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12.-13. 요약생활 12, 13

2021. 4. 12. 월. 추적추적 비

아침 문화생활은 취소했다. 어제 등산도 다녀오고, 새벽에 손흥민 경기도 보느라고 피곤했던 탓이다. 지원이 먼저 연락을 주어 고마웠다.

학교에는 두 시까지 조교 근무를 하면 됐지만 세 시간 일찍 도착해 다른 하이데거를 읽었다. 조교 근무를 하면서는 거의 읽지 못했다. 확실히 집중되지 않는다.

오후에는 지원에게 전화가 왔다. 대량 주문제작 전처리를 위해 신설동에 있는 철형집에 다녀왔는데, 그곳에 있던 다른 손님과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패턴을 찍고 난 원단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택배로 보내줄 수 있느냐, 혹시 주말에는 안 여냐 등등 원단을 돌려받을 방법을 물었던 걸 꼬투리 잡으며 “갑질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안 그래도 가게 주인이 퉁명스러워서 ‘공손하게’ 묻지 않았다는데 득달같이 그걸 문제삼다니. 길지 않은 사회생활을 하며 느낀 바가 있다. “가끔씩은 개새끼들에게 개새끼가 되어도 좋다.” 정중한 태도는 그 태도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만으로도 품이 많이 든다. 들어보니 애초에 친절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는데, 부러 친절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갑질하지 말라”니? 대관절 그 따위 소리가 을질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생각에 이르자 젊은 여자여서 당했다는 추측에 이르렀다. 나는 평소 페미니즘의 한계는 여성이 ‘약자’라는 프레임을 페미니스트 스스로가 공고히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내가 약자여서 이따위 일을 당한 건가’ 하는 생각 이외에는 달리 그 개같은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데 막다를 때가 있다. 그래서 이날을 계기로, 미러링이 아니면 달리 이 현상을 타개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오히려 그래서 상식이나 현실경험으로부터 멀어져가는) 페미니즘의 태도를 이해하게 됐다. 그러나 이건 비단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맥락이라면 누구라도 ‘약자’가 된다. 우열이라는 유형의 형식을 넘어 혐오라는 무형의 틀 아래 갇힌 유색인종, 대민물의를 일으켜서는 안 되는 군인, 공적 이미지를 사생활과의 괴리로부터 지켜야 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들, 소위 논다는 친구들의 심부름을 일반적인 교우관계로 자위하는 왜소하고 조용한 친구들. 맥락은 누구라도 약자로 만든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즘을 넘어서, philosophy of bullying(괴롭힘의 철학)으로 부르는 게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다음주에는 지원과 같이 시장에 가기로 했다. 나의 존재가 그들의 태도를 바꾸게 된다면 이건 분명히 괴롭힘의 문제다. 내가 갔는데도 퉁명스럽다면 위 추측은 폐기할 것이다. 그땐 싸워야지. 차라리 싸우기를 바란다. 그 편이 차라리 ‘인간은 존엄하다’는 오랜 전통에 부합하는 게 아닐까?

저녁에는 태국 형과 같이 아우구스티누스 공부를 했다. 아무도 스피커로 참여하지 않고 듣기만 해 오랜만에 둘이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었다. 금요일에 복수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기로 했다. 내 논문 주제와 연계해 ‘법을 통한 복수, 처벌’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2021. 4. 13. 화. 새벽비, 아침부터 맑음

논문 지도를 받았다. 오랜만에 작은 칭찬을 받았다. 잘 읽었다고 하셨다.

사실 이번에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몇몇 챕터는 눈에 담기지도 않을 만큼 대강 훑었다. 그래도 『책임과 판단』에서 ‘법과 도덕이 완전히 전도되어 합법이 오히려 범죄가 되는 상황’을 주목했던 아렌트의 생각은 명확하게 본 것 같다. 교수님께서 그 부분을 듣고 난 뒤에 표정이 바뀌는 것을, 나는 봤다.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다 “「도덕철학에 관한 몇 가지 물음」이 ‘양심-사유-판단-행위’로 이어지는 아렌트의 사상을 개괄적으로 담았다”고 표현했는데, “그건 네 수준이 그 글을 제대로 읽을 수준이 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셨다. 신기하게도, 나는 교수님의 이 말씀이 전혀 기분나쁘지 않다. 오히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된 게 더 고무적이었다. “그래, 그거 별로 깊지 않은 글이야”라고 하셨다면, 내가 그 글을 읽느라 들인 시간이 오히려 더 무의미하지 않을까. 의미가 굉장히 깊다고 하셨는데, 실력을 쌓고 다시 읽었을 때 얼마나 깊은 의미가 다가올지 기대된다.

실력을 키우려면 ‘평가하려 드는 자세’를 경계해야 한다. 정화열 교수의 「악의 평범성과 타자 중심 윤리」를 읽고 나서, ‘웬 몸철학을 이야기하기에’ 아렌트의 사유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아렌트의 시기에는 타자 윤리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시기였고 오히려 정화열의 시대에 그 주제가 주목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화열 교수가 아렌트의 사상을 오해했다고 이해하기보다는 확장했다고 보는 편이 낫다고 하셨다. 아는 게 다르면 보는 게 다르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서려면 우선 거인을 믿고 올라야 한다. ‘시스템의 정상에서 시스템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시스템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 시스템 정상에 오르는 게 수순이다.

『다른 하이데거』에 대한 논의를 하지 못해 아쉬웠다. ‘세계-내-존재’가 아렌트의 행위 개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했었는데, 신나서 다른 책들을 떠들다보니 까먹었다. 「과학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 이야기를 하면서는 ‘아렌트의 해석학적 약점을 가다머의 해석학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했다는 점 외에는 유의미한 부분을 짚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가다머의 언어 개념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의했다. 교수님께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는 결국 의식과 주체를 긍정하던 시기의 도구적 언어였던 반면, 가다머에 이르러서는 언어가 곧 사유이고 우리가 독립적 존재로 생각하는 의식이나 주체가 따로 있지 않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음주까지 공화국의 위기를 읽고 내용을 정리해서 가기로 했다. 쓰면서 읽으라는 교수님의 말씀은 아래 영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말씀이었다. 책에, 공책에, 컴퓨터에 계속해서 쓰다보면 양질전화(量質傳化)가 일어난다. 많이 읽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흐린 물이 가라앉고 맑은 물이 떠오르듯, 내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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