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릉이마스터의 오늘의 똥 6

따릉이마스터

언제나 글을 쓰는 건 고통스럽다. 어떤 글을 쓰려고 하든지 간에 무엇인가를 쓰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니 고통스럽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매우 쉽게, 아주 기술적으로, 어떤 ‘수학적인 것’처럼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글들은 어떤 ‘울림’이 없다. 기술적으로 쓰는 어떤 글은 지식적인 습득의 유희는 있겠지만, 그 글로 야기되는 어떠한 울림이 덜하다. 또 다른 누군가의 글은 매우 기만적이기도 하다. 자기의 모습을 어떠한 ‘상상의 나래로 만들고, 그 모습이 마치 자기인 양’ 쓰는 글들이 있다. 웃기게도 그 글들은 사람들을 속이기도 한다. 추상화된 글은 분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지우면서, 아니 죽이면서, 아니 사라지게 만들면서 어떠한 모습을 전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의 기시감을 안다. 그 글의 기시감을 안다. 그 글의 기시감은 웃기게도 ‘울림’으로 느껴진다. 울림이 없다. 울림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글은 ‘몸’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글이 느낀 ‘기시감’이 어떠한 대화의 장을 열어놓지 않고, 그 글을 쓴 저자를 의심하게 만든다.

John William Waterhouse, Echo and Narcissus, 1903, Oil on canvas, 109.2 cm × 189.2 cm (43 in × 74 in). 출처=위키피디아.

글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점은, 너무나도 무서운 그것은, 온몸으로 그 무엇인가를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다. 아울러 온몸이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에는 어떤 ‘선험적’인 것도, ‘편견’도, ‘선-인식’도, 그 어떤 것도 그 느낌을 이기지 못하게 만든다. 오히려 그 느낌은 우리의 어떤 ‘편견’까지도 재고하게 만든다. 글에 그 무엇인가를 덧입고 덧입힐수록, 이상하게도 글은 화려해지는 것이 아니라 초라해진다. 역설적이게도 글 그 자체를, 그 어떤 의의만을 남기려고 하면 할수록, 글은 어떤 울림의, 공명의 공간을 열어젖힌다. 그 공간은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 글에서 울려지는 어떤 한 울림은 매우 급진적인 한 소통을 보여준다.

좋은 글은 급진적인 소통을 야기시키는 어떤 울림의 공간을 열어젖히고, 독자는, 그 글을 쓴 저자까지도 그 공간에서 급진적인 소통을 나눈다. 그 글의 의의는 분명히 ‘저자’가 글을 쓰는 행위에서부터 시작했겠지만, 저자에게 갇혀지는 것이 아니고, 그 의의가 저자가 보여주려는 어떤 모습을 전시하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이런 글을 쓰는 저자는 전면으로 자기(그 모습이 어떠한 모습이든 간에)를 끌고 가야 하지만, 그 글의 의의는 저자의 모습을 흐리게 만들거나 지우면서 어떤 울림의 공간을 열어 젖힌다. 서로가 무엇인가를 나누는 그 공간에서, 울림을 야기하는 그 글의 의의는 어떤 한 의미로 고정되지 않고, 어떤 한 체계에 갇혀지지 않고, 그 누구에게 귀속되지 않은 채 부유하며 소통하는 자들에게 새로운 공간을 열어 젖힌다. 이상idea도 아니고 실제real도 아닌, 그러나 동시에 실제이기도 하고 이상이기도 한 그 미묘한 영역의 공간을 열어 젖힌다. 소통으로, 소통을 통해서, 소통만이 채울 수 있는 미묘한 영역. 모든 것을 의문에 부치고 모든 것을 회의하지만, 동시에 존재론적인 그 모든 것을 긍정하게 만드는 그것. 이 영역에서, 이 영역만이, 그리고 이 영역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술할 지 모르는 ‘좋은 글’을 느낀다. 아니, ‘좋은’이라는 서술어를 만난다. 그 ‘좋은’이라는 서술어는 어떤 것이 좋다고 말하기 어렵게 만들면서도, 좋다라는 말로 형언할 수 없기에, 좋다라고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다. 매우 고통스럽다. 어떻게 해야지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를 잘 모르는 것에서 고통스럽지만, 한 번이라도 ‘좋은 글’을 맛보았다면,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수많은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어찌보면 존재론적인 고통일 수 있는 그 고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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