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용
좋은 말씨와 조화로움, 우아함과 좋은 리듬은 좋은 성품(에토스)을 따르는데, 이는 어리석음을 좋게 부를 경우의 순진성이 아니라 성격을 진정으로 잘, 그리고 훌륭하게 갖춰 갖게 된 생각일세. ... 그림이나 제작, 건축, 공예, 동물양육이나 식물재배, ... 이 모든 것에는 좋은 모양과 모양 없음이 있네. (3.400e-401a)
2. 겉모습과 에토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들 하죠? 플라톤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좋은 모양을 가지려면 좋은 성품(에토스)를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예술을 비판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아 보이기만 하는 것’은 실제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거죠. 정의로워 보이는 사람도 실제로 정의로운 에토스를 가져야 진짜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에토스가 뭘까요?
3. 동굴의 비유에서 에토스
다시 동굴의 비유로 돌아가 봅시다. 동굴에서 그림자만 보다가 밖으로 나와 실물을 본 사람은, 햇빛에 고통스러워합니다. 동굴의 어둠에 익숙하고 밝은 태양에는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햇빛에 적응하고 실물을 보던 그가 동료들이 불쌍해 다시 내려가니, 동료들보다도 그림자를 구분하지 못해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그새 밝은 태양에 익숙해지고 다시 동굴의 어둠에는 익숙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무엇에 익숙해 하는지에 달렸습니다. 이 ‘익숙해함’이 바로 에토스입니다.
4. 인간의 안과 밖, 그리고 판단
물론 에토스는 인간의 겉모습에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의 “안쪽 것들은 볼 수 없고 다만 ‘외피’만을 볼 뿐”(9.588e)이니까요. 때문에 그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려면 “사람의 영혼과 성품(에토스)로 들어가 이해하고 생각할 줄”(9.577a)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에토스는 언젠가 인간의 겉모습에 드러날 것입니다. 바로 행위로 말이지요.
5. 에르신화: 행위와 에토스
<국가>의 10권 마지막에는 ‘에르’라는 인물이 사후세계를 경험하는 신화가 나옵니다. 죽은 영혼들이 신(다이몬)적인 공간에서 심판자의 판단에 따라 하늘로 올라가 상을 받거나 땅으로 떨어져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심판자가 판단하는 기준은 그들이 살면서 했던 행위들입니다. 좋은 행위를 했다면 상을, 나쁜 짓을 했다면 벌을 받는 것이지요. 행위라는 겉모습으로 에토스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좋은 에토스가 좋은 모양을 만든다는 것도, 결국 인간의 행위를 일컫는 말일 겁니다.
6. 다이몬과 에토스
이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다이몬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다이몬의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처벌을 마친 영혼은 다시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준비를 하는데, 이때 제비뽑기로 다이몬을 선택하거든요. 아마 어떤 다이몬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의 행위가 달라질 겁니다.
<국가> 3권 말미에 등장하는 ‘금은동 신화’에서는 철학자가 황금으로, 수호자는 은으로, 생산자는 쇠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5권에서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이 사람이 바로 전쟁에서 명성을 떨치고 죽은 자들이라 설명합니다. 그리고 황금으로 만들어진 그들은 인간을 지켜주는 다이몬이 됩니다.
7. 다이몬과 양심, 그리고 에토스
이 다이몬이 무엇이냐? 바로 소크라테스가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입니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폴리스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다른 다이몬을 믿었으므로 불의한 자”(24b)라는 이유로 기소되어 사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그 다이몬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내면의 목소리, 바로 양심이었습니다. 양심은 가장 인간다운 삶인 “자신을 검토하는 삶”(38a)이자 철학하는 삶의 결과로 나타나니까요.
8. 좋은 인간이 되는/인간을 판단하는 열쇠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모습보다 양심을 따랐으므로 죽게 됐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겉모습만 보고 에토스를 보지 못해 죽게 만들었고요.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소크라테스는 가장 좋은 다이몬을 가진 인간으로 평가 받습니다. 행복을 ‘좋은 다이몬’, 즉 ‘에우다이모니아’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 있겠지요.
9. 우리 정치와 좋은 에토스
정치는 좋은 인간을 판단하는 일입니다. 좋은 인간은 겉모습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에토스로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그의 행위를 관찰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정치는 너무나도 성급합니다. 철학이 부재한 정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