이점을 볼 수 있는데, 첫째로는 ‘생각’과 ‘느낌’의 차이이다. 제이콥의 작물은 경제적 욕망의 결정체임과 동시에 인간 제이콥을 드러내기 위한 분투의 수단이다. 요컨대 제이콥의 생각이 작물을 심었다. 반면 미나리는 아무 이유 없이 시작된 생명들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맛있을 것 같다’는 것뿐. 제이콥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작물을 보며 ‘맛있겠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음식의 본질은 맛있는 ‘느낌’일진데, 제이콥은 자기 ‘생각’에 빠져 음식의 느낌을 보지 못한 것이다. 둘째로는 인위와 무위의 차이이다. 제이콥의 작물은 묘목의 형태에서 시작됐다. 묘목은 한곳에서 뿌리를 내렸다가 전혀 다른 곳에 이식되는 작업을 요한다. 이미 내렸던 뿌리를 거두고 다른 곳에 뿌리를 다시 내리는 일은 여간 수고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제이콥의 작물은 제이콥과 가족들의 모습을 닮았다. 반면 순자의 미나리는 씨앗에서 시작됐다. 미나리는 좋은 땅을 만나 스스로 뿌리를 내렸다. 미나리가 번성하는 데 순자가 한 일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자연히 된 것, 그것이 무위의 삶이다. 생명의 본질은 ‘자연발생’이라는 사실을 볼 때 순자의 미나리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셋째로는 ‘물’과의 거리다. 앞서 보았듯이 제이콥의 작물은 물이 있’을 법한’ 곳에 심겼다. 작물을 기르기 위해 제이콥은 우물을 파야 했다. 그 물도 머지않아 말라버려 제이콥과 그 가족은 곤욕을 치른다. 반면 순자의 미나리는 물 바로 앞에 심겼다. 큰 가뭄이 들지 않는 한 냇가는 마를 일이 없다. 물이라는 소재를 통해 생각과 느낌, 인위와 무위라는 두 가지 테마가 한데 어우러진다.
물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를 관통하는 소재다. 허리케인이라는 첫 번째 고난을 맞은 가족들은 빗물과 싸운다. 제이콥은 트레일러 집 아래에 묘목을 피신시키고 오느라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다. 모니카는 찬장에서 새는 물을 쉴새없이 닦아낸다. 허리케인의 물은 자연법칙의 압도적인 힘을 떠오르게 한다. 인간의 활동은 자연법칙 앞에 속수무책이다. 묘목은 식물의 뿌리박혀 있음을 거스르는 인위적인 작업의 산물이다. 집이라는 안정적인 공간은 사실 인위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인간은 작업이라는 폭력적 활동을 통해 잠시나마 인간의 이성이 자연법칙을 정복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연의 힘이 주는 압도적인 느낌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 허리케인 앞에 무력한 묘목과 집은 이러한 관계를 잘 드러낸다.
물은 갈등을 고조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제이콥은 농장에서 우물물을 쓰고, 가족은 집에서 수돗물을 쓴다. 공간의 분리는 사실 물의 분리로 완성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물이 공간을 완성시킨다. 앤과 데이빗이 교회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거지꼴의 폴을 보며 모욕하는 뒷자리 아이들은 이 사실을 지적한다. “저 아저씨는 물도 안 나오는 집에 산대.” 농장의 우물이 고갈되어 집의 수도를 옮겨 쓴다는 사실은, 제이콥의 꿈이 가족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물이 고갈됨으로써 농장이라는 공간은 불완전해지고, 마침내 집의 수도도 끊김으로써 가족이 깨질 위험에 처한다. 미나리밭에서 길러온 물이 가족을 구하는 장면은, 인위적인 삶이 갖는 본질적인 불안정성과 그 불안정성을 해소하는 방법은 무위의 삶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한편, 미나리밭의 물은 죄악이면서 동시에 구원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모니카와 제이콥은 끊임없이 데이빗에게 ‘뛰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그러나 순자는 뛰는 데이빗을 말리지 않는다. 오히려 데이빗과 함께 미나리밭에서 물을 길어오기도 한다. 모니카는 그런 순자를 타박하지만, 사실 데이빗의 심장은 냇가에서 물을 길어왔기 때문에 나아졌을 것이다. 뱀이 나타나니 들어가지 말라던 냇가에 들어갔다는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데이빗은 구원받은 것이다. 미나리밭에서 뱀이 나타났을 때 순자는 ‘눈에 보이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덜 위험하다’며 돌을 던지던 데이빗을 멈춰세운다. 드러난 죄가 드러나지 않은 악보다 낫다는 입장은 이 영화가 가진 중심적인 선악관이다. 현상(느낌)을 은폐하는 이론(생각)은 제이콥과 모니카 어느 일방이 아니라 둘 다 갖고 있다는 비판이기도 하다.
집 안에서는 보약과 오줌이라는 두 가지 물이 대립된다. 보약은 순자가 손자를 염려하는 마음이 응축된 사물이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 사랑을 변기에 버리고 오줌이라는 ‘순진한 혐오’로 순자의 사랑에 보답한다. 말하자면, 데이빗의 오줌은 신이 주신 은총을 거역하고 인간이 짓는 죄악이 형상화된 것이다. 보약그릇에 담긴 오줌은 데이빗이 침대에 지린 오줌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데, 고의의 여부로 그 차이를 결정한다. 보약같은 오줌은 순자의 사랑을 저버리는 고의적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자는 사랑으로 데이빗을 감싼다. 우리는 순자의 사랑에서 인간의 죄악을 대신해 고통을 받으면서도 인간을 사랑하는 예수의 모티프를 볼 수 있다. 반면, 침대에 지린 오줌은 ‘브로큰 페니스’, 그러니까 모르고 지은 죄다. 데이빗은 그 죄가 부끄러워 침대 밑에 오줌 지린 속옷을 숨긴다. 순자는 교회에서 ‘브로큰 페니스’라고 데이빗을 놀린다. 이 말에서, 우리는 혐오의 탈을 쓴 사랑이라는 모호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여기에 화답해 데이빗은 서랍에 다친 다리를 치료해주는 순자에게 “할머니, 피피(오줌)맛은 어땠어요?”라고 묻고 도망간다. ‘브로큰 페니스’와 ‘피피맛’은 다름아닌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가 친한 친구에게 “병신”이라는 혐오표현을 서슴지 않듯이, 가벼운 혐오표현은 사랑하는 사이에서 오히려 더 활발하다. 사랑이 전제되면 묘하게도 죄악이 사랑을 더욱 부추긴다. 애증이라는 모호한 마음은 어쩌면 신도 인간도 공유하는 마음일 수 있다.
순자의 오줌은 인간의 가멸성(mortality, 可滅性), 다시 말해 죽음을 드러내는 소재다. 앤과 데이빗은 순자의 오줌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죽음을 이해하기에 너무 어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니카는 순자의 오줌을 계기로, 순자의 죽음을 떠올렸을 것이다. 죽음이 주는 느낌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사랑의 방향이다.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된 순자는 사랑을 주기만 하는 사람에서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으로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자는 떨리는 손으로 데이빗에게 물을 따라주지만 이내 컵 밖에 쏟고 만다. 죽음은 완전히 ‘없는 것’으로 되는 일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은 점점 무위에 다가가 사랑을 주는 활동조차 인위를 가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사랑의 느낌은 성공이나 실패라는 언어로 묘사할 수 없다.
모니카는 순자가 데이빗에게 물을 따라주다 쏟는 것을 보고, ‘할머니 좀 도와’드리라고 말한다. 과도한 해석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모니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에 지친 나머지 사랑을 주는 일조차 성공과 실패로 가늠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불편한 몸으로 집안일을 돕는 순자를 자제시키는 모니카의 마음에는, 사실 ‘그런 몸으로 돕는 게 더 힘들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부화장 굴뚝을 보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던 제이콥도, 순자의 도움을 거절하는 모니카도 성공과 실패라는 생각 외에 느낌을 보는 능력을 잃게 됐다. 모니카는 스스로 순자에게 준 사랑이 성공적이었는지 되물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니카는 앤에게, 순자가 아픈 이유는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었다고 설명하며, 순자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실패했음을 시인하고 제이콥을 떠나 순자를 부양하기로 결심한다.
(4) 모든 것이 사라지다
영화의 마지막은 ‘불’이 모든 것을 태워버림으로써 해소된다. 모든 갈등이 해소된 뒤에 남는 것은 무위의 느낌, 다시 말해 ‘살아있음’이다.
쓸모를 논하는 인간은 죽음 앞에서 책임을 묻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죽음이 가져온 사랑의 성공과 실패라는 관점은 책임이라는 도덕적 문제를 수반한다. 모니카는 마지막으로, 데이빗의 심장이 어떤 상태인지 여부에 따라 제이콥을 떠날지 말지 결정하고자 한다. 가족을 향한 제이콥의 사랑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여부는 데이빗의 죽음에 달려있다는 생각이다. 병원을 찾은 부부는 데이빗의 심장이 호전되었다는 극적인 소식을 듣는다. 새로운 거래처를 찾아 제이콥의 사업이 순탄하게 해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배경음악은 불안하고 암울하게 깔린다. 아직 해소되지 않은 책임이 서로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모니카는 그 책임을 제이콥의 선택에서 찾는다. ‘돈을 벌면 같이 살고, 돈 없으면 떨어져 사는’ 조건부 사랑은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모니카 자신에게도 정확히 해당되는 비판이다. 모니카는 데이빗의 건강, 말하자면 가정의 평안에 따라 제이콥 곁에 남을지 말지를 정하겠다는 조건부 사랑을 제시했다. 애초에 사랑은 조건과 함께할 수 없다. ‘무엇을 하면 사랑을 주겠다’는 생각은, 사랑이라는 단어만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 사실 조건이 제시되는 순간부터 사랑이 아니라 교환이라는 본질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인 사랑은 그 자체로 동어반복적이다. 교환은 생각의 활동이고, 사랑은 느낌의 활동이다. 모니카와 제이콥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 건 서로의 생각이었다. 인위적이지 않은 무위의 사랑만이 서로가 가진 느낌을 볼 수 있게 만들고, 마침내 서로를 구원한다.
데이빗의 심장을 위험하게 했던 건 심장이 아니라 모니카와 제이콥의 생각이었다. 심장판막증은 구멍이 좁아져 병환이 나아질 때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도 한다. 청진기에 들리는 소리가 커지면 심장이 더 위험해질 것이라는 생각, 뛰면 심장이 멈출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데이빗 앞에 있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었다. 마찬가지로, 가족을 사랑한다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은 제이콥과 모니카의 사랑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 위험은 부부의 눈 앞에 있었으나 부부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 위험을 보지 못했다.
가족들이 시내로 나간 동안, 순자는 헛간 청소를 돕는다. 불편한 몸으로 도구들을 정리하고 쓰레기와 썩은 작물을 한데 모아 태운다. 소각통에 위태롭게 쌓인 쓰레기를 보며 관객들은 조마조마하다. 누군가는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하는 생각에 순자를 미련하게 봤을 것이다. 마침내 바람에 상자가 날아가고, 바싹 마른 풀에 불이 옮겨 붙는다. 순자는 당황하지만 무력하게 불을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누가 순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이 ‘어쩔 수 없음’이, 그로 인해 ‘애가 끓는 마음’이 사랑인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어떤 짓을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그러니까 결국, 사랑이란 죽어가는 것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다.
헛간의 불을 발견한 제이콥은 가족을 두고 상품을 구하러 간다. 모니카는 얼마 뒤 남편을 뒤따라가 함께 상품을 구한다. 제이콥은 다음주에 납품하지 못하면 사업이 실패한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것이고, 모니카는 제이콥의 사업이 무너진다면 가족을 지킬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조건부 사랑은 둘 모두 상품을 구하는 데 열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연기가 가득한 헛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호흡도 어려워진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죽음과 가장 가까워진 것이다. 그 순간 제이콥은 모니카를 찾는다. 죽음 앞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를 지영 엄마, 지영 아빠가 아니라 “여보”라고 부른다. 서로를 느낌에 앞서 책임이라는 관념으로 받아들이던 두 사람은, 죽음 앞에서 서로를 염려하기 시작한다. 헛간의 불 속에서 부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된다.
불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변화를 향한 제이콥의 욕심과 안정을 향한 모니카의 욕심, 다시 말해 서로의 느낌을 나누는 데 장애물이 되었던 생각들이 불과 함께 사라진다. 한편 불을 냈다는 사실에 상심해 집을 떠나던 순자를 앤과 데이빗이 찾아나선다. 특히 혐오와 사랑의 경계에서 복합적인 태도로 순자를 대하던 데이빗은, 순자 앞을 가로막으며 “할머니, 집은 저쪽이에요”라고 말한다. 헛간의 불이 앤과 데이빗의 혐오도 함께 태워버린 것이다. 이후 제이콥은 모니카와 함께 수맥점쟁이를 부른다. 자신이 무시했던 수맥점쟁이의 말에 따라 그 위에 표식을 두는 제이콥의 모습에서, 우리는 헛간의 불이 이성과 신앙의 대립마저도 태워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맥을 찾는다는 건 모니카가 제이콥의 사업을 지지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과 제이콥이 모니카의 말을 믿기로 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수맥점의 결과가 물을 찾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아도 좋다. 물이 나오면 모니카 덕이고,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미나리 밭에서 길러오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의지하면 될 테니까. 쓸모 즉 성공과 실패라는 생각의 틀도 헛간의 불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헛간의 불로 한바탕 곤욕을 치른 가족은 거실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잔다. 순자는 새벽에 홀로 가족을 바라본다. 순자는 헛간의 불을 냄으로써 가족을 다시 한 몸으로 뭉칠 수 있게 만들었다. 인간 순자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겠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가족을 내려다보는 순자의 모습이 인간사를 내려다보는 신의 모습과 닮았다. 순자의 불은 결코 계산의 결과가 아니었다. ‘한국 사람은 머리를 쓴다’던 제이콥의 우물은 결국 말라버렸다. 그러나 순자는 ‘좋은 자리’에 미나리를 심을 뿐이었다. 물을 주지 않아도 미나리는 알아서 번성했다. 미나리 밭을 찾은 제이콥은 미나리가 ‘맛있겠다’고 한다. 제이콥이 기르던 농작물에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표현이다. 우리는 무위를 통해서만 느낌을 찾을 수 있다.
나가며
영화를 이렇게까지 본 것은 태어나 처음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영화의 흐름에서, 어떤 영화보다도 치밀한 장치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치밀하게 조직된 영화적 장치를 분석하느라 무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배우의 연기를 미처 보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다. 이런 배우를 왜 이제서야. 순자에게 그 상을 준다면 뭐라 할까? 아마도 “지랄, 옘병.”
어쩌면 이 리뷰도 과도한 인위로 점철된 ‘염병’일 수 있다. 영화를 그냥 보고 ‘느끼자’던 여자친구가 오히려 ‘원더풀’하게 영화를 본 게 아닐까 싶다.
“[영화 리뷰] 정이삭, 「미나리」”에 대한 답글 2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