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꼭 내가 요리사가 되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무엇이 맛있는지, 어느 집이 잘 하는지만 알면 되지.”
나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1년 동안 철학 공부에 매진하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모든 선택이 그러하듯이, 결심은 충동적이었고 설득은 논리적이었다. 읽어야지, 하고 책장에 쌓아놓은 책들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절간에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책만 읽다 나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결단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다시 지난한 고민의 시간을 겪을 것인가. 도전하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도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지킬 게 없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 지킬 게 그리 많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지켜야 할 것들이 점점 많아질 뿐이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수입이 줄어들어서도 아니고, 공부가 어려워서도 아니었다. 아직 너무 아는 게 없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내 중심이 없이 공부하는 느낌이었다. 그저 지식의 흡수로서 소모적인 철학 공부가 계속됐다. 그마저도 곧 잃어버릴. 꿈속에서 죽기살기로 뛰는데 앞으로 절대 나아가지 않는 불쾌한 그 느낌이었다. 이제와 돌이켜보건대 그 이유는, “철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중요한 것은 “‘왜’ 철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인지를 깊게 고민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맹목적인 공부는 능률도 의미도 잃는다. 나는 왜 공부를 해야 하나. 그것도 철학을, 왜.
이 물음을 처음 일깨워준 건 같이 공부 모임을 하는 형님 한 분이었다. 늘 그렇듯이 나는 뭐 하나 진득하게 자리잡고 한 적이 없으면서 궁금한 게 많다. 그렇게 이것 저것 찔러보다 다시 다른 데 흥미를 옮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공부하는 모임에서도 어김없이 그 모습이 드러났나 보다. 어제 저녁 모임에서 키에르케고르를 전공한 형님에게 왜 그 학자를 전공하게 됐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너는 네 삶에서 갖고 있는 물음이 뭐니?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 완벽한 인간상을 보고 배우면서, 그대로 실천하는 게 내 목표였다. 그런 사람들이 내게는 예수와 소크라테스야. 수업을 듣다 보니까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동일선상에 두고 연구한 사람이 있더라. 그게 키에르케고르였어.”
그리고 그 뒤의 비수처럼 꽂히는 분석.
“내가 보기에, 네게 지금 필요한 건 어떤 철학자의 주장이나 철학사적 지식이 아닌 것 같아. 네가 죽기 전에 꼭 이것만큼은 이루어야겠다는 물음. 그 물음이 있으면 그 어떤 학자를 마주치든지 네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을 거야. 네 머릿속에 철학자들 사이의 의견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흐름이 그려지는 건 덤이고. 내게는 그 문제가 사랑의 실천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완전한 인간상의 분석이 필요했다. 이 문제에 대해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아.”
모임을 파한 후에 곧바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은 왜 사나요?’ 깊이 생각해본 적 없다, 죽지 않으니 산다, 너 요즘 괜찮냐 등등 다양했다. 머리가 아파 일찍 잠에 들었다. 오늘은 느즈막히 일어나서 하루종일 놀았다. 책도 읽지 않고 드라마도 보고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아직 다 정리된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잠정적으로 정리한 생각들을 여기 옮긴다.
나는 철학을 공부한다. 왜냐하면,
- 재미있기 때문이다. 내게 철학은 생각에 대해 배우는 학문이다. 철학을 공부하며 마주하는 선배 철학자들의 생각들은,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거나, 몇 번 해봤더라도 엄밀하게 따져본 생각이 아니었다. 철학(특히 철학사)을 공부하면,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 주로 정제된 언어로 명쾌하게 문제를 집어내고 자기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잘 정리된 생각을 읽을 때면 아주 잘 요리한 음식을 먹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꼭 내가 요리사가 되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무엇이 맛있는지, 어느 집이 잘 하는지만 알면 되지. 나는 거기에 멈추어도 충분히 기쁠 것 같다.
- 멋져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적 허영심이다.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왠지 멋져 보인다. 철학자들에게는 여유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선배들이 걸어온 길을 돌이키는 삶을 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 세상에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생각을 해낸다면(그리고 후배들이 그 사람을 비판해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사람은 역사에 남는다. 그러니 누군가 ‘이건 몰랐지’ 하면서 내 생각을 부수려 들 때, ‘아, 그런 생각은 이미 누가 언제 했어’ 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이 (당신을 포함해) 왜 그 생각에 이르게 됐는지’, ‘그 생각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다른 생각들은 무엇인지’, ‘그 생각은 이후에 어떻게 발전하고 분화되는지’, ‘그래서 오히려 당신은 어떻게 말해야 더 명료한 입장이 될 것인지’, ‘그 입장에 대한 내 생각은 무엇인지’ 따위의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생각의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철학을 공부하면 그냥 아는 체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설 수 있게 된다. 내 스스로 묻고 답하며 사색할 수 있게 되는 것도 덤이다.
- 살면서 마주하는 문제 속에서 잘 판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 <웨스트 윙>이라는 드라마를 보는데, 미국 대통령이 고뇌에 빠지는 장면이 나왔다. 미국인 수십 명을 태우고 아라비아 상공을 지나던 수송기가 격추당한 것이다. 그 비행기에는 대통령이 아끼던 군의관도 타고 있었다. 대통령은 당장에 그 나라를 부숴버리겠다고 소리친다. 로마가 위대했던 이유는, 로마인이 공격당하면 로마가 그 나라를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합동참모부는 적국의 군사시설 몇 곳을 폭격하는 데 그치자고 제안한다. 50달러짜리 범죄에 5000달러를 쓸 수는 없으므로 이것이 ‘적절한 대응(a proportional response; proportion에는 ‘비율’, ‘비례’, ‘균형’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라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살짝 전율을 느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생각하는 연습을 해두어야 하는구나. 지금까지 나는 양쪽의 의견을 어떤 철학자의 의견이나 철학적인 용어로 잘 해석해내는 법을 탐구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진정 중요한 건,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어쨌고 공자가 어쨌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그 상황에서 어느 길로 갈지 정하는 것, 다시 말해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얻는 것이다. 이미 정했다면, 그 길이 맞는지 검증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다른 이가 묻는다면 기꺼이 대답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어디에 폭격을 하느냐, 몇 명을 죽일 것이냐 하는 문제를 얼마나 여러 번 마주하겠느냐마는, 내 삶에 그런 울림을 줄 만한 문제는 얼마든지 겪을 수 있다. 철학은 그런 상황을 위한 연습이다.
요즘 고대 그리스 삼인방을 공부해서 그런가, 쓰고 나니 플라톤이 보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인다. 요약하면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이다. 다만 사람마다 그 행복에 이르는 길이 다를 뿐이고, 나는 그 길이 철학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 삶을 가다듬는 윤리적 판단, 나아가 현실적인 사안에 충분히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정치적 역량. 내 삶은 적어도 앞으로 1년 동안 이 두 축으로 흘러갈 것이다. 이 생각은 앞으로도 또 얼마나 바뀌려나. 그래도 나는 이 짧은 대답에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