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4권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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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4권 독서노트” 글에 댓글 1개

  1.  아바타
    익명

    고백록 3-4권에 대한 잡생각, 한영현

    그리스도교의 등장 이후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당연히 평생 고통을 겪는 존재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신이 죽임을 당한 이후, 이 필연적인 고통은 더 이상 필연적이 아닌 선택적 고통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심심함’을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라고 설명하며 휴식에 대해 예찬했고, 에릭 로메르도 자신의 영화 수집가에서 주인공 아드리앙을 통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라는 대사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 즉 일하지 않음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우리는 이처럼 당연하게 생각하는 고통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고통을 제어하고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카뮈가 인간을 시시포스에 비유한 것처럼 삶에 있어서 최소한의 필연적인 고통은 존재한다. 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외부적인 환경과 수많은 선택과 인과관계 속에서 최소한의 고통만 받으며 나머지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고통을 마주하여 극복하는 것이 아닌 고통을 회피하는 방법들이 자주 보인다. 최근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책들 혹은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유행을 하는 것도 우연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통을 그저 회피하는 것이 과연 좋은 방법일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철학자의 멋진 명언들과 글귀들, 자기 계발서를 읽고 따라서 열심히 사는 것은 고통을 회피하는 것을 넘어 치유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약의 효과는 그리 길지 못하다. 약에서 깨어나는 순간 사라진 줄 알았던 고통이 더 큰 고통이 되어 다가올 것이다. 고통은 지워지지 않고 더 큰 흉터를 남기게 될 것이다.

    결국 회피보다는 맞서 싸우는 것이 더 좋은 방법처럼 느껴진다. 이 싸움의 결과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많은 고통을 겪은 뒤 주님을 자기 안으로 모셔왔다. 그리고 스스로가 주님 안으로 들어가서 삶의 안식을 찾았다. 인간은 어쩌면 이런 초월적인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이 죽어버린 현대에서 그것의 형태는 매우 다양할 것이고 동시에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 키르케고르는 순간에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얘기하며 현대의 ‘그리스도 교계’를 매우 강하게 비판했다. 그렇다면 믿음이 필요한 시점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할까? 결국 ‘자신’뿐이란 말인가? 사르트르가 말한 ‘스스로 기투(projet) 한 존재’ 그것인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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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4권 독서노트”에 대한 답글 1개

  1. 고백록 3-4권에 대한 잡생각, 한영현

    그리스도교의 등장 이후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당연히 평생 고통을 겪는 존재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신이 죽임을 당한 이후, 이 필연적인 고통은 더 이상 필연적이 아닌 선택적 고통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심심함’을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라고 설명하며 휴식에 대해 예찬했고, 에릭 로메르도 자신의 영화 수집가에서 주인공 아드리앙을 통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라는 대사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 즉 일하지 않음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우리는 이처럼 당연하게 생각하는 고통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고통을 제어하고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카뮈가 인간을 시시포스에 비유한 것처럼 삶에 있어서 최소한의 필연적인 고통은 존재한다. 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외부적인 환경과 수많은 선택과 인과관계 속에서 최소한의 고통만 받으며 나머지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고통을 마주하여 극복하는 것이 아닌 고통을 회피하는 방법들이 자주 보인다. 최근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책들 혹은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유행을 하는 것도 우연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통을 그저 회피하는 것이 과연 좋은 방법일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철학자의 멋진 명언들과 글귀들, 자기 계발서를 읽고 따라서 열심히 사는 것은 고통을 회피하는 것을 넘어 치유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약의 효과는 그리 길지 못하다. 약에서 깨어나는 순간 사라진 줄 알았던 고통이 더 큰 고통이 되어 다가올 것이다. 고통은 지워지지 않고 더 큰 흉터를 남기게 될 것이다.

    결국 회피보다는 맞서 싸우는 것이 더 좋은 방법처럼 느껴진다. 이 싸움의 결과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많은 고통을 겪은 뒤 주님을 자기 안으로 모셔왔다. 그리고 스스로가 주님 안으로 들어가서 삶의 안식을 찾았다. 인간은 어쩌면 이런 초월적인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이 죽어버린 현대에서 그것의 형태는 매우 다양할 것이고 동시에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 키르케고르는 순간에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얘기하며 현대의 ‘그리스도 교계’를 매우 강하게 비판했다. 그렇다면 믿음이 필요한 시점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할까? 결국 ‘자신’뿐이란 말인가? 사르트르가 말한 ‘스스로 기투(projet) 한 존재’ 그것인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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