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릉이마스터의 오늘의 똥 1

따릉이마스터

출근길에 우연히 한 유튜브 영상을 봤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영상에는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었다. 영상에 나온 한 사람(A)은 다른 한 사람(B)을 칭찬했다. A가 보기에 그 사람(B)은 정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자기 일을 했고, 결국에는 자기의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B가 칭찬을 받게 된 주된 원인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 환경에 굴하지 않고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영상에 나오는 또 한 사람(C)이 있었다. 그는 대내외적으로 유명 인사이고, 어떤 한 분야의 새로운 얼굴로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이상하게도 그(C)는 B를 향해 칭찬을 한 사람(A)의 저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C)가 칭찬의 저의를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칭찬을 받은 그 사람(B) 뿐 아니라 자신도 정말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일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C)의 말을 들어보면,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도 끝까지 자신의 일을 하였고, 그 우직함을 통해서 지금의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 그 사람이 말한 주된 의의의 골조였다. 그 의의의 골조로 생각했을 때에 C가 A의 칭찬의 저의를 인정하지 않은 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A처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영상 속에서 저 두 사람의 대화는 1분 남짓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물음이 떠올랐다. 그 물음은 어찌 보면 ‘경쟁’적으로 보이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과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의 ‘성실’과 ‘노력’이라는 것이 정량화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이었다. 다시 말해, 어떤 한 사람의 노력이나 의지, 성실은 정량화되어 비교할 수 있는 것일까. 정량화될 수 없다고 한다면 저 대내외적으로 유명세를 얻는 사람이 말한 그 말의 의도는 무엇일까. 저 의도의 저변에는 자신이 그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상황’과 ‘환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환경’과 ‘상황’의 이점은 별로 크지 않으며, 그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는 어떤 노력이 자신에게 있었다고 어필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물음이었다.

Poussin jean, Balance à tabac 1850. 2007. 출처=위키피디아.

각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조건이라는 것을 정량화할 수 있다면, 아마 각자가 처한 상황과 조건을 비교하기란 쉬운 일이 될 것이다. 어떤 이의 상황이 10이고 어떤 이의 상황이 100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10이라는 조건에 처한 사람들이 훨씬 더 어려운 조건을 지녔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득 분위 1분위인 사람과 10분위인 사람을 비교한다면, 상대적으로 소득 분위 1분위인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10이라는 조건에 있는 사람은 100이라는 조건에 있는 사람이 누리는 문화적인 조건들보다 훨씬 부족한 문화적 조건들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제적인 것으로 어느 정도는 사람들의 조건과 상황을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각자의 조건과 상황을 정량화는 대략적으로 그릴 수 있다. 그러나 각자가 처한 상황과 조건을 완전히 정량화 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정량화될 수 없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환원되지 않는 것들, 우리 주변에서 그것을 쉽게 찾는다면 아마 ‘마음’일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숫자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다. 아니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품는 것들은 숫자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품는 희망이나 꿈, 믿음과 같은 것들은 어떤 정량화된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간에 우리가 품는 마음은, 그것이 희망이든 소망이든 꿈이든, 그 상황에 비례한 것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황을 초월하는 꿈을 가질 수도 있고, 그 상황에 걸맞지 않은 소박한 꿈을 가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은 상황에 완전히 구애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봐야할 것은, 그렇다고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종류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마음은 각자가 처한 조건과 상황을 그려볼 수 있는 정량화 기능에 잡히지 않는 것들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7분위에 처한 사람이 둘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한 사람은 지방에서 사업을 통해서 경제적인 조건을 구축한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수도권에서 교육직이나 연구직과 같은 전문직을 통해서 경제적인 조건을 구축한 사람이다. 두 사람의 재산 규모는 거의 동일하다. 이 두 사람의 아들들이 전문직이라는 꿈을 꾸고, 또 그 꿈을 이루고자 할 때, 우리는 아마도 수도권에서의 교육직을 하고 있는 이의 아들의 꿈이, 그 꿈을 향한 노력이 상대적으로 좀 더 유리한 조건을 지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수도권에서는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쉬울뿐더러,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쉽고, 그 꿈을 유지하고 이루기 위한 상황들에 거하기도 쉽다. 역으로 두 사람의 아들들이 사업을 꿈꾼다고 생각해 보자. 수도권의 이점이 분명하게 있겠고, 부모의 직종에서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경우에는 전문직을 꿈꾸는 것보다 조건이나 상황이 좀 더 평등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과 관련하여서 정량화되지 않는 것들은 크고 작은 영향을 준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서, 정량화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의 크기와 깊이는 커지기도 하고 깊어지기도 하며, 유지되기도 하고 상실되기도 한다.

인간의 마음은 행동으로, 그것이 완전하게 직결되지는 않더라도 표출된다. 인간의 행동 또한 정량화되는 것이 아니다. 결과는 분명하게 어떠한 정량화를 할 수 있겠지만,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의 인간의 노력과 성실은 정량화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물론 그것을 ‘시간’으로 측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시간이 그 사람의 노력을 완전하게 측정하지 않는다. 시간의 양이 질을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이 충분하더라도 질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동시에 그 노력이 자리한 곳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곳이거나 어떠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분명히 그것은 노력의 질에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 동시에 그것이 꼭 노력의 질을 상승시키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환경이 없어도 노력의 질은 상승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이라는 것도 인간의 마음과 같이 다양한 부분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영향에 완전히 의존적인 것도 아니고, 완전히 자발적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정량적인 것으로 노력이라고 하는 것을 수치화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수치화를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한 행동이나 노력을 비교하며 평가할 수 있을 것이지만, 모든 것이 정량화되지 않기 때문에, 정량화를 하여서 대략적인 것을 추측하여 비교하더라도, 정량화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로 인하여서 평가 불가능한 지점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다시 유튜브 영상으로 돌아와서, 내가 C의 발언에서 불편함을 느낀 것은 정량화될 수 없는 인간의 행동과 노력, 마음을 너무나도 쉽게 생각했다는 것에 있다. B와 C는 어찌 되었든 유명세를 얻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과거를 살았는지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B는 불우한 상황에서의 열심과 노력이었다. 자신이 선택해서 직업을 얻은 것도 아니었고, 우연치 않게 그러한 직업을 얻은 것이었으며, 거기에서 어떠한 인맥이나 도움이 없이 조금씩 유명세를 얻은 것이었다. 선택지가 많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열심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고, 그 노력이 그 어려운 상황과, 그 어떤 도움도 없이 이루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 그에게 ‘꿈’은 어찌 보면 소박한 꿈일 것이다. 어떤 직종의 ‘최고’가 되겠다는 꿈보다는 어엿한 하나의 직업인이 되겠다는 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소박한 꿈에도 그 직업 체계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예를 들면 요리사들에게서의 기본적인 원리들), 그는 그 원리에 따라 직업적인 가치로서의 유명세를 얻을 수 있었다. 이와 다르게 C가 행한 노력은 어떤 부조리한 문화적인 상황에서의 꿈을 향한 노력이었다. C는 자신이 그 직업을, 그 분야를 선택했다. 아울러 자신은 그 꿈을 위한 다양한 선택지(예를 들면 유학과 같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어떤 열심, 부조리한 문화적 상황에 있는 그 열심, 어떤 꿈이라는 목적에 정초된 그 열심은, B가 처한 상황에서의 열심과는 다른 열심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선택할 수 있는 자리의 유무는 다른 열심을 요구하고 다른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C는 B가 행한 노력의 의의를, 그리고 그 노력을 보고 칭찬한 A의 저의를, C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의 노력과 동일하다는 말로 쉽사리 동치 시켰다. 그 의의가 전혀 아니었는데도. 결국 정량화되지도 않기 때문에 쉽게 비교할 수 없는 ‘노력의 의의’를 어떤 것에 동일화시킴으로써, 그리고 동일화시키는 것 저변에 경쟁이라는 배경과, 그 안에서 ‘나’도 그러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전시하는 것에서, A의 노력의 의의가, B의 칭찬의 저의가, C의 노력의 의의가 전반적으로 옅어졌다. 아마 C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겠지만, C가 B보다는 윗사람이었기에, 그리고 C가 보여준 전시의 모습에서, 어떠한 모습이 감지됐다. 비약적일 수는 있지만, 아마 그것은 ‘자아의 비대’일 것이다. 다른 것을 인정하고, 다른 것을 인정하기에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을 수긍하고, 그 상황에서의 다른 의의들을 인정하는 것. C의 말에는 그러한 것들이 경쟁적인 상황에서의 자신이 이룩하고자 하는 사회적 명예로 인해 가리워지고 있었다. “나도 열심히 노력했어”라는 쉬운 말. 이 말은 누군가를 ‘인정’함으로 정량화되지 않는 어떤 것의 의의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어떤 정량화되지 않는 것을 담지하기 때문에 쉽사리 비교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기에 쉽사리 동치 시킬 수 없지만서도, 내가 ‘노력'(거의 노력이라는 의미는 남들이 모르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노력을 했다는 식의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했다는 말을 통해서 자기를 전시하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인다. 자기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러면서도 어떠한 노력의 과정(그 노력의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을 비교할 수 없는 것들에 동치화시키면서 보여주려는 어떤 전시를 나타낸다. 자기의 어떤 초인적 노력.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해낼 수 있었다는 어떤 신화. 그러나 그 신화는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는 상황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게 만들었고, 아울러 타인의 상황과 그 상황에서의 열심도 인정하지 않게 만들었다. 인정하지 않으면서 인정받으려는, 인정받기 위해서 자기를 전시하는 것.

그러나 인정은, 어찌 보면 옛날 사람들의 말처럼, 인정을 해주어야지만 받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인정해 주어야지만, 자신도 그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가 바라는 모습을 ‘전시’하려는 것은 아니고, 정량화되지 않는 것들을 자기가 바라는 모습으로 욱여넣는 것도 아닌,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보이는 것들에 의의를 인정해 주는 것. 그러한 인정만이 자기가 전시하기를 바라는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모습 저변의 의의까지도 인정받을지 모른다. 누군가를 안으면, 안겨 있는 나를 발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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