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하나의 탄핵이 이루어졌다. 길거리에 사람이 안보일 정도로, 모든 국민들이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집중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파면될 것이라 예상했고, 그 예상대로 판결이 나왔다.
헌법재판소의 파면 판결을 보고,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직장에서 같이 일했던 전 동료의 발언이었다. 직장의 분위기 상으로 정치적인 견해가 진보적인 것보다는 보수적인 경향이 있었던 곳이었다. 물론 보수적이라고 해도 지금의 극우적인 것보다는 아마 민주당 계열에 가까운 보수적인 경향의 사람들일 것이다. 그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진보적인 운동권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쉽사리 볼 수 있는 ‘운동권’의 캐치프레이즈를 표현하고 다니는 사람,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입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이었다. 물론 직장 사람들이 그를 어려워한다거나, 이상하게 생각한다거나, 거리를 둔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이상하게도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묘한 이상함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그가 말한 것은 충분한 정치적 ‘당위’를 가지고 있었다. 마땅한 이유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의 말이 불편한 건 여전했다. 특히,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의 정치적 입장이 매우 ‘진보적이다’라고 평가를 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에 이싱한 기시감을 지속적으로 느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외적으로 유명한 정치인(예를 들면, 10년 전에 정치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안철수라고 할 수도 있고, 3년 전 대선에서의 윤석열이라고 할 수도 있고, 1-2년 전에 한동훈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이재명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정치인)이 무조건적으로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그 이유의 전제는 현재의 어떠한 ‘역사적’·’상황적’인 책무를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 꼭 ‘그 사람’밖에 없다는 듯의 늬앙스를 품고 있었다. 물론, 여기서도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긴 했다.
이런 언변은 지속적으로 계속 나왔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의 LGBTQ의 문제에서 극히 두드러졌다. 나는 LGBTQ를 인정하는 입장이지만, 그의 태도와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태도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의 태도는 어떤 우월감이 있었고, 그가 말하는 표현에서 그 우월감이 드러났다. LGBTQ와 관련된 사회적·정치적인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깨어있는 사람’인가, ‘깨어있지 않은 사람’인가를 판단하는 그의 태도가 그 우월감을 드러냈다. 자기 자신이 타인을 깨어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을 지닌 자로 행세하기 때문이며, 그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 정치적·사회적 입장이었다. 자신이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고, 그 자신이 정말 그런 의도로 행동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그의 태도는 모종의 우월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울러 그의 우월감에는 어떤 투쟁을 갖고 있었다. 어떤 것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웃긴 것은 한국에서의 진보적인 입장에서 ‘투쟁’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물론 이게 진보적인 입장의 어려움이기도 하기에 기존의 입장을 고려해야 되기도 하며, 나아가 기존의 정치·사회 판을 흔들어야만 한다. 이 작업은 모두에게서의 완벽을 추구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서 어떤 한 집단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배제하는 태도를 지녔다. 자기 입장과 진영에서의 것들만 추구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과 진영논리에 갇혀있지만, 웃기게도 여기에 갇혀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모든 전체를 관조하는 ‘우월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우월성으로의 보편성이 이 상황을 좀 더 낫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떤 역사적·상황적인 책무를 강조하고, 그 상황에서의 어떤 대답을 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그 대답은 어떤 귀결된 종결점 안에서만 작용하는 대답이다. 그런 대답을 할 뿐이다. 그런데 이 대답은 웃기게도 정치적인 보수의 입장에서도 주로 보여지는 대답이다. 예를 들어 문재인 대통령 이후에 윤석열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 과정을 생각해보자. 문재인 대통령 재임 당시의 문제들을 부각하고, 그 부각된 상황에서의 암담한 현실을 말한 이후에, 이 문제들을 ‘해소’할 대통령으로 윤석열을 전시했다. 윤석열은 웃기게도 기존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대통령으로 유권자들에게 설명되었다.(물론 당시 이재명 후보에게서 나오는 소음들도 꽤나 있었지만) 여기서 아무런 행정적인 능력이 없고, 어떠한 것을 보여준 적도 없는 윤석열이 마치 이 사회·정치에서의 구원자처럼 나타난 것은, 그 구원자라는 이미지 아래에 사회·정치·경제적 문제점을 해소할 수 있다는 목적점을 시작점과 동치시켜서 전시했기 때문이다.
내가 기시감을 느낀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그가 사회·정치·경제적으로 말하는 문제들과 현상들은 분명히 설득력이 있었다. 아무런 자료나 정보 없이 말하는 것도 아니었고, 이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 꾸준히 느껴지는 기시감은, 물론 자신이 분석하고 이해한 정치적·사회적 문제가 조금 더 적실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렇게 나온 결론이 자신이 ‘깨어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집단에서 결론을 추출한 과정과 비슷하다는 것이며, 나아가 자신의 정치적·사회적인 입장이 남들보다 더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는 그 미묘한 태도 때문이었다. 물론 정치적·사회적인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정치적 행동과 사회적 행동도 매우 중요하다. 정치적 발언, 사회적 발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많은 부분들은 그 어떠한 것이든 모종의 ‘우월감’이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며, 실상 자기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되어 말하는 일반적인 것들도 그 과정에 있어서는 기존의 입장에서 제시하는 과정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탄핵이라는 큰 사건이 지났다. 또 시끄러워진다. 그리고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는 문제-결과를 동치시키는 사람들이 나온다. 물론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부름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지금 바로 단언할 수 없다. 그 단언은 분명히 ‘소수’라는 민중을 소외시키는 영웅만이 나오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의 문제를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하고, 결과를 정해놓으면 안되며, 끝없이 대화를 해야지만 하고, 통합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통합적인 것의 추구가 완전히 다를 수 있는 상황과 영역을 배제하면 안된다. 통합으로 놓칠 수 있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까지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아마 요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