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중) 우리 편 에토스

Supporters and opponents, the two groups held placards against each other

1. 선을 말할 자격

우리 한국 사회는 “자격”에 민감하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 일가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가 여태껏 공공연히 해온 말과는 너무나 다른 행위들이 드러났다는 것, 그 따위 행동을 해온 자는 그런 고상한 말을 입에서 꺼낼 자격이 없었다는 것, 결국 속물에 지나지 않았으면서 왜 성자인 체 했냐는 것, 그런 것들. 핵심은 ‘선에 대해 말할 자격’이었다. 결국 그는 속물로 드러났고 처벌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하다. 인간이 선을 논할 수 있는가? 신이 아닌 인간이 신적인 것들을 감히 입에 올릴 수 있는가? 메두사의 머리처럼, 끝없이 살아나는 이 질문은 인간을 바닥 없는 미궁으로 물고 들어간다.

사람들은 말한다. 인간은 신이 아니라고. 신이 아닌 인간은 신적인 것을 논할 수 없다. 먹고 사는 일을 넘어선 모든 말은 인간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는 말이다. 인간은 속물이다. 속물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스스로 속물임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모두 거짓이다. 성스러운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오직 선한 사람만이 선을 입에 올릴 수 있다. 이런 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법이다. 음주운전자는 도로교통법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도로교통법뿐인가? 범죄자는 법 그 자체에 대해서, 정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감히, 그 따위 더러운 입으로. 무죄추정, 무기대등, 미란다 따위의 원칙들은 법이 범죄자에 베푸는 은혜이지, 권리가 아니다. 적법절차는 범죄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장치가 아니다.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정당했음을 입증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법이란 무엇인가? 누가 법에 대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법은 약속이다. 그러므로 약속을 지키는 자만이 법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 있다. 물론 법은 우리 중 가장 좋은 인간이라는 입법자가 내놓은 약속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 사회 정의를 추구하겠다, 선하게 살겠다… 입법자가 내놓은 이 약속은 ‘우리는’이라는 복수의 주어를 사용함으로써 입법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따르도록 설득한다. 불법과 처벌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법에는 설득의 언어가 녹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설득의 가장 강력한 수단은 에토스이다. 에토스는 지금 말하는 그가 익숙해하는 것, 과거부터 해온 것, 즉 습관이다. 에토스가 인간을 형성하고 나아가 폴리스를 형성한다는 건 플라톤 이래로 꾸준히 확인된 특징이다. 에토스는 말하는 자의 역사다. 과거는 현재를 결정하고, 현재는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다시 말해 역사는 도덕의 원인이 되고, 도덕판단은 정치판단의 근거가 된다. 법이 약속이고 입법자의 설득이라면, 입법자는 반드시 약속을 지켜온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인민이 법을 따른다.

문제는 현대 민주공화정에서 모든 인민이 입법에 간접적으로 참여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인민은 법을 만드는 자를 만든다. 선거를 통해 입법자가 아닌 인민도 모종의 약속을 한다. 당신이 만든 법을 나는 지키겠다는 약속 말이다. 인민이 법 안에서 생활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인민은 선거에 참여해 입법자를 세우고 그가 만든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이중의 약속을 나타낸다. 인민은 법을 지킴으로써 법이 말하는 ‘우리’에 내가 포함된다고 동료 인민들을 설득한다. 인민도 간접적인 입법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인민도 인민에 포함된다고 설득하기 때문에 에토스가 필요하다. 인민은 법을 지킴으로써 입법자를 뽑을 자격과 법 안에 살 자격이 있다고 다른 인민을 설득하기 때문이다.

에토스를 잃은 인민은 법을 어긴 인민, 즉 범죄자다. 인민은 법을 지키지 않을 때에만 에토스를 잃기 때문이다. 범죄자를 대하는 인민의 태도는 이렇다. 법을 지키는 자만이 ‘우리’ 인민이 될 수 있다. 범죄자는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다… 범죄자는 인민에서 배제된다. 그것이 형벌이다. 그러나 모든 범죄자가 형벌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오직 처벌받는 인민만이 설득에 실패한 인민이 된다. 재판을 거치기 때문이다. 인민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범죄자를 동료 인민들은, 들키지 않은 범죄자와 마찬가지로, 애초에 범죄자가 아닌 듯이 대접한다. 공소시효와 위법성 조각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 설득 상황에서 에토스는 말하는 자의 과거 행적으로, 특히 듣는 자의 시야에 드러난 행적만으로 구성된다. 마찬가지로 재판 과정에서 범죄자는 동료 인민의 시야에 드러난 행적만으로 문제시된다.

범죄자는 형벌을 받는다. 형벌의 초기 모습은 신체절단과 사형이다. 신체절단으로서 형벌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바로 표식과 정화다. 도둑질을 한 자의 손목을 잘랐던 고대사회의 형벌은, 손이라는 신체기관의 부재를 통해 그가 범죄자임을 동료 인민에게 알리는 표식과 범죄의 원인이 된 손을 절단함으로써 그를 범죄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정화를 동시에 도모했다. 표식과 정화는 곧 격리로 종합된다. 코든 발이든 생식기든 신체절단은 기능을 영구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잃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범죄자는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범죄자는 완전한 신체를 갖고 있는 동료들로부터 어느 정도 격리된다. 더 나아가 사형은 완전하고 영원한 격리를 의미한다. 크게 물리친다는 뜻의 대벽(大辟)으로 불렸다는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 사형은 정화의 불능을 의미하기도 한다.

감옥에 범죄자를 가두는 자유형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자유에 대한 형벌은 신체절단에 표식과 정화라는 형태로 희미하게 추구되던 격리라는 목표를 전문적으로 담당하기 시작했다. 격리는 인민을 법 밖에 생활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형은 수형자의 신체를 보존하면서도 범죄자에 대한 격리를 완수한다. 전과는 표식의 기능을, 출옥과 사면은 그 자체로 정화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정화된 범죄자는 동료 인민과 똑같이 살아간다. 주어진 형기를 성실하게 마친 모범수의 범죄는 동료 인민에게서 잊혀진다. 인민은 정화된 범죄자의 에토스를 판단할 때 과거의 범죄를 무시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상식적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진짜 문제가 발견된다. 정화된 범죄자의 에토스에서 범죄는 정녕 사라지는가? 인민의 범죄 이력은 도둑의 잘린 손목과 마찬가지로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형벌을 마친 범죄자를 받아주기로 이미 인민이 약속했음에도, 범죄자는 늘 법 밖에 맴돈다. 범죄자는 다시 법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끝없이 인민을 설득해야 한다. 형기를 마친 범죄자는 동료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범죄자나 범죄를 성공적으로 숨긴 범죄자와 질적인 차이를 전혀 갖지 않는다. 다만 다른 동료 인민과의 관계에서 범죄자는 아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에토스 때문이다.

범죄자는 입법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 질적으로는 있으나 관계적으로는 없다. 범죄자에게 익명의 투표권은 줄 수 있지만 이름을 걸고 나설 자격까지 준 것은 아니다. 자격(deserve)이란, 어원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가 과거에 했던 행위에 어울리는 행위이다. 법은 동질성을 형성하지만 자격은 관계를 형성한다. 동질적인 자의 언어는 양화되고 오직 관계를 형성한 자의 언어만이 동질적이다. 다시 말해, 투표는 법으로 규정된 동질적인 자에게 허락된 익명의 언어다. 익명은 오직 수로만 결정된다. 반면 연설은 법적 자격을 넘어서 정치적 자격인 관계를 형성한 자에게 허락된 언어적 기회이다. 그러므로 에토스는 투표와는 전혀 무관하지만 연설에는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인간은 선을 논할 수 있는가? 신이 아닌 인간이 신적인 것들을 감히 입에 올릴 수 있는가? 범죄자가 법에 대해, 정의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당연히 있다. 그러나 익명의 투표, 양적 언어로만 가능할 뿐이다. 연설이라는 질적 언어는 동료 인민과 관계를 형성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에토스는 설득의 전 과정을 강력하게 지배한다. 범죄자라도 동료 인민이 인정한 범죄자에게만 연설의 기회가 허락된다. 아무리 인간이 신이 아니라지만, 동료 인민으로부터 신적인 인간라는 평가를 받는 자는 신적인 것을 논할 수 있다. 교황의 예를 보라. 동료 인민과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인간은 단지 가능적으로만 선을 논할 수 있다. 관계를 형성한 자의 언어만이 현실성을 얻는다. 정치적 권력은 여기에서 나타난다.

조국 전 장관을 둘러싼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했다. 만일 그가 그러한 과거를 지닌 채 익명의 투표권만 행사했다면 그는 공격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름을 걸고 입을 열었기 때문에, 유한한 육체를 가지고 언어를 통해 무한한 정신을 내보였기 때문에, 과거의 행적이 그와 가족을 삼켜버렸다. 정의와 공정, 형평 따위의 말을 했기 때문에, 그의 행적에서 삶의 필연성에 쫓겨 벌인 일들을 집요하게도 추적했던 것이다. 물론 그의 행적이 그렇게까지 큰 일인가 하는 문제는 다시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행적을 범죄로 보려는 자가 많았다는 점이다. 관계를 상실한 자는 권력을 형성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관계를 형성했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조국은 결코 소크라테스만큼 위대한 인간이 아니지만, 그가 당한 처벌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동일한 위상을 갖는다.

2. 우리 편 에토스

인간이 신적인 것을 말할 자격은, 즉 권력은 관계에서 시작된다. 관계는 에토스의 결과다. 관계는 연사의 설득 과정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청자가 설득된 상태를 의미한다. 연설의 내용이 어떠하든 연사의 말을 따르겠다는 청중의 이러한 의지는 바로 에토스로 인해 가능하다. 에토스 중에서도, 연설의 내용과 연관지어 연사의 행적을 따진 결과로 알게 되는 로고스적 에토스가 있고, 연설 내용과는 무관하게 연사의 행적을 따진 결과로 느껴지는 파토스적 에토스가 있다. 청자는 연사의 에토스를 발견할 때 설득되지만, 그 에토스가 로고스적이냐 파토스적이냐에 따라, 다시 말해 청자가 연사의 무엇을 보고 싶어하느냐에 따라 청자의 에토스가 구분된다. 연사의 말이 끝나면 청자는 다시금 자기 주변에 연설을 늘어놓는 연사가 되기 때문이다. 연설이 반복되면 듣는 자와 말하는 자는 구분되지 않는다.

언어 현상은 복수의 인간이 정신을 합일하는 현상이다. 발언의 내용이 배제된다면 언어는 원숭이의 털고르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잡담처럼 단지 관계만 형성하기 위한 말은 정신의 확장을 전혀 일으키지 못한다. 반면 발언의 내용과 연사의 행적을 늘어놓고 고민하는 자는 자신의 지적 세계 안에서 연역할 수 없었던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 예컨대 청자가 그동안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것을 이룬 자가 나타나 연설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 청자는 연사의 경험을 마치 자신이 경험한 것처럼 설득된다. 반면 연사가 자신의 말과 반대되는 행위를 일삼은 경우, 그의 말이 논리적으로는 아무리 타당하더라도 청자는 설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고스적 에토스는 연사의 과거 행적이 예증적 타당성으로 기능해 청자의 계몽과 관계를 동시에 성취하도록 기능한다.

파토스적 에토스는 오직 관계만을 추구할 때 발견된다. 이러한 에토스는 원숭이의 털고르기 같은 언어생활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성이 감정보다 우월하다는 철 지난 줄세우기를 하자는 건 아니다. 파토스적 에토스도 나름의 중요성을 갖는다. 계몽되지 않은 청자, 즉 연사의 발언을 비판할 수 없는 청자가 정의를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몽된 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연사의 말에 찬동하는 그런 추종자들로 인해 운동한다. 정체가 변화하는 원동력은 로고스적 에토스가 아니라 파토스적 에토스에 있다. 그러나 정체가 유지되는 원인은 오직 연사의 발언과 관계된 에토스를 따지는 청중에만, 즉 로고스적 에토스에만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말은 시간에 관계한다. 법정 연설은 과거 행위에 대해, 찬사는 현재 행위에 대해, 정치적 연설은 미래 행위에 대해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연설의 소재에 주목하면, 과거-현재-미래는 각각 역사-도덕-정치에 대응한다. 에토스는 이 세 가지 소재가 종합될 때 나타난다. 즉, 그가 이렇게 살아왔으니 그는 이런 인간이고 앞으로 그는 이렇게 행위할 것이라는 사고의 흐름 자체가, 말하는 자에 대한 에토스를 형성한다.

연사의 에토스는 청자가 발견하는 것인가, 만들어내는 것인가? 둘 다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연사의 행적은 청자의 해석을 거친다. 모든 해석은 해석자의 믿음과 무관할 수 없다. 청자는 연설과 동시에 연사의 에토스를 해석해냄으로써 그의 에토스를 발견한다. 에토스는 믿음 안에서 발견된다. 플라톤은 이 사실을 동굴의 비유에서 정확히 표현했다. 이 비유에서 믿음은 오직 타인의 말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두 가지 상황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똑같이 벽을 보도록 결박된 무리들이 대화를 나누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선각자가 말하는 경우이다.

εἰ οὖν διαλέγεσθαι οἷοί τʼ εἶεν πρὸς ἀλλήλους, οὐ ταῦτα ἡγῇ ἂν τὰ ὄντα αὐτοὺς νομίζειν ἅπερ ὁρῷεν;
그리고 만일 서로서로 토론할 수 있다면, 그들이 마치 스스로 바로 그것 자체를 본 듯이 여기리라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는가?
515b
εἴ τις αὐτῷ λέγοι ὅτι τότε μὲν ἑώρα φλυαρίας, νῦν δὲ μᾶλλόν τι ἐγγυτέρω τοῦ ὄντος καὶ πρὸς μᾶλλον ὄντα τετραμμένος ὀρθότερον βλέποι, καὶ δὴ καὶ ἕκαστον τῶν παριόντων δεικνὺς αὐτῷ ἀναγκάζοι ἐρωτῶν ἀποκρίνεσθαι ὅτι ἔστιν; οὐκ οἴει αὐτὸν ἀπορεῖν τε ἂν καὶ ἡγεῖσθαι τὰ τότε ὁρώμενα ἀληθέστερα ἢ τὰ νῦν δεικνύμενα;
만일 그 후에 어떤 이가 그 자에게 여태 허깨비를 봤다고 말한다면, 그런데 지금, 보다 더 가까이에 더 곧은 것을 바라보도록 변했다면, 그렇다면 자네는 이제 언급된 것 각각을 그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물음으로써 그 자를 강제하리라 보는가? 자네는 그가 길을 잃으리라고, 그런 뒤 지금 보여지는 것들이 보인 것보다 더욱 옳다는 걸 보도록 여기지 않겠는가?
515d

동굴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두 가지 상황에서 앞에 놓인 것을 보며 타인의 말을 듣는다. 먼저 첫 번째 상황이다. 그의 눈 앞에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가 놓여 있다. 결박된 자들은 서로서로 연사와 청자가 되며 토론한다. 벽에 비친 그림자가 진실이라고, 그들은 허깨비가 아니라 실재를 보고 있다고. 결박된 자들은 말을 통해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고 믿음을 얻는다. 그런데 모종의 계기로 그 중 한 사람이 결박에서 풀린다. 이제 두 번째 상황이다. 풀려났을 때 그는 동굴 벽에 그림자를 비추는 빛과 실물을 본다. 아직 믿음은 생기지 않는다. 그때 누군가 그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대답을 강제한다. 이것이 더 진실 아니냐, 지금까지 본 것은 허깨비 아니냐! 그는 대답을 요구하는 연설의 청자가 되는 것이다. 이 연설에서 연사는 결박에서 먼저 풀려난 선각자일 수도 있고, 양심의 목소리 즉 자기 자신과의 대화인 생각에서 상정된 가상의 상대방일 수도 있다. 대답을 요구하는 연사의 말로 인해 청자는 과거의 거짓과 현재의 진실을 깨닫는다.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두 가지 상황에서, 결박된 자들의 토론과 선각자의 질문은 전적으로 같은 위상을 갖는다. 둘 모두 타인의 말이기 때문이다. 결박된 자는 토론을 통해 그림자를 실재로 믿었다. 그림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전에는 어떤 그림자가 나왔으며 앞으로는 어떤 모양이 나올지, 그들은 무수히 많은 추측을 끊임없이 내놓았을 것이다. 어둠에 익숙한 눈은 그림자를 쉽게 분별하고 미래를 곧잘 예측한다. 그들의 대화는 불 앞에 인형을 든 자들이 오가는 길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길이 아니다. 오직 나가는 길 외에 동굴 안에는 길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선각자를 만나고나서야 그는 이 사실을 깨닫고 길을 잃었다 느낀다. 그럼에도 그는 어둠으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 눈을 찌르는 빛의 고통은 믿음을 행위로 이행하지 못하게 막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즐거움과 고통에 수반되는 “감정은 판단과 관련해 의견을 바꾸도록 원인이 되는 영향”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이미 믿음을 갖고 있다. 판단은 끝났다. 그러나 믿음을 행위로 실현하는 것은 고통에 맞서는 용기다.

그는 동굴 밖으로 올라가도록 강제로 이끌린다.

εἰ δέ ἐντεῦθεν ἕλκοι τις αὐτὸν βίᾳ διὰ τραχείας τῆς ἀναβάσεως καὶ ἀνάντους, καὶ μὴ ἀνείη πρὶν ἐξελκύσειεν εἰς τὸ τοῦ ἡλίου φῶς, ἆρα οὐχὶ ὀδυνᾶσθαί τε ἂν καὶ ἀγανακτεῖν ἑλκόμενον, καὶ ἐπειδὴ πρὸς τὸ φῶς ἔλθοι, αὐγῆς ἂν ἔχοντα τὰ ὄμματα μεστὰ ὁρᾶν οὐδʼ ἂν ἓν δύνασθαι τῶν νῦν λεγομένων ἀληθῶν; ... συνηθείας δὴ οἶμαι δέοιτʼ ἄν, εἰ μέλλοι τὰ ἄνω ὄψεσθαι.
그리고 만일 누군가 그를 강제로 거칠고 가파른 등반으로 끌고, 그가 햇빛 안으로 끌려나가기 전에 풀려나지 않도록 한다면, 자네는 그가 끌려나온 것이 고통스럽고 짜증난다고 생각하리라고, 그리고 그가 바깥으로 나와 빛 속으로 갈 때 그의 눈은 햇빛으로 채워져 실재하는 어떤 것도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 그렇다면 익숙함이 필요하겠네,만일 그가 더 높은 것들을 볼 것이라면.
516a

그는 연사를 따라 동굴 밖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그는 다시 내려가지 않는다. 이윽고 그는 빛에 익숙해진다.

에토스가 왜곡되는 지점은 미래전망이 과거사실의 해석을 과도하게 주도하는 경우이다. 바로 역사의 정치화다. 청중은 연사의 말을 대체로 듣지 않지만, 소수는 귀를 기울인다. 귀를 기울이는 소수 중에서도 대다수는 기대를 갖고 듣지만 오직 소수 중의 소수만이 사심없이 연사의 말 그 자체를 듣는다. 여기서 전자는 파토스적 에토스를, 후자는 로고스적 에토스를 발견한다. 기대를 갖고 연사에 귀 기울이는 청중은 미래에 원하는 바가 있다.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이 입을 열 때에야 비로소 함께 귀를 연다. 이해관계에 매몰돼 부분적인 사고만 가능한 이들은 단 하나의 판단만을 한다. “저 자는 우리 편인가?” 이 순간 ‘우리 편 에토스’가 등장한다.

우리 편 에토스는 파토스적 에토스가 타락한 형태이다. 연설의 내용은 문제삼지 않고 연사의 자질만을 문제삼는 태도는, 운에 취약하다. 다시 말해 파토스적 에토스는 운에 따라 정체에 영향을 끼친다. 다행히 철학자를 연사로 만나는 경우에, 파토스적 에토스에 심취한 청중은 그에게서 권위를 느낀다. 그의 연설에 따라 사회는 일사분란하게 질서를 형성하고 새로운 왕정으로 정체를 변화한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인간을 지도자로 추대하는 경우에 그의 권위와 사회의 질서는 빠르게 무너지고 정체는 타락한다. 모든 인간이 발언권을 얻어 모든 언어는 잡음이 되고 그 어떤 연설과 설득도 불가능해진다. 한계와 조화를 상실한 민주정에서 자유는 무의미해진다. 모든 인민이 서로를 물어뜯는 자연상태가 도래한다. 이때 사람들은 ‘우리 편’의 이름 아래 단결한다.

이건 단지 사고실험이 아니다. 우리 편 에토스로 사안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도처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정당에서, 회사에서, 인간이 모인 집단이라면 어디서든 우리 편 에토스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 편 에토스를 지닌 자들이 논쟁을 벌이면 사안 그 자체는 사라지고 오직 피아식별만 남는다. 사회는 정확히 양분되어 가해와 피해를 주고받는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모순된 평가가 공존한다. 한 사람을 두고도 범죄자와 신적인 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주어진다. 사회는 변화하지 않고 분열된다. 변증 없이 양편의 논박만 끝없이 반복된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지껄이지만, 자신의 말이 명백히 틀렸음을 알아차리는 경우에도 계속해서 밀고 나간다. 이들의 목적은 단 하나, 우리 편에 대한 우정을 확인하고 상대 편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우리 편 에토스에 빠진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둔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들은 답을 알고 있다! 단지 그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이미 내린 판단을 외면하고 우리 편이 내릴 법한 판단으로 슬쩍 바꾸기 때문에 우리 편 에토스가 기능하는 것이다. 인간은 좋은 생각 즉 양식을 공평하게 분배받았다. 양식은 양심이다. 그들 마음속에는 양심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벗어나 고유한 판단을 타인 앞에 내세우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혼자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 친구를 잃어 겪는 괴로움을 온몸으로 마주하겠다는 결심만이 인간을 로고스적 에토스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침묵한다. 양심의 목소리는 소리없는 아우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명분이 있다. 분배의 문제다. 부당한 분배는 분노를 낳는다.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단 하나, 상대에게 돌아가서는 안 될 과실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 편은 자격이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의 불이익을 위해, 혹은 이익과는 상관없이 단지 모욕의 즐거움을 위해, 그들은 상대방을 문제삼는다. 사회의 분배가 그렇게 잘못되고 있는가? 상대 편은 정말 자격이 없는가? 반대로, 그들 자신은 자격이 있는가? 그것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렇게 믿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믿어야 그들은 ‘우리 편’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에토스의 조건

에토스의 관점에서 모든 설득은 다음과 같은 논증을 함축한다. 다시 말해, 다음 연역에서 건전하다고 평가되는 경우에만 연사는 청중에게 에토스를 얻는다.

(1) 인간은 자신에 비해 더 낫거나 동등한 인간을 모방해야 한다.
(2) 나는 당신에 비해 더 낫거나 동등한 인간이다.
(3) 나는 내가 말하는 이것을 했다.
(4) 너도 내가 말하는 이것을 해야 한다.

이 논증을 분석함으로써 에토스의 조건을 도출할 수 있다. 먼저 명제 (1)은 인간의 질서를 나타낸다. 질서는 이성이 큼과 작음을 구분한 결과로 나타난다. 질서는,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분별하기 위해 필요하다. 분별은 질서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그 결과는 앎이다. 인간 사회에서 질서는 지식 뿐만 아니라 행위의 기준이 된다. 특히, 질서는 모방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기준이 된다. 모방의 딜레마는 모든 인간이 자기 행위의 창조자라는 점에서 발생한다. 자발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은 자기 행위의 원인이 된다. 그렇다면 모방의 원인은 행위자인가, 모방의 대상이 되는 다른 인간인가?

질서는, 모방자가 자기 행위의 원인이 되게 하고, 동시에 모방 대상의 행위를 원형으로 삼도록 함으로써, 모방의 딜레마를 해결한다. 행위자가 자발적으로 질서에 따르는 한, 자기 행위의 제일원인이라는 지위를 잃지 않는다. 질서로 인해 모방된 행위와 모방하는 행위는 서로 똑같은 행위가 아니라 닮은 행위로 관계한다. 모방은 행위와 행위 사이에 유비관계를 성립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은 모방을 통해서만 연결된다. 이때 연결의 매개가 바로 질서다.

질서는 명제 (1)을 통해 모방의 대전제로 표현된다. 명제 (4)에서 보듯이 설득은 연사가 청자에게 특정한 행위를 촉구하는 행위이다. 명제 (1)이 없다면 명제 (4)는 단순한 요청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명제 (1)을 통해 질서라는 이념이 인간 사회에 등장한다. 이로 인해 명제 (4)는 명령이 된다.

명제 (2)는 인간의 평등을 나타낸다. 인간의 평등은 직능적 평등과 재귀적 평등으로 구분된다. 직능적 평등은 사물의 동등성과 정반대의 특징을 갖는다. 사물의 동등성은 관계적 차이를 배제한 양적-질적 동등성이다. 예컨대 쌀 한 포대와 쌀 한 톨을, 혹은 신선한 공기밥과 썩은 공기밥을 같게 보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동등성은 인간의 행위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자연의 흐름 안에 놓여 있으므로, 질서가 배제된 평등이라 볼 수 있다.

반면, 직능적 평등에는 질서가 전제된다. 질서는 인간의 행위 능력, 즉 직능을 통해 나타난다. 직능의 관점에서 인간이 몇 톨의 머리카락을 갖고 있는지, 성별이 무엇인지는 전적으로 배제된다. 단지 인간이 신발을 만드느냐, 사람의 병을 고치느냐, 다른 인간을 이끄느냐 하는 차이만 존재한다. 행위하는 인간은 행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등하다. 인간의 직능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관한 대답이다. 직능에 관한 질문에는 반드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느냐에 관한 질문이 전제되어 있다. 이유를 묻는 의미의 영역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은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질서가 행위를 규제한다.

인간이 직능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자기 직능의 탁월함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인간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자기 직능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자는 자기 생명과 더불어 인간 사회를 보존한다. 유능한 자 주위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동료 인간이 모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로 교환을 통해 관계를 맺으므로 공동체의 기원은 인간의 직능적 탁월함이다. 열등한 자가 우월한 자와 같다는 식의 평등은 인간이 모여 구성한 정치적 세계를 지속할 수 없다.

유능한 자는 힘을 갖는다. 이때의 힘은 자신의 말이나 행위를 동료 인간에게 보여줄 수 있는 힘, 즉 정치적 힘이다. 그러므로 직능의 관점에서 다른 인간을 능가하는 자만이 복수의 인간에게 정치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반대로 말하면, 열등한 직능을 가진 자는 정치적 세계에서 배제된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절대적으로 열등한 인간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바로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다. 매사에 다재다능한 천재라도, 인간은 단 하나의 몸을 갖는다. 어떤 인간도 여러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특정한 시간에 하나의 일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이든 타인에 비해 잘하는 일이 있다. 모든 인간이 교환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인간의 모든 일이 직능과 연관된 것은 아니다. 잡담이라는, 생산과 교환 영역 바깥의 활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직능에도 연관되지 않은 사안에 관해서는, 모든 인간은 인간이라는 자체로 평등하다. 인간은 인간은 평등하게 여겨야 한다. 그를 배제하는 순간 그 자신이 배제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뼛속까지 진정한 인간인지 아니면 단지 인간과 비슷하게 보이는 존재인지는 문제가 된다. 하지만 그를 배제하면 언젠가 자기 자신을 배제하게 될 것이므로, 인간을 배제하려는 인간이 오히려 숨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비교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만 우열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평등을 재귀적 평등이라 부를 수 있다. 재귀적 평등은 행위하는 인간이 논리적 모순을 겪지 않도록 한다.

직능적이든 재귀적이든 모든 평등에는 인간의 질서가 전제되어 있다. 바로, 열등한 자는 타인의 시야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질서다. 우열을 따지지 않기로 정한 경우에도 이 질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재귀적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은 논리적 모순을 저지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열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제 (2)로 나타난 인간의 평등은 우월하거나 동등한 자가 타인에게 드러난다는 정치의 조건을 나타낸다.

명제 (3)은 진실을 나타낸다. 진실은 현상에 일치하는 언표이다. 현상은 사물과 인간의 행위로 구분된다. 사물은 좀처럼 변하지 않지만 행위는 인간의 자유로 인해 쉽게 변한다. 사물이 있다거나, 행위가 어떠하다고, 언어를 통해 인간은 표현한다. 언표가 사물과 행위에 일치하면 진실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다. 물론 인간이 사물 그 자체나 인간의 마음속을 알 수는 없으므로, 모든 진실은 정치적 조건에 처한다. 직능상 우월한 사람이나 동등한 다수가 한 언표에 일치할수록, 인간은 언표를 진실처럼 여긴다.

약속은 언어에 스스로를 강제하는 행위다. 약속은 정치적 세계에 안정성을 깃들이는 유일한 행위다. 자유는 변화의 원인이다. 자발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은 타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쉽게 바꾼다. 이로 인해 인간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 사물에 자기 자신을 종속시킨다. 그러나 약속은 인간적 안정성의 원인이다. 변화의 가능성이 자연의 흐름 외에 전혀 없는 사물과 다르게, 인간은 약속을 지킴으로써 자유로운 행위와 모습의 불변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 약속을 지키는 인간만이 스스로 과거에 약속한 모습으로 타인 앞에 서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약속은 자율의 이념을 가능하게 한다. 자율은 자유의 인간적 모습이며, 재귀적 강제를 통해 나타난다. 이때 약속의 기능은 변화와 안정의 매개다. 마치 질서가 자발적 행위와 모방을 매개한 것과 같다.

명제 (2)와 명제 (3)은 서로 필요충분조건이다. 약속을 지키는 자는 우월하거나 동등한 인간이다. 열등한 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에토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나타난다. 질서의 이념과 인간의 평등을 아는 사람이라면 약속을 지킨 자의 말을 따른다. 솔론이 자신의 채권을 소각한 행위는 그 자체로 강력한 이 된다.

로고스적 에토스는 연사의 말과 행적을 비교한 결과 나타나는 무엇이다.

파토스적 에토스에는 어떠한 논리도 없다. (1)부터 (3)까지 어떤 명제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4. 비판대중

비판하는 자만이 찾을 수 있다.

거리두기는 자르기이다. 거리를 두지 못한 사람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비판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비판했다.

비판은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다만 진리의 편을 들 뿐이다.

인간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동물이다. 없던 행위를 만들어낼 수 있다. 행위의 제일원인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재귀적 평등을 문제삼는 인간은 그 자체로 열등하다. 타인의 자격을 문제삼는 자는 반드시 자격을 문제삼는 자신의 자격을 문제삼게 된다.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점을 인간은 지적할 수 있다. 그러니 신이 된 듯이 오만을 부리는 자에게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이,

상대방의 과거를 보고 판단하기. 왜 선은 끊임없이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가? 뻗을 자리를 보고 눕기. 무도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도하게 대하기.

5. 위선

(작성 중)

청중 없는 연사는 낭만적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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