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

사슴이 말이 되는 기적 세월호가 침몰하던 2014년, 교수신문 연말호에서는 그 해의 사자성어로 '지록위마(指鹿爲馬)'가 꼽혔습니다. 지록위마는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말인데, 사슴을 말이라 부른다는 뜻입니다. 고대 중국 진나라의 내시 조고의 이야기입니다. 조고는 위대한 폭군 진시황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던, 비선실세의 원조 격인 인물입니다. 조고는 진시황이 죽자 그의 유서를 조작해 장남이 아닌 막내 아들 호해를 황제로 세웁니다. 황제의…

우리가 사는 세계 |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4

티 내지 않은 일은 세계에서 사라진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드러난 것만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 불합리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엄연히 내가 한 일인데 드러내지 않으면 사라질 수도 있다니? 아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드러내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다. 아무도 몰라줘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 고독한 내가 한 일은 세상을 바꾼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사과를 먹으면…

드러난 것이 있는 것이다 |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3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티 내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이다. 일꾼과 말꾼의 차이는 마음과 행위의 차이와 같다. 다시 말해 일하기와 말하기 사이의 경계는 속마음과 드러내기 사이의 경계와 같다. 우리는 마음과 행위 사이에 그어진 경계와 비슷하게, 일하기와 말하기 사이에 경계를 그어볼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결코 알 수 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이심전심이라는 말도 그 사람의 표정이나 몸짓, 맥락을 통해 그의 마음을 유추할 뿐이거나 우연한 행동이 알고 보니 같은 의도였다고 믿게 되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가능하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려줄 방법은 말과 몸짓뿐이다. 속마음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타인에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들에게 |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2

일꾼과 말꾼 이야기의 핵심은 일하기와 말하기 사이의 긴장이었다.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를 읽고 몇몇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맞아. 너무 헌신하면 나만 호구라니까. 누가 알아 주지도 않는데 일만 더 하고 있진 않은지 신경 써야겠어.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되는 거야.’ 어쩌면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와… 말꾼 저거는 진짜 낯설지가 않네, 꼭 누구처럼. 저런 사람 어딜 가나 있구나.’ 단지 직장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알려준다거나 뒷담화 따위의 단순한 위로에 그칠 것이었다면, 나는 이 글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를 원한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Pommes et oranges)>, 1889. 캔버스에 유화, 740㎜ x 930㎜. 오르세 박물관. 앙리 마티스, <테이블 위의 사과 그릇>, 1916. 캔버스에 유화, 1149㎜ x 895㎜. 크라이슬러 미술관.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는 바로 우리들이다. 먹고사는 데 바쁘지만 생각하기를 그치지 않는 사람들, 직장인이지만…

일꾼과 말꾼 |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1

어딜 가나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일꾼이라 불러보자. 일꾼은 말하기보다 일하기를 좋아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일꾼의 존재는 알고 있지만 일꾼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사실 대부분의 일은 일꾼이 한 일들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 예컨대 프린터에 인쇄용지를 채워 넣는다든지, 회의가 끝난 뒤 의자를 정리한다든지, 하다못해 바닥에 떨어진 자그마한 쓰레기를…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계몽은 설명할 수 없던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불합리한 것의 합리화. 계몽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따지고 보면 신화와 비슷한데, 인간은 신화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자연을 지배할 수 있었다. 모든 계몽에는 그 안에 불합리함이 담겨 있다. 그 불합리함을 보지 못하는 건, 나만 언제나 옳다는 편집증적 정신이다. 그래서 계몽은 신화가 될 위기에 놓여 있다. 언제나…

퀀텀스토리

휴가를 받아 쉬고 있다. 오랜만에 긴 호흡으로 과학의 바다를 탐험하는 중. 사물세계를 관통하는 규칙을 찾는 일도 결국은 인간이 한다. 겸손함이 세상을 나아가게 만든다. 겸손한 마음씨를 가진 똑똑한 사람들이 세상을 더 살기 좋게 만들었던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들의 겸손함이 없었다면 세상은 아주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이다. 나는 그 방향이 좋은 방향일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국가와 국민을 줄여 써야 할 국회

이번에 국회미래연구원에서 발간한 국가미래전략 인사이트 너무 좋다. 제목은 「'국가'와 '국민'을 줄여 써야 할 국회」.언어와 정치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전제 위에,국회에서 '국가'와 '국민'이라는 단어를 애용한 역사를 살펴보고,국민과 시민, 국가와 정부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으니 적절하게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짧은데, 내용이 충실하다.헌법의 언어도 분석하고, 의회에서 씀직한 단어들의 기원도 설명한다.독일 의사당의 지붕이 투명해 누구나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진보와 빈곤

졸업식했다. 👨🏻‍🎓 기쁜 날이지만 그보다…『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 읽는 중.(일 때문에 『편견이란 무엇인가』는 잠시 접어두고 헨리 조지를 처음 만났다) 내가 경제 문외한이어서 놀라움의 연속.역시나 앞 몇 챕터만 읽고 있지만, 내가 느낀 경이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쓴다. 세상이 진보해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개인의 나태나 무능에만 돌리는 건 별로 멋지지 않은 일이다. 흔히 생산의 3요소라 하는 토지, 노동,…

편견이란 무엇인가

편견이란 무엇인가(The Place of Prejudice) 읽는 중.여러 가지로 놀랄 만한 글이다. 서문까지 읽으면서 놀란 점 주제가 골때리게 참신하다 (편견에 대한 편견 깨기)참고한 문헌들의 깊이와 범위가 상당하다 (플라톤부터 가다머까지)서문을 아주 정교하고 근면하게 썼다 (약 30페이지)거대하고 복잡한 담론을 명쾌하게 풀어내는 재능이 탁월하다 (이름만 들어도 두려운 철학자들을 쉽게 설명한다)작가 아담 샌델이 마이클 샌델의 아들이다 (부전자전도 일종의 편견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