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황
가. 지방자치
「대한민국헌법」 제8장 지방자치
제117조 ① 지방자치단체는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법령의 범위안에서 자치에 관한 규정을 제정할 수 있다. ②지방자치단체의 종류는 법률로 정한다.
제118조 ① 지방자치단체에 의회를 둔다. ②지방의회의 조직·권한·의원선거와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임방법 기타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지방자치란 지방의 일을 주민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일정한 구역을 기초로 하는 공법인인 지방단체가 그 구역 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복리 증진을 위한 일을 주민들이 직접 또는 대표자를 뽑아서 주민들이 부담한 비용으로 주민들 스스로의 책임 아래 실시 처리하는 것”
노융희
수많은 주민이 모든 사안을 매번 결정할 수 없으니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법을 만들고, 매번 법을 만들 수 없으니 주기적으로 입법자를 선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인을 선출하는 것이 지방자치의 전부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지방자치의 본령은 지방의 행정을 주민의 뜻대로 실천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정은 도구이고 사용자는 주민이다.
그렇다면 지방의회 의원은 어떤 존재인가? 주민을 위해 봉사하는 보조자이다. 주민의 뜻이 행정에 잘 반영되도록 법을 만드는 것, 행정이 법을 준수하는지 감시하는 것, 그밖의 모든 영역에서 주민의 뜻이 우선되도록 봉사하는 것, 이것이 지방의회 의원의 주된 임무이다.
나. 우리나라의 지방의회
우리나라의 지방의회 역사는 짧다. 해방 이전 조선총독부 지방관제(칙령 제354호, 1914년)에 의해 지방행정조직이 운영됐다. 의회는 없었다. 독립 이후, 1948년 「지방행정에 관한 임시조처법」을 제정하고 1949년 「지방자치법」이 제정되었다. 6.25전쟁으로 인해 선거가 연기되어 1952년 최초의 지방선거가 실시됐다. 지방자치단체장은 집권정당에 따라 임명제와 직선제를 오갔지만 기초의회 의원 선거는 줄곧 직선제였다.
1961년 5.16반란 이후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으로 지방의회가 해산됐다. 이유는 분열을 조장하고 부패와 무능하다는 것이었다. 지방자치단체장은 임명제로 바뀌었고, 상급기관장이 지방의회의 기능을 대신했다. 1991년 지방선거 부활되고 광역과 기초 단체장 및 의원을 모두 직선제로 선출하는 지금의 지방자치제도가 유지되고 있다. 부활 초기에는 지방의회 의원에게 무보수 원칙이었으나 2003년 이후부터 의정활동비 등 보수가 지급됐다.
2. 문제제기
가. 지방자치제 발전을 위한 방법
이상의 노정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는 중앙집권력이 강한 국가이다. 지방자치제도 도입 여부는 중앙정부의 의지에 따라 좌우됐다. 투표율을 보더라도 지방선거에 대한 주민의 관심은 국회의원 선거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상급단체가 하급단체를 지도·감독하는 형태는 계속해서 문제로 지적된다. (법제처, 「지방분권 강화를 위한중앙-지방 관계 재정립방안연구」, 2018)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의 문제를 해결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해외 사례를 참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본유의 지방자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해외 사례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나. 해외사례의 한계
일본의 지방자치는 현재 대한민국 지방자치제의 뿌리 격이다. 한국의 광역-기초 자치단체 구분은 도도부현-시정촌 구분을 따른다. 주민에 관한 사무는 가급적 하급단체에서 처리하고, 공동의 사안에 대해서는 상급단체에서 처리한한다.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지방의회의 입법은 법률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진다.
독일의 지방자치는 미국의 지방자치보다 오래됐다. 12세기 도시(Stadt)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도시의 명목적 지배자는 영주나 귀족이었으나 도시 안에서 통용되는 규칙을 별도로 제정했다는 점에서 중앙집권적 국가와는 구분된다. 18세기 프리드리히 2세 시기 지방자치법이 운영되면서 도시는 별도의 자유와 특권을 보장받게 된다. 현대적인 의미의 지방자치는 19세기 프로이센 도시법 제정 이후 시작됐는데, 재산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주민참여가 확대됐다. 20세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법률의 한계 내에서 지방자치권”이 마련됐다.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독일의 각 주는 분할되어 통치하던 승전국에 따라 지방자치 형태가 달라졌다. 동서독 통일 이후 현대 독일에서는 헌법 아래 서로 다른 주의 특징을 인정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미국의 지방자치에 대해서는 알렉시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발췌로 대체한다. 18세기 타운(town)에 관한 설명이다.
"마을이나 타운십은 결사체로서는 유일하게 완전히 자연적인 것으로 어느 곳에 사람들이 모였던 그 자체로 구성된 것이다. 타운은 커뮤니티의 가장 작은 분할체로 모든 국가에, 법이나 관습이 어떠하던, 존재한다. 사람들이 군주제를 채택하거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고 한다면, 인류의 첫 결사체는 신(God)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타운십의 존재는 인류의 존재와 같이 시작된 것으로 타운십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므로 쉽게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타운)의 권한은 중앙(주)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타운이 그 권한의 일부를 주에 양여한 것이다. 그렇지만 타운이 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것은 아니다. 타운은 주 전체의 문제에 관련된 일에만 주에 종속된다."
"시민들의 지방 모임은 자유국가의 힘의 원천이다. 타운 미팅과 자유와의 관계는 초등학교와 학문과의 관계와 같다. 주민과 근접한 거리에 있는 타운 미팅은 자유를 어떻게 이용하고 향유하는지 가르친다. 국가는 자유 정부를 가질 수는 있지만 지방정부가 없이는 자유의 정신을 가질 수 없다."
알렉시스 토크빌
미국 정부의 기원은 ‘타운’으로 상징되는 지방조직이다. 미국은 지방분권적인 정체가 아니라, 국가합권적 정체이다. 지방분권에는 국가가 주체로 전제되고 지방을 객체로 하여 권력을 나눈다는 함의가 있지만, 국가합권에는 지방이 권력을 합쳐 국가를 구성한다는 함의가 있다. 사상 자체가 다르다.
해외의 지방자치 사례는 지방분권의 관점에서 다른 층위를 갖는다.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중앙집권적인 일본에서, 주별 서로 다른 지방자치 형태를 띠는 독일, 국가의 기원에서부터 지방자치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미국 순으로 지방분권의 정도는 강해진다. 우리나라는 이 모든 사례를 그대로 흡수하기보다는 역사적으로 고유한 지방자치 모델을 발굴해야 한다.
3. 대안제시
가. 유학 사상에서 지방자치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는 유학 사상에 기원을 둔다. 명목적으로는 중국 북송의 여씨 형제가 제정한 <여씨향약>이 한국적 지방자치의 기원이다. 향은 약 25,000가구를 의미하는데, 향약은 그러한 조직에서 통용되어야 할 약속을 의미한다. <여씨향약>의 4대 강목은 다음과 같다. 덕업상권(德業相勸, 좋은 일은 서로 권하여 장려해야 함), 과실상규(過失相規,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서로 규제해야 함), 예속상교(禮俗相交, 서로 사귈 때에는 예의를 지켜야 함), 환난상휼(患難相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도와야 함).
<여씨향약>을 남송의 주희가 “약간의 수정을 가해” 정리한 <주자증손여씨향약(주자향약)>으로 편찬했다. <주자향약>에서는 예속상교가 강조되어 월례모임인 “월단집회독약례(독약례)“가 추가됐다. 독약례는 매월 초하루에 시행되는 두 가지 행사로 이루어지는데,하나는 향약의 구성원이 모여 향약의 내용을 문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향약 구성원의 선행과 과실을 적(籍)에 기록하는 것이었다.
향약과 서구 지방자치 역사의 차이가 있다면 처벌권이다. 주자의 향약은 향약 구성원의 교화에 중점을 둔다. 처벌권은 왕의 명령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약은 약한 입법과 강한 행정(교육)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구의 지방자치는 주민의 의견에 따른 처벌이 근간을 이룬다. 고대 아테네부터 민회는 입법뿐만 아니라 사법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반면 행정은 민회에서 선출한 대표자가 수행함으로써 비교적 구분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의 기원은 유학 사상의 기원인 공자의 군자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공자의 군자는 도덕적으로 왕의 덕목을 갖춘 이상적인 사람이다. 왕이 아닌 군자는 사대부로 볼 수 있는데, 중국 주나라 시기의 기록인 <주례>에서사대부는 “(사업을) 일으켜 행동하는 자”로서 실천적 의미가 강조된다. 군자에 반대되는 인물상은 소인인데, 사실상 소인은 대부분의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향약은 향촌사회의 도덕적 지도자인 사대부가 대부분의 구성원인 소인을 교화하는 구조적 장치로 볼 수 있다.
나. 조선의 지방자치
한반도의 지방자치는 삼국시대에서부터 나타난다. 각종 사료에서 국가별 회의체를 언급하는 것은 지역 기반의 귀족인 토호들이 왕에게 의견을 제시했다는 점을 나타낸다. 이러한 구조는 토호가 이미 지역을 대표하거나 의견을 수렴했다는 점을 전제한다. 왕과 토호의 긴장관계는 왕의 조세수취와 토호의 지대수취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후에도 이 긴장관계는 유지된다. 특히 조선에서 중앙정부의 정책은 왕-감사-수령 순으로 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지방정부를 통해 실행되었으나, 지방정부는 사업의 비용과 부담을 지역사회에 의탁했다.
주희의 향약은 고려시대부터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토호 출신의 인물이 관직을 부여받은 향리라는 계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향약의 도입이 논의된 것은 조선의 중종 시대였다. 조선시대의 벼슬은 과거를 통해 중앙정부에서 임명한 품관과 향촌사회에서 임명되는 유향품관으로 구분된다. 향촌사회를 다스리는 수령은 대부분 중앙정부에서 임명되었는데, 이때 수령의 비리를 고소하는 유향소가 유향품관에 의해 운영되었다. 중종 이전에는 유향소가 계급적 대립을 중재하는 기관이었다면, 중종 이후부터는 향약의 본격적인 도입과 맞물려 향약의 시행기관이 됐다.
조선시대의 향약은 약한 사법권을 갖고 있었다. 경범죄는 향약의 구성원이 내린 판단에 따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수령의 행정을 압박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퇴계 이황은 명종 초기 <예안향약>을 제정해 향약의 도덕 공동체적 속성을 강조했다. 특히 <주자향약>과 다르게 과실상규 부분을 강조했다. 퇴계는 향약을 위협하는 행위를 극벌, 중벌, 하벌의 범주로 구분하고 자체적인 처벌을 인정했다. 반면 율곡 이이는 명종 후기 <서원향약> 등을 제정함으로써 향약의 정치 공동체적 속성을 강조했다. 주희와 퇴계가 사대부를 대상으로 향약을 제정했다면, 율곡은 천민까지 향촌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율곡의 <서원향약>은 강신이라는 절차를 중시했다. 강신은 향촌 구성원 전원이 향약 규범의 준수에 관해 평가와 토론을 진행하는 절차이다. 강신은 향약 내에서의 처벌 이전에 구성원에게 공지하는 절차로서, 토론을 통해 공동체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심의 과정으로 기능했다. 율곡 이전까지 향약은 사대부의 도덕적 우월성에 의지하는 제도였지만 율곡에 이르러 사대부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합의가 중요시되는 제도로 변화한 것이다.
향약은 사법뿐만 아니라 구휼의 기능도 매우 중시됐다. 사창제는 향촌 공용의 창고를 만들어 기근에 대응하는 제도이다. 사창제는 향약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므로 중앙정부의 구휼정책과 맞물려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물론 사창제는 지주계급의 의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공동체의 필요로 정책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의의를 갖는다.
이후 조선의 지방정치는 지역별로 서로 다른 향약으로 유지됐다. 예컨대 삼도수군통제사와 같은 군영에서도 자체적인 향약이 시행됐다. 조선의 지방자치는 동학농민운동 이후 큰 변화를 맞는다. 전봉준의 봉기로 지방자치가 중앙정부와 마찰을 빚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학농민군이 설치한 집강소는 동학교도가 수령의 역할을 대신해 사법과 행정의 기능을 수행한 사례이다. 이후 조선은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서 독자적인 지방자치의 색깔을 잃는다.
4. 결론
우리나라의 현대적인 지방자치 역사는 20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지방자치의 발전을 위해 참고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참고해야 한다. 하지만 해외의 사례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고유의 지방자치는 향약에 근거하며 사대부의 도덕적 우월성과 의사결정과정에서의 주민 참여가 근간을 이룬다. 우리나라 고유의 지방자치를 현대적 지방자치 제도에 어떻게 녹여낼지는 앞으로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역할을 지방의회 의원에게 기대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 자체는 틀림없이 지방자치 발전에 이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