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6.-8. 요약생활 6, 7, 8

2021. 4. 6. 화. 맑고 먼지 많음

아홉 시에 학교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열두 시에 있을 아렌트 스터디를 위해 인간의 조건을 읽고 요약했다. 영어 원본을 읽고 썼는데, 읽기도 쓰기도 쉽지 않았다. 한 시간에 한 절 읽고 쓰는 일은 어려운 것 같다. 적어도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은 잡아야 될 듯싶다.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논문 주제에 관해 토론했다.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으면서, 이진호 조교님과 진행하는 모임이었는데 생각보다 길게 진행됐다.

세 시부터는 영민 선생님과 네 시 반까지 인간의 조건 6절을 공부했다. 요약하는 법이 달라 애를 먹었다. 영민 선생님은 원문을 최대한 충실하게 이해하고자 하고 나는 작가가 행간에 쌓은 구도에 집중한다. 교수님께서는 영민 선생님의 방법을 좀 더 좋아하실 것 같다. 나는 요약할 때 비유를 넣지 않는 편인데, 영민 선생님은 비유도 중요한 요소로 보아 요약에 넣는다. 의미를 더욱 살리는 경우에만 비유를 넣는다는 원칙을 정했다. 사실 요약이라는 게 사람마다 다른 건데, 요약의 형식을 맞추는 일이 의미가 있나 싶기도 했다. 어쩌면 내 방법을 영민 선생님에게 강요하는 건 아닐까?

네 시 반부터 다섯 시 반까지는 과제를 했다. 현대인식론 수업에서 ‘과학에서 이론적 용어’라는 부분 발제를 맡았다. 영어가 너무 읽히지 않아 거의 곧장 자리를 떴다.

여섯 시(좀 넘어서)에는 이수역 븟다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제혁 형을 만난 건 일 년만이었다. 호수 형도 보고 싶었는데, 늦게 알리기도 했고, 시간이 맞지 않았다. 형은 잘 지내는 것 같았다. 형도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선생님 노릇과 학생 노릇을 동시에 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피곤에 물든 눈이 안쓰러웠다. 사는 이야기, 결혼 이야기, 학업 이야기를 하다 결국에는 문학 이야기, 철학 이야기로 갔다. 형은 나를 참 좋아한다. “너랑 정말 독서모임을 하고 싶어”라는 말에 사랑스럽기도, 엄두가 안 나기도 했다. 나는 썩 머리가 좋지 않다. 형과 이야기하면 언제나 배운다. 형이 내게 배울 게 있을까. 하긴, 형은 똑똑한 사람이니 누구에게나 배울 점을 찾을 텐데.

형이 “현상학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아주 반가웠다.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 나만 모르던 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이었달까. 아렌트가 현상학적 방법으로 정치를 탐구했다는데, 나는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후설을 읽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해야 하는데, 써놓지를 않으니 지식이 언제나 스쳐간다. 아무튼 형에게, 물이 끓는 현상에서 현상과 이론을 대조하고, 데카르트 이후로 이어진 이론의 역사를 훑은 뒤 후설을 꺼내들었다. 퓌론의 회의주의에서 따온 에포케와 내재적 한계를 이야기했다. 신이 나서 한참 말하고 있는데 형이, “공부 열심히 했구나” 하고 웃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형과 같이 근무하는, 라깡을 읽는 선생님 이야기를 들려줬다. 김춘수의 <꽃>을 가르치면서 ‘꽃’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았다고, 자기는 수능 족집게 강사처럼 가르치는데 참 놀랍더라고 말했다. 영화감독을 꿈꾸다가 선생님이 되어서 그런지 수업 참관을 했을 때 극적으로 끝맺더라고, 형은 혀를 내둘렀다. 형은 내게 대학원에서 작품 읽는 법 이야기도 해주고, 논문 잘 쓰라는 덕담도 해줬다.

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판하는 데 관심이 있노라고, 또 아는 체를 했다. 아는 체를 하면 대화가 민망해진다. 서로 몰라서 결국은 오만이나 침묵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븟다 사장님이 나를 너무 좋아해주신다. 몇 년만에 가는 건데도 언제나 먼저 반겨주신다. 술장 깊숙한 곳에서 칠십 도나 하는 귀한 술도 맛보여주셨다. 데카르트가 파놓은 해자에 갇혀있을 때, 언제나 먼저 다리를 놓아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래서 당신들을 이야기해야겠다.


2021. 4. 7. 수. 맑음

과음. 어제 술을 멈췄어야 했다. 열 시에 븟다를 나와서, 이수역에서 7호선을 타고 숭실대로, 숭실대에서 650번 버스를 타고 신길 어디께로 가던 중에 구역이 올라와서, 버스에서 급히 내려 한바가지를 쏟아내고, 어떻게 가지, 하다가 6411번이었나 하는 초록 버스를 타고 신정역으로, 신정역 앞에서 내려 또 한바탕 게워내고, 걸어 걸어 집으로 왔다. 아마 열두 시가 조금 안 됐을 것이다. 그래도 씻고 잤다.

사무실에는 출근을 잘 했다. 이진호 조교님이 어제 진행한 학술모임 피드백을 하자고 했다. 한 시간 좀 넘게 했다. 그리고 한 시간을 또 보고서 쓰는 데 날렸다. 나는 과제를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하지 않으면 더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오전을 날리고, 칸트 수업에 들어갔다. 읽지 않고 들어가 알지도 못하는 말들을 또 날렸다.

끝나고 여섯 시부터 도서관에서 과제를 했다. 숙취로 눈이 돌아 읽히지 않았다. 세 시간 날리니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날아갔다. 밤을 새려다 중국철학사만 겨우 끝내고, 세 시 반에 잠들었다.


2021. 4. 8. 목. 맑고 쌀쌀

여섯 시에 일어나서, 현대인식론 과제를 제대로 시작했다. 세네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전혀, 무리였다.

망쳤다.

열두 시에 겨우 과제를 올리고 학교에 갔다. 발제를 했는데, 발제문이 엉망이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배고픔 없는 학생, 영양가 없는 수업. 램지 문장이 어려웠노라고, 이래저래 변명은 했는데, 부끄러웠다. 램지는 잘못이 없다.

중국철학사 발제는 그런대로 잘 마쳤다. 읽다가 몇 번 졸아 한글을 틀린 것 말고는, 한자도 잘 읽었다. 수업 막바지에 ‘메타 인지’에 대해 말했다. 공부할 때 ‘내가 공부를 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해야 공부가 잘 된다는 개념. 실천하지 않는 개념은 공허하다. 나는 언제나 빈말만 떠벌이고 다녔던 것이다.

발제 망친 아픔을 계기로, 시간을 엄격히 지켜본다.

퇴근한 뒤에는 공방에 들러 지원의 선물을 받았다. 평생 들고 다닐 수 있는 가죽가방이다. 고마운 마음 달리 말할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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