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성염 역, 경세원, 2021.
S. AURELII AUGUSTINI CONFESSIONES. EDIDIT CAR. HERM. BRUDER. PHIL. D. AA. LL. M. EDITIO STEREOTYPA. LIPSIAE SUMTIRUS ET TYPIS CAROLI TAUCHNITII. 1837.
2023년 5월 6일부터 6월 17일까지 읽다.
2024년 8월 5일부터 읽다.
- 1권. 출생 및 어린이, 소년 시절
- 2권. 내 나이 열여섯
- 3권. 카르타고에서 연학에 몰두하다
- 4권. 9년간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에서 교사를 하다
- 5권.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가고 거기서 다시 밀라노로 향하다
- 6권. 나이 서른
- 7권. 진리를 향한 상승의 길
- 8권. 유일하고 참된 하느님께 회심
- 9권. 세례와 아프리카 귀환
- 10권. 하느님을 찾고 인식하여
- 11권.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태초에 관한 주석
- 12권. 하느님이 만드셨다는 하늘과 땅에 관한 주석
- 13권. 유비적으로 성찰한 세계의 피조물
- 같이 하면 좋을 생각
- 주요 인용
1권. 출생 및 어린이, 소년 시절
유아기, 기억과 말의 문제.
1. 원인으로서 신 1.1.-5.6.
그보다는 제가 당신 안에 있지 않으면 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 아닙니까? 당신께로부터 모든 것이, 당신을 통해서 모든 것이,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1.2.2.
흩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저희를 한데 모으십니다.
1.3.3.
그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으셨으면서도 빚지신 것처럼 주시고, 빚 갚듯이 선사하시면서도 아무것도 잃지 않으십니다.
1.4.4.
quid mihi es?
당신께서는 제게 무엇이 되십니까? ... 아아! 주, 저의 하느님,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저에게 당신이 무엇이 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의 영혼에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너의 구원이다."라고. 이리 말씀하십시오, 제가 듣겠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마음의 귀가 당신 가까이 가 있습니다.
1.5.5.
저의 하느님, 제가 저를 거슬러 제 죄악을 당신께 미리 아뢰지 않았습니까? 또 당신께서는 제 마음의 불경스러움을 사하여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당신께 송사를 거는 것은 아니니 당신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저도 자신을 속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 죄악이 스스로 거짓말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1.5.6.
2. 탄생과 유년기 6.7.-7.12.
인간은 자신의 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기억하는 시기부터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며, 그 이전의 이야기는 아무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도 모두 전해듣거나 다른 인간을 보고 추측한 이야기일 뿐이다.
당신께서 저를 빚으셨습니다. 부친에게서 또 모친 안에서 시간으로 저를 빚으셨습니다.
1.6.7.
겉과 속. 나의 마음은 속에 있지만 사람들은 밖에 있어 타인은 나의 마음을 경험할 수 없다. (1.6.8.)
그 다음에는 제가 어디 있는지 차츰 감지했고, 다른 사람들이 저에게 해 주었으면 하는 저의 의사를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못 한 것이 그런 의사는 속에 있고 저 사람들은 밖에 있어서 자기네들은 어떤 감각으로도 제 영혼 안으로 들어올 길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사지를 버둥대고 소리를 내어 제 의사와 흡사한 시늉을 했는데, 되는 대로 할 수 있는 대로 하는 약간의 시늉을 냈을 뿐입니다. 사실 그것은 어림없는 시늉이었습니다.
1.6.8.
저의 갓난아기 시절은 죽은 지 오래고 그래도 저는 살아 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항상 살아계시고 당신 안에서는 아무것도 죽는 일이 없습니다.
1.6.9.
겉과 속.
당신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남들이 하는 양을 보고서 자기 처지를 짐작하게 남겨 두셨고, 자신을 두고는 많은 일을 부녀자들의 권위에서마저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 어느 누가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내는 장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1.6.10.
한도. 양태. 성염 역주 참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모든 존재자는 양태(modus)와 형상(species)과 질서(ordo)라는 형이상학적 범주를 갖는다. (선들의 본질에 대하여 De natura boni 3.3.) 양태는 한 사물이 갖는 존재의 정도 내지 한계를 가리킨다. 이 범주에서 존재자의 ‘그렇게(quo modo = utcumque)’라는 존재방식이 나온다.”
당신 안에서는 '오늘' 하루가 다하지 않으나, 또한 어디까지나 당신 안에서 완결됩니다. ... 저희의 나날들과 저희 조상들의 나날들이 얼마나 허다하게 당신의 '오늘'을 거쳐 갔는지 모릅니다. 당신의 '오늘'로부터 양태를 얻었고 그렇게 존재하였으며, 다른 날들도 여전히 그렇게 지나갈 것이고 그렇게 양태를 얻을 것이고 그렇게 존재할 것입니다.
1.6.10.
당신께서는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느님이시니, 당신 아니시면 다른 아무도 할 수 없는 그것을 하셨다는 점만으로도 그렇습니다. 유일하신 분이시여, 당신께로부터 모든 양태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지극히 아름다우신 이여, 모든 것을 형상화하시고 당신 법칙으로 만물을 질서 지우신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1.7.12.
3. 유소년기 8.13.-11.18.
언어는 기호의 약속이지만, 말과 글은 서로 다른데, 말은 가르침 없이도 배우는 반면 글은 가르쳐야만 배울 수 있는 활동이다.
제가 말도 할 줄 모르는 갓난아이가 아니고 이미 말을 하는 어린이였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제가 기억을 하고 있고 어디서 말을 배웠는지도 훗날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은 얼마 뒤 글을 배울 때 하듯이, 교육의 일정한 단계로 어른들이 저에게 낱말들을 보여 주면서 가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하느님, 당신꼐서 제게 주신 지성을 가지고 제 스스로 배운 것이었습니다.
1.8.13.
그들이 원하는 바를 몸짓으로 드러내 보이는 점은 모든 민족의 타고난 언어나 마찬가지이니, 그런 언어는 안색으로, 눈짓으로, 다른 지체들의 동작으로, 목소리의 발성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으로 심정을, 사물을 청하거나 갖고 싶은 심정, 버리거나 피하고 싶은 심정을 표시합니다.
1.8.13.
권위.
그러다 보니까 저도 발설하고 싶은 의사의 기호들을 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교환하였고, 부모의 권위와 어른들의 동의에 매이기는 하면서도 인생의 풍랑 거친 사회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1.8.13.
spectacula연극과 ludi경기에 대한 curiositas호기심을 갖다.
소년기가 지나고 나면 얼마나 많고 얼마나 큰 유혹의 파도가 닥칠지 뻔히 보였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저것들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고, 그 파도를 타고 도달할 땅도 벌써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세례를 주어 일정한 꼴을 미리서 갖춰 주기보다도, 그 파도를 타고서 도달할 땅에다 저를 맡기고 그 흙덩이에서 제가 장차 꼴을 갖추어가기 바랐나 봅니다.
1.11.18.
4. 학문과 범죄 12.19.-20.31.
자신을 가엾게 여길 줄 모르는 가엾은 인간보다 더 가엾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13.21.
Hinc satis elucet, maiorem habere vim ad discenda ista liberam curiositatem, quam meticulosam necessitatem. Sed illius fluxum haec restingit legibus tuis, ...
이것으로 미루어 제대로 분명해지는 점은 말을 배우는 데 더 큰 힘을 갖는 것은 까다로운 필요성보다는 자유로운 호기심입니다. 하지만 호기심이 멋대로 흐르는 움직임에, 이 필요성이 당신의 법으로 제동을 걸게 마련입니다.
1.14.23.
습속.
Sed vae tibi, flumen moris humani!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 인간 속습의 강물이여!"
1.16.25.
위선. 당대 교사들은 그리스풍 외투를 입고 티를 냈다.
외투를 두른 교사들 가운데에 서서, 비록 자기들과 같은 먼지바닥에서 노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누가 "호메루스가 이것을 꾸며냈고 인간사를 신들에게 갖다 붙인 것이다. 나라면 차라리 신사를 우리에게 갖다 붙이겠다."고 큰 소리로 외친다면 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이 과연 누구겠는가?
1.16.25.
오, 참다운 생명이신 저의 하느님, 제가 열변을 토하여 수많은 동년배들이자 동급생들을 제치고 환호를 받은들 그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보십시고, 그 모두가 연기요 바람이 아닙니까?
1.17.27.
형식과 내용. 위선. 전도된 습속.
제가 이렇듯 허영에 들떠 있었으니, 저의 하느님, 당신께로부터 멀어져 밖으로 나돌던 것이 뭐가 이상했겠습니까? 그 때는 제게 본보기로 내세워진 사람들이 비록 행실이 나쁘지 않더라도 발언을 하면서 문법적으로 비어법이나 파격법을 써서 하면 당장 트집이 잡히며 부끄럽게 만들어버리는데, 자기들의 색욕까지도 알맞고 규식에 따른 번드르한 말로, 더구나 풍부하고 수식을 갖추어 서술하노라면 되레 칭송을 받고 영예를 얻던 때였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이 모든 일을 보시면서도 잠자코 계십니다. 주님은 너그러우시고 크게 자비로우시며 진실하신 까닭입니다.
1.18.28.
homo(인간)를 omo로 부를 때 교양 없다 비난하는 인간의 법도는 잘 따르면서도 왜 신의 법도는 잘 따르지 않는가?
자기가 당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행하는 짓을 두고도, 새겨진 양심보다 문학 지식이 더 내밀하지는 못합니다.
1.18.29.
“inter hominibus”(사람들 사이에)와 “inter omonibus”(불길한 징조등 사이에) 사이의 연관은 예사롭지 않다. 어린시절의 범죄. 거짓말, 절도, 속임수.
놀기 좋아해서, 실없는 구경거리를 보고 싶은 욕심에, 연극에서 본 것을 흉내 내려고 안달하면서 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거짓말로 보육교사와 선생들, 심지어 부모님까지 속이곤 하였습니다. ... 그런 놀이에서도 저는 남들보다 앞서고 싶은 욕심에 져서 속임수를 써 승리를 얻곤 하였습니다. 딴 애들에게는 제가 곧잘 그러면서도 제가 다른 애의 속임수를 밝혀낼 경우에는 얼마나 모질게 욕을 해댔는지 그보다 당하기 싫은 것이 또 무엇이었겠습니까?
1.19.30.
존재(esse), 생명(vivere), 지각(sentire)은 인간 영혼의 세 기능이다. 내적 감각, 내감.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통감각을 연상시킨다. 상식.
그때라도 저는 존재하고 있었고, 살아있었고, 지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그 안전이란 당신의 극ㄱ히 신비로운 단일성의 자취였고 그 단일성에서 비롯하여 제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내적 감각으로 제 감관들의 통합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러한 감관들 속에서 사소한 사물들에 관한 사소한 생각들을 갖고 나름대로 진리를 향유하고 있었습니다.
1.20.31.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제가 저에게 이것들을 준 적이 없습니다. 좋은 것들이었고 이 모두가 곧 저입니다. 따라서 저를 만드신 분도 좋은 분이시고, 그분이 곧 저의 선이시며, 그 모든 선을 두고 그분께 기뻐 환호합니다.
1.20.31.
2권. 내 나이 열여섯
1. 소년기의 도둑질 1.1.-3.8.
성장기, 배 서리 사건. 악의 문제.
오직 선인 일자로서의 신, 범죄의 원인인 다자로서의 인간. 신은 하나(unus)지만, 다른 모든 것은 여러 개(pluralis)다. unus↔pluralis(multus-plus-plurimus)
저지르고 넘어간 제 패악과 육체적 부패를 저의 영혼에서 기억해내려고 합니다. ... 일자이신 당신을 등지고 다자를 향해 스러지면서 제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2.1.1.
우애에는 경계가 있지만 연애에는 마음과 마음 사이의 경계가 없다.
그렇지만 우애에는 해맑은 경계가 있는 것과는 달리, 연애에는 마음에서 마음에 이르는 한도가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육체의 진흙탕 같은 욕정과 사춘기의 용솟음치듯 뿜어나오는 안개가 자욱했고 그것이 저의 마음을 뒤덮고서 흐리멍덩하게 만드는 바람에, 사랑의 청명함미라는 것을 욕정의 짙은 안개와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2.2.2.
신은 악의 원인이 아니다. 신은 악을 보고도 침묵한다.
제가 제 사욕에 흔들리고 나둥그러지고 들볶이면서도 한편으로 우쭐대는데도 당신께서는 잠자코 계셨습니다. 오, 더디신 저의 즐거움이시여! 당신께서는 그때는 침묵만 하고 계셨고 그래서 저는 자꾸만 당신을 멀리하고 고통의 결실 못내는 씨앗을 향해 더욱 더 치달았습니다. 저의 오만한 실의와 불안한 권태 때문이었습니다.
2.2.2.
당신께서는 자비로이 노기를 보이시면서도 항상 곁에 계셨고 온갖 탈법한 저의 쾌락에다 쓰디쓴 거리낌을 뿌리시면서 저로 하여금 거리낌이 들지 않는 쾌락을 찾아 나서게 만드셨습니다.
2.2.4.
고백은 신에 가까워지는 것.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내밀한 영역을 인간에게 드러내고자 했다. 신에게나 할 말을 인간에게 들려주는 것.
저의 하느님, 당신께 드리는 말씀은 아니고 당신 앞에서 저의 족속에게, 말하자면 비록 소수일지라도 이 글을 접하게 될 인간 족속에게 이야기하는 중입니다. ... 고백하는 마음, 믿음에서 우러나는 삶이라면, 그보다 당신의 귀에 가까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2.3.5.
욕망과 사랑.
더군다나 아버지는 목욕탕에서 사춘기에 이르고 불안한대로 성징이 갖추어진 저의 모습을 보고는 당장저의 몸에서 손자들이라도 볼 듯이 기뻐하면서 어머니에게 알렸습니다. 그런 서두름은 일종의 취기, 이 세상이 창조주이신 당신을 잊고 당신 대신에 당신의 피조물을 사랑하게 만들던 취기입니다. 뒤집힌 의지, 아주 낮은 것들로 기우는 의지, 자기 의지의 보이지 않는 포도주에서 오는 취기입니다.
2.3.6.
악인의 무리에서는 무죄하고 순결할수록 무시당한다.
제가 무죄할수록 못난이처럼 보이거나, 제가 순결하면 할수록 그만큼 얼간이처럼 여겨지는데 그것이 싫었습니다.
2.3.7.
2. 범죄의 본질과 고백 4.9.-10.18.
주님, 당신의 법은 도둑질을 벌합니다.
2.4.9.
[도둑질에는] 정의에 대한 빈곤과 싫증, 불의로 살찐 것 말고는 딴 이유가 없었습니다. ... 제가 탐내던 것을 향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도둑질과 그 죄악을 향유하기 위해서 그 짓을 했습니다. ...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해보고 싶은 심보로 저지른 일입니다. ... 그저 악인이 되고 싶었고 제 악의의 원인은 악의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악의가 추잡했고 저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자멸하기가 좋았고, 저의 결손이 좋았습니다.
2.4.9.
아름다운 물체, 금이나 은이나 그런 모든 것에는 형상이 있습니다. 육체의 접촉엔 교감이 특히 강하고 나머지 감각들에는 저마다의 감관에 부합하는, 물체들의 조정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세 영예라는 것도 명령을 내리고 지배하는 권력으로 인해서 나름대로 기품을 지니므로 그것을 옹호하려는 욕심이 발생합니다.
2.5.10.
정도를 벗어난 저런 경향으로 인해서, 비록 최하로나마 선하기는 하지만 이것들 때문에 더 상위와 최고의 선이 저버림 받을 적에, 주 저희 하느님, 당신께서, 또 당신의 진리와 당신의 율법이 저버림 받을 적에 죄가 범해집니다.
2.5.10.
신 최고선, 의지 중간선, 사물 최하선.
그러므로 악행을 두고 악행이 저질러진 원인이 무엇인지 따진다면, 저희가 최하위라고 말한 저 선들 가운데 어떤 것을 얻으려는 욕구가 나타나거나 그런 선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 드러나기까지는, 그 원인이라는 것이 도대체 믿기지 않습니다. 이런 [최하]선들도 상위에 있고 행복을 주는 선에 비하면 하잘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선이기는 하지만 그 나름대로 아름답고 매력있는 까닭입니다.
2.5.11.
인간의 성격들을 죄로 두고, 신의 좋은 모습을 본뜬 것이라 주장한다. 위선. 아름다움의 원인은 신이다. 신의 피조물이기에 사물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멋은 아무것도 아니다(ecce species nulla est).”
Pulchra erant poma illa, quae furati mumnus, quoniam creatura tua erant, pulcherrime omnium, Deus bone, Deus summum bonum, et bonum verum meum.
저희가 훔친 그 과일은 아름다웠습니다. 만유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이여, 만물의 창조주시여, 선하신 하느님, 최고선이시고 저의 참된 선이신 하느님, 그 과일이 당신의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2.6.12.
죄는 신을 본뜬 무엇. 위선. 악덕의 목록들. 모두 신의 모습을 전도된 방식(perverse imitantur)으로 모방하는 것.
Quandoquidem opera sua malis inimica sunt.
악인들에게는 자기 행위가 곧 원수인데, 당신보다 무구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2.6.13.
Nam et superbia celsitudinem imitatur; ...
그런 점에서 교만조차도 지고함을 본뜨는 무엇입니다.
2.6.13.
무릇 자신을 당신에게서 멀리 떼어놓는 사람들, 당신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은 모조리 당신을 미뚤어지게 본뜨는 것입니다.
2.6.14.
악행에서 좋아했던 것은 동료 악인과의 유대감. (8.16)
그때 저의 마음을 더듬어 보건대, 혼자서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거기서 좋아한 것은 제가 그짓을 함께 저지른 자들과의 유대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도둑질 말고 달리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허나 그 '아무것도 아닌' 그것은 '허무'이니까 저는 결국 허무를 사랑한 셈입니다. ... 그러나 저에게는 쾌감이 그 열매들에 있지 않았고 바로 그 악행 자체에 있었으므로, 함께 죄짓는 자들의 유대감이 쾌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2.8.16.
3권. 카르타고에서 연학에 몰두하다
카르타고 학문기, 사랑의 문제. 겉과 속의 문제. 판단의 문제.
1. 육체와 마니교에 빠졌던 시절 1.1.-6.0.
마땅한 갈망의 대상으로서 신,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애욕에 빠진 자기 자신. 밖으로만 내던짐(소외).(1.1)
아직 사랑하지 못하던 터여서 그냥 사랑하기를 사랑할 뿐이었으며 영문 모를 허전함 때문에 아직 덜 허전한 제가 도리어 미워졌습니다. 오로지 사랑하기를 사랑하면서 사랑할 만한 거리를 찾아 헤맸고 그러면서도 안전하고, 올가미가 놓이지 않은 길이면 오히려 혐오했습니다.
3.1.1.
et tamen foedus atque inhonestus, elegans et urbanus esse gestiebam abundanti vanitate.
저는 구접스럽고 부정직한 인간 주제에 번지르르한 허영에 사로잡혀 의젓하고 교양 있는 척 행동했습니다.
3.1.1.
고통과 쾌락의 전도.(2.2)
극장 연극이 저를 반하게 만들었습니다. 연극은 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가득하여 제 정욕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처럼 눈물겹고 비극적인 일을 당하면 질색하면서도 정작 그런 장면을 무대에서 보고 슬퍼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구경꾼들은 연극에서 고통을 실감하려 하는데 그렇다면 거기서는 고통 자체가 곧 쾌락인 셈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상야릇한 광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3.2.2.
[최민순역] 인간이란 내가 몸소당하면 질색을 하면서도 슬프고 애달픈 것들을 구경할 제면 거기서 서러워지고 싶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성염역]그러나 실제가 아닌, 꾸며낸 연극을 보고 슬퍼하는 동정이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3.2.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 키케로의 해석.(4.8)
마니교. 환상과 신의 차이. 마니교에 빠짐. 감관으로 포착해 기억에 보전한 영상(phantasia)과 감각 없이 상상력(imaginatio)이 자유로이 재구성하는 환상(phantasma).(6.10) “신은 내밀한 데보다 더 내밀하게 있다(eras interior intimo meo).”(6.11)
[최민순역] 당신은 제아무리 하늘에 있다기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런 물체가 아니시고 거기 보이지 않는 그런 것도 아니시니, 당신은 그것들을 만드시고, 그 따위를 가장 높은 것으로 여기지도 않으심이니이다. ... 그리고 당신은 육체의 생명이 되는(그러기에 육체보다 육체의 생명이 더 위요 확실하오나) 영혼도 아니시고 오직 영혼들의 생명의 생명으로서 스스로 사시사 변함없으신 내 영혼의 생명이시니이다.
3.6.
2. 악과 악의 원인 7.0.-9.0.
악의 문제. 신의 물성 문제. 정의, 습속, 윤리. 악은 선의 부재. malum est privatio boni.
“악이 어디서 오는가(unde malum)?” 부패(corruptio)는 선의 감소이므로 악(malum)은 선의 결핍이자 비존재(omnino non est).”(7.12) 변덕스럽고 뒤바뀌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시간. 인간의 시간(καιρός?)은 여일하게 흐르는 시간(χρόνος?)이 아니므로 부분(인간)과 전체(역사)가 맞지 않고 부정의함. 마치 시에서 각운을 쓰는 방법과 같음. (7.13)
et recedens a veritate ire in eam mihi videbar; quia non noveram, malum non esse nisi privationem boni, usque ad quod omnino non est.
[최민순역] 이런 일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고, 진리에서 어긋나면서 진리로 향하는 듯 보였으니 선이 없는 것이 곧 악이요, 결국 존재하는 것이 아니람을 깜깜하게 모르는 소치였습니다.
3.7.
[최민순역] 그렇대서 정의가 여럿이고 또 바뀌는 것이오리까? 아니오이다. 그것은 정의가 올라앉은 시간일 따름, 시간의 흐름이 같지 않사오니 그는 시간인 까닭이옵나이다.
3.7.
[최민순역] 사회란 마땅히 하느님과 더불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거늘... 인간의 양풍미속을 거스르는 죄악도 각각 그 풍속을 따라 피해야 되나니 ... 전체에 맞지 않는 부분이란 언제나 보기 흉한 것입니다.
3.8.
[최민순역] 혹시 하느님께서 풍습이나 그 어떠한 협약을 거슬러서 무엇을 명하신다면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더라도 마땅히 해야 될 것이요, ... 인간 사회 권력에서 더욱 높은 권력이 낮은 권력에 앞서 복종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모든 것의 복종을 받으셔야 옳은 것입니다.
3.8.
악은 거스름. pervertere.
[최민순 역] ... 사람들이 당신을 거슬러 죄지을 때라도 이는 곧 제 영혼을 망치는 일이 됨이요, 결국 죄악은 당신이 내시고 마련해 주신 천성을 일그러뜨리거나, 쓰라는 것을 함부로 씀이 아니면 쓰지 말라는 것을 본성에 어긋나는 데로만 허덕거림으로써 제 스스로 속이는 것이니이다.
3.8.
거스름의 원인은 거만. superbia.
[최민순역] 이런 일이 생기기는 생명의 샘이신 당신을 버리는 까닭이오니 누리를 내고 다스리는 분 오직 하나 당신이 참되시거늘 젠체하는 거만으로 조각난 하나, 그나마 거짓스러운 하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옵나이다.
3.8.
거만의 반대는 겸손. humilitas.
[최민순역] 이러므로 겸손스런 효가 있으면 당신께 돌아가지는 것이요, 이와 함께 당신은 우리를 나쁜 습속에서 씻어주시시고, 죄를 아뢰면 용서해 주시고, ...
3.8.
모든 악행(윤리적, 부분적, 복수적 판단 대상)이 죄악(도덕적, 전체적, 단수적 판단 대상)은 아님. 자본의 축적에 관한 내용 있음. 사람들의 판단 기준은 판단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외형, species facti)과 행동하는 사람의 마음(의도, facientis animus), 행동이 일어난 시점(경우, tempus). (9.17)
[최민순역] 그러나 추행, 폭행, 하고한 부정 가운데는 전진하는 이들의 죄가 있으니... 또 어떤 것들은 죄나 범행같이 보이되 죄악이 아닌 것은 우리 주 하느님이신 당신을 욕되게 함이 없고 사회적 공존을 해침이 없음이오니 ... 이러 므로 사람들 앞에 그르게 보일 많은 행위가 당신의 증거로 옳은 인정을 받았고, 사람들이 기리는 허다한 일이 당신을 증인 삼아 죄로 판단되었사오니 대개 일의 거죽과 일하는 이의 마음이 각각이요, 그때그때의 환경이 아리숭하기 때문이다.
3.9.
3. 여전했던 비행과 모니카의 기도 10.0.-12.0.
모니카가 아우구스티누스를 걱정해 꿈을 꿈. 꿈에서 만난 젊은이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미래 모습을 알려줌.
[최민순역] 그는 당신한테서 받았던 신앙과 정신으로 나의 죽음을 보고 있었으니 ...
3.11.
[최민순역] 그[모니카]가 본 것이란 자기가 나무로 된 잣대에 섰노라니 눈부신 청년 하나가 자기를 향해 벙긋벙긋 웃으며 오는데 ... 그녀 있는 곳에 나도 있다는 것을 보고 알아차리라고 타이르더랍니다. ... 그[모니카]가 내게 현몽을 얘기하길래 나는 기 쓰고 이를 외로 풀어서 ... 그는 서슴지 않고 대뜸 말하기를 "아니다. 내게 한 소리는 그분이 계신 곳에 너도 있다 하시질 않고 너 있는 곳에 그분도 계신다 했느니라." ... 장차 보일 나를 일찍부터 보았던 것입니다. ... 먼 훗날 있을 즐거움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3.11.
주교를 만나 믿음 없이 앎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을 들음.
[최민순역] ... 아직은 가르쳐도 소용없다는 것이었으니 ... "혼자 책을 읽어가다 자연 그 오류와 불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답니다. ... 누구와 토론·반박하는 일도 없이 그 스스로 종파를 버려야겠다고 깨쳐서 필경 버렸다는 것입니다. ... "설마 이렇게도 눈물을 짜내는 자식이 죽을라고."
3.12.
크로노스 사투르누스, 카이로스 템푸스
4권. 9년간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에서 교사를 하다
카르타고 교사기, 친구의 죽음. 존재물음. 사랑.
1. 허위의 삶 1.1.-3.0.
속마음, 내밀한 곳을 신은 본다.
인간은 속고 속이는(mentiri) 존재. (1.1) 이야기는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독자에 의해 해석됨. (3.5)
[최민순 역] 열아홉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아홉 해 동안 우리는 이른바 학예라는 것으로 떳떳하게, 더러는 종교라는 이름의 허울로 숨어서 온갖 욕정에 속고 속이며 남을 호리는가 하면, 스스로 홀리는 것이었습니다.
4.1.
결혼과 육욕의 차이로서 자식.
[최민순 역] 그러던 중 나는 내 경험에서 부부애와 육욕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곧 결혼이란 자녀를 낳을 목적으로 맺어지는 것이로되 유굑에서 생기는 자식은 전혀 마음이 없고 싫은 것이라는 것입니다.(한번 생긴 이상은 자연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만.)
4.2.
의사를 만나 해석의 가능성을 듣게 됨.
[최민순 역] 그 말에 나는 그렇다면 어찌하여 곧잘 들어맞는 소리들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기껏 하는 대답이 대자연 안에 두루 퍼져 있는 운수의 조화로 되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누가 문득 어느 시인의 시집을 뒤지게 될 때, 시인이야 딴 뜻을 두고 노래했더라도 이상하게 도 그 시가 읽는 이의 사연에 공명해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그다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 이것이 모두 당신께서 그를 시켜 그한테서 내가 배우게 하신 것이오니 훗날 내가 무엇을 알아내려 할 때 스스로 해야 할 것을 미리 내 기억 안에 드려두신 것입니다.
4.3.
절친한 친구 네브리디우스.
2. 우정과 슬픔 4.0.-9.0.
[최민순 역] 진정한 우정이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로마 5:5)으로 당신이 서로를 매어주셔야만 가능하기 때문이옵니다.
4.4.
Factus eram ipse mihi magna quaestio, et interrogabam animam meam, quare tristis esset, ...
[최민순 역] 난 나 스스로가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리하여 내 영혼에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슬픔은 무엇 때문이냐? ...
4.4.
보십시오, 제 마음이 그러했으며, 저의 하느님, 보십시오, 제 속이 그러했습니다.
4.6.11.
[최민순 역] 주여, 여기 속을 드러내 보이는 내 마음을 굽어보소서.
4.6.
인간을 인간답게 사랑하는 법은 죽음을 받아들이기.
[최민순 역] 아니 죽을 사람처럼 내가 사랑하던 그가 죽었건만...
4.6.
[최민순 역] 아, 사람을 사람답게 사랑할 줄 모르는 미치광이여, 덧없는 인간사에 안달하는 바보여! 그즈음의 내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4.7.
sciebam, sed nec volebam, nec valebam, eo magis, quia non mihi eras aliquid solidum et firmum, cum de te cogitabam. Non enim tu eras, sed vanum phantasma et error meus erat Deus meus. Si conabar eam ibi ponere, ut requiesceret, per inane labebatur , et iterum ruebat super me, et ego mihi remanseram iafelix locus, ubi nec esse possem, nec inde recedere. Quo enim cor meum fugeret a corde meo? quo a me ipso fugerem? quo me non sequerer?
[최민순 역] 당신을 두고 생각할수록 어쩐지 실속 없고 든든치 못한 것만 같았습니다. 그도 그럴 일이, 내 하느님이란 당신이 아니시고 거짓된 꼭두와 내 그릇됨이었던 것입니다. 적이나 시름을 덜 양으로 애써 그런 따위에 마음을 기대어 봐도 헛다리만 짚고 도로 내 위에 굴러떨어지고 마니, 나 자신이 있지도 떠나지도 못할 기구한 자리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피해 어디로 간답니까. 나 자신을 떠나서 내가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어디 가면 내가 나를 좇지 못한단 말입니까.
4.7.
[최민순 역] 시간이란 ... 날에 날을 이어 시간은 왔다 가면서 색다른 희망, 색다른 추억을 내게 심어주고, ...
4.8.
[최민순 역] ... 슬픔의 씨앗 ... 사실 그렇게도 쉽게 속속들이 저 슬픔이 내 맘에 사무치기는 죽을 사람을 안 죽을 것처럼 사랑함으로써 내 영혼을 모래 위에다 쏟아놓은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었더이까.
4.8.
[최민순 역] 그러기에 또 다른 벗들의 위로에 나는 다시금 이전처럼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들과 어울려 내가 좋아하던 것은 당신 대신에 엄청난 사설이요, 장황한 거짓말로써 귀를 간지럽히며 쑥스러이 긁어서 우리 정신을 부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이건만 내 친구 가운데 어느 누가 죽으면 죽었지, 이것만은 내게 있어 죽지를 않았습니다. ... 불씨와도 같이 마음을 녹여 여럿을 하나로 만들어 놓았나이다.
4.8.
사물의 한계modus는 생장쇠멸. 친구의 죽음으로 슬퍼함. (4.8) (9.12.33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에 대한 반응과 비교) 친구의 죽음으로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함. (4.9) 당시 자신의 감정에는 삶에 대한 권태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함. 친구를 사랑하면 스스로를 또 한 사람의 그로, 친구를 자기 영혼의 반쪽으로 여김. (6.11) 자기는 자신에게서 도망가지 못함. (7.12) 시간은 마음에다 기묘한 작업을 해놓는 무언가. 사랑은 다수에서 하나가 되는 것. (8.13) 사랑을 사랑으로 갚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낌. (9.14)
[최민순 역]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 안에서 벗을, 당신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이가 복되오니 그이만이 여읠 수 없는 그분 안에서 모든 이를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이를 하나도 아니 여의나이다.
4.9.
3. 부분과 전체 10.0.-12.0.
사물의 한도는 생장쇠멸. 전체가 나뉘어 소멸해야 부분이 되고, 부분은 소멸해야 전체를 구성. (10.15)
[최민순 역] 당신이 이리 마련하셨음은 그것들이 한꺼번에 다 존재할 수 없는 온갖 사물의 부분들이라, 없어지며 이어디며 저마다 한 부분으로서 전체 우주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오니이다.
4.10.
In iliis autem non est, ubi: quianon stant, fugiunt;
[최민순 역] 그러나 덧없는 그것들엔 '어디'가 아니 있으니 흘러가는 그것들을 누가 육체의 감각으로 쫓아가리까.
4.10.
Ecce illa discedunt, ut alia succedant, et omnibus suis partibus constet infima universitas.
[최민순 역] 보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뒤이어 딴것이 오고 이리하여 아래 세상은 이 모든 부분으로 이루어지는구나. ... 살로써 느끼는 것은 오직 부분일 따름. 너는 그 전부를 알지 못하느니라. 비록 그 부분들이 너에게 쾌락을 주기는 할지라도. ... 전체를 이루는 모든 부분이 한꺼번에 다 존재하지 않을 때도 이와 마찬가지이니 전체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각 부분보다는 전부를 아는 것이 더욱 즐거운 것이다.
4.11.
[최민순 역] 그러나 이런 따위보다 더 뛰어나신 분은 바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우리 하느님이시니 그의 뒤를 이을 자 없으므로 그는 가심이 없는 것이다.
4.11.
[최민순 역] 영혼들이 마음에 들거든 하느님 안에서 사랑할지니 그것들도 바뀌는 것, 그분 안에 뿌리내려야 변함없는 것, 그렇지 않으면 가고 또 없어지리라.
4.12.
신은 마음 가장 안쪽의 존재. (12.18)
4. 아름다움 13.0.-16.0.
알맞음(aptus), 부분이 자기의 전체와 갖는 어우러짐(pars ad universum suum)인 맵시(decus). 아름다움(pulchrum), 전체로 본 어울림(quasi totum)인 고움(species) (13.20)
로마 수사학자 히에리우스 만남. “인간 자체가 위대한 심연이다. (profundum est ipse homo)”. (14.22)
[최민순 역] 그런즉 기림을 받는 이가 사랑을 받음직스럽게 되기느 ㄴ기리는 이의 마음에 거짓이 없다고 믿어질 떄, 달리 말하면 사랑하면서 기려주는 때일 것입니다.
4.14.
[최민순 역] 사실 나 또한 광대들을 기리고 사랑하지마는 그런 따위의 기림과 사랑은 받고 싶지 않고, 차라리 그렇게 알려지기보다 숨어 있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사랑받기보다 미움 받는 것이 나은 줄로 아는 것입니다.
4.14.
[최민순 역] 그럼에도 나는 인간이면서 그 인간 안의 내가 되기 싫어하는 그것을 사랑하다니 인간이란 실로 그윽한 심연이로소이다.
4.14.
악의 원인은 부패. 한도 안의 절도, 한도를 넘은 파렴치. (15.25)
오류는 바깥으로, 오만은 아래로 끌어들임. (15.27)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읽음. (16.28)
5권.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가고 거기서 다시 밀라노로 향하다
로마-밀라노 교사기, 마니교와 암브로시우스. 유물론과 비유물론.
1. ㅇㅇ 1.1.-0.0.
악인은 신으로부터 멀어지고 불안해함 (1.1) 신의 지혜에는 수가 없음(innumerabilis = infinitus). 사물은 수로 헤아리고, 감각은 그러한 사물을 지각하며, 지성(ratio)은 수로 헤아리는 능력임. 수는 한정된 것, 분할되는 것. (3.5) 오만으로 인한 허영심은 알지 못하는 것과 거짓을 이야기하게 함. 겸손한 무지는 해가 되지 않지만, 오만은 무지한 것을 독선적으로 주장하게 함. 신인간(novus homo)은 로마사회에서 정치/학문적으로 무명에서 유명인이 되는 자를 의미.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성자의 지혜를 받아 형상화된 자(교육/성숙된 자)를 의미.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믿음(fides)과 권위(auctoritas)는 지식의 두 축임. (crede ut intellegas, intellege ut credas! 이해하려면 믿고, 믿으려면 이해하라!) (5.9)
2. ㅇㅇ 1.1.-0.0.
로마에서 병에 걸림. 신은 어디에나 현존하고 전체로 있음(ubique praesens et totus). (9.16) 마니교와 당시 그에 심취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존재가 물체 덩어리(moles corporum)라 여기고, 비연장적 존재를 부정함. (10.19) 악의 실체도 흉측한 덩어리라 여김. (10.20)
3. ㅇㅇ 1.1.-0.0.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를 만나고 성경을 문자적이 아니라 우의적(aenigma, allegoria)으로 이해하게 됨. (14.24) 카톨릭 예비신자가 되기로 함. (14.25)
6권. 나이 서른
진리와 비유.
1. ㅇㅇ 1.1.-0.0.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밀라노에 감. 모니카가 매일 기도하던 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카톨릭 예비신자가 됐으나 모니카는 크게 동요하지 않음. (1.1) 모니카가 아프리카의 습속을 따라 성자 묘소에 술을 가져갔는데 암브로시우스가 제지했고, 모니카는 그에 순종함. (2.2)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묵독(lectio tactia)을 보고 놀라워함.
2. ㅇㅇ 1.1.-0.0.
(3.3) 사람이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말이, 신의 형상이 인간의 형상으로 제한된다는 말은 아님. 신은 어디에나 전체로 있지만 어느 공간 속에도 존재하지 않음. (플로티누스 엔네아데스 3.9.4의 문장) (3.4) 문자 그대로로는 모순적이나 비유와 은유로 해석하면 진리가 드러남. 거짓을 믿지 않겠다는 마음에 판단중지(suspendium, ἐποχή)를 견지함. (4.6) 성경이 개연성 있게 해설되면 비밀(sacramentorum, μυστήριον)이 드러남.
3. ㅇㅇ 1.1.-0.0.
(5.8) 알리피우스, 네브리디우스와 친교를 나눔. (7.11) 호기심(curiositas)은 육신을 통해 허망하고 흥미로운 것을 경험하려는 마음. 쾌락에 빠진 인간은 흙덩어리. (12.22) 친구들과 함께 살기로 함. (14.24) 영혼불멸과 사후응보는 원자론과 반대됨. (16.26)
7권. 진리를 향한 상승의 길
플로티누스적 절정. 지성의 회심
1. ㅇㅇ 1.1.-0.0.
[부패] 신은 불후하고 불가침하고 불변(incommutabilitatis ← commutare)하는 존재. 부패(corruptus ← rumpen)하는 것은 부패 않는 것보다 못함. (1.1) 비연장적/비공간적 존재도 존재(有)다. 지성의 지향은 비연장적 존재. 유사한 것이 유사한 것에게 파악된다. (영혼의 불멸함에 대하여 10.17 참조) 신의 현존은 영감으로 피조물을 안팎으로 관리. (1.2) 인간은 기만당하고 기만하는 자(deceptus/deceptor, falsus/fallax). 어둠의 족속. 인간은 신에게 해를 입힐 수 없음. 신은 부패하지 않음. (2.3) 죄악(peccatum)의 원인은 의지(voluntas)의 자유의사(liberum arbitrium). 억지로 하는 일은 죄벌(poena peccati). (3.5) 신의 실체는 부패에 의해 결손되지 않음. (4.6) 왜 신은 부패하는 존재인 인간을 창조했을까? 하는 질문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진리를 발견 못한 아쉬움에서 하는 번민. (5.7)
2. ㅇㅇ 1.1.-0.0.
[악]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unde malum) (7.11) 신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humilitas)한 자에게 은총을 베풂. 신은 천성(haitu)으로 육화한 존재. (9.14)
에이로네이아. 오히려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오만, 교만의 반대인 겸손이 앎의 실천적 원인이 된다.
고상한 학문을 구둣굽 삼아 우쭐해하는 사람들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에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못 듣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생각으로 허망하여지고 그들의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지만 어리석은 자가 된 것입니다.
7.9.14.
아우구스티누스는 내면에서 깨달음. 위에 있는 빛이 아래에 있는 인간을 만듦. (10.16) 진리의 존재보다 자신의 존재가 더욱 의심하기 쉬움. 내가 속는다면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sum). 불변하게 존속(manere)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 (11.17)
그리고 당신 아래에 있는 그밖의 것들을 살펴보았는데 그것들은 아예 존재하는 것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님을 보았습니다.
7.11.17.
선한 것만 부패함. 최고선은 불후, 최악은 부패할 만한 실체가 없음. 악은 양태나 형상이나 질서의 부패. (12.18)
또 부패하는 것들은 선한 사물이기 때문에 부패한다는 사실이 제게 분명해졌습니다. 그것들이 최고선들이어도 부패할 수 없고, 선한 것이 아니어도 부패할 수 없을 것이니, 만약 최고선이라면 불후의 사물일 테고, 아무 선도 아니라면 그 안에 부패할 만한 무엇이 아예 없을 것입니다.
7.12.18.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존재하는 한 선하고, 어디서 유래하였는지를 제가 따져 온 저 악은 실체가 아니니 만일 실체라면 선일 것입니다.
7.12.18.
위에 있는 것들(superiora)이 아래 있는 것들(inferiora)보다 낫지만, 위에 있는 것들 홀로 존재하는 것보다는 모두 다 존재하는 편이 나음. (13.19) 선/악에 각각 실체가 있다는 태도는 안정적이지 못함. (14.20) 신 안에 있다는 것은 공간 안에 담겼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는 손으로 만유를 붙들었기(παντοκράτωρ, omnitenens(←tenere) ≠ omnipotens) 때문에 그러함. 사물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과도 조화를 이룸. (“우리가 시간이다(sumus tempora).” 설교집 80.8 참조) (15.21) 신과 닮을수록 높은 것과 어울림. 죄악은 의지의 전도이자 밖으로(foras ↔ intima) 부어오르는(tumescens) 의지임. (16.22)
3. ㅇㅇ 1.1.-0.0.
[오만] 사랑은 중력과도 같아서 신에게서 멀어져 습관(consuetuto)에 휩쓸리기도 함. (17.23) 추론하는 이성(ratio)은 표상(phatasia)이나 상상(phantasma)에 의존하므로 그러한 모순으로부터 사유를 분리시켜 오성(intellectus)을 사용해야 함. 존재하는 그것(물자체? ad id quod est)은 불변(불후)함. (17.23) 인간과 함께 가죽옷을 입어 말씀이 살이 된 성자는 신과 인간을 중개함. 불변하는 신과 가변적인 인간은 예수 안에서 한 위격(persona)이 됨. (18.24) 인간은 신을 향유해야(frui)함. (향유는 사물 그 자체를 목적으로 애착하기, 사용(uti)은 다른 목적을 위해 사물을 결부하는 것. 그리스도교 교양 1.4.4) 전문가(peritus)의 추정(praesumptio)은 오만하고, 겸손한 자의 고백(confessio)은 사유의 토대가 됨. (20.26) 내적 인간은 신을 꽉 붙잡아 지성의 법에 따라 살지만 지체의 법은 그와 싸움. (21.27)
왜 우월한 것만 존재하는 것보다 열등한 것과 함께 존재하는 편이 나을까?
8권. 유일하고 참된 하느님께 회심
의지의 회심.
1. ㅇㅇ 1.1.-0.0.
[분열] 당신에 관해 더욱 확실해지는 것(certior in te)보다 당신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는 것(stabilior in te)이 중요함. (1.1) 원소(stoicheia)는 허위와 기만의 원인. (2.3) 신플라톤주의자 빅토리누스의 다이몬숭배(daemonicolae). (2.4) 당시 신앙고백은 신경을 외우고(traditio symboli) 신자 대중 앞에서 암송(redditio symboli)하는 것이었음. (2.5) 정도(modus)는 화쟁(amor-odium, conciliatio-offensio)의 교차. (3.8) 악에 끌려가는 의지는 쇠사슬이 되어 스스로의 몸을 묶음. 거꾸로 뒤집힌 의지(voluntas perversa)가 육욕(libido)을, 육욕이 습관(consuetudo)을, 습관이 당위를 낳음. 신체에 묶인 옛 의지와 신을 섬기려는 새 의지가 영혼을 찢음(dissipare). (5.10) 육은 영을 거슬러, 영은 육을 거슬러 욕망함. (5.11) 폰타키아누스가 안토니우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외면하고 싶었음. 그러나 자기자신은 스스로에게서 도망칠 수 없음. (7.16) 아우구스티누스의 양심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발가벗겨진 것이며, 스스로를 꾸짖는 목소리. (8.18) 양심은 은총과 벌이는 내면의 말싸움. (8.19)
2. ㅇㅇ 1.1.-0.0.
[의지] 의지는 능력을 함축하지 않는다. ‘하고 싶다’는 ‘할 수 있다’와 같은 것이 아님. 하고 싶다는 것은 곧 한다는 것. 능력이 곧 의지임. (8.20) 의지의 전적인 명령은 인간에게 불가능함. 인간은 하고 싶은 마음과 하기 싫은 마음이 공존하기 때문. 하고 싶음과 하기 싫음이 공존하는 분열된 의지는 영혼의 질병임. (9.21) 교만은 인간이 신의 진리인 빛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게 만듦. 의지는 스스로의 것. 분열된 의지라도 모두 자신의 의지. 의지의 분열은 나와 나 자신의 싸움, 나의 나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함. (10.22) 단일한 영혼은 수많은 의지로 인해 고민함. (10.23) 의지의 수는 욕구하는 사물의 수에 따름. 의지는 선악을 불문하고 서로 겨룸. (10.24) 이제 곧 하자(modo fiat)고 결심해도, 인간은 거기 가 있지도(non ibi eram), 닿지도(non attigebam), 붙잡지도(nec tenebam) 못함. (존재-인식-의욕으로 묶인 인간의 삶 참고) (11.25)
3. ㅇㅇ 1.1.-0.0.
[회심] 이웃집에서(de vicina domo, 또는 신성한 집에서, de divina domo) “집어라, 읽어라!” 하는 말을 듣고 로마서 13장 13-14절을 묵독함. “술상과 만취에도 말고, 잠자리와 음탕에도 말고, 다툼과 시비에도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시오. 그리고 욕망에 빠져 육신을 돌보지 마시오.” (12.29) 알리피우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시오”라는 구절을 뒤이어 읽음. (12.30)
9권. 세례와 아프리카 귀환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
1. ㅇㅇ 1.1.-0.0.
부패는 인간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신이 하고 싶은 것을 인간이 하고 싶어지는 것이 구원. (nolle, quod volebam, et velle, quod volebas) (1.1) 아우구스티누스가 흉통을 앓음. (사도 바울이 흉통을 앓던 것과 비교) (2.4) 친구 베레쿤두스가 사망 직전 병중에 카톨릭 신자가 됨. (4권에서 친구의 죽음과 비교) (3.5) 친구 네브리디우스가 카톨릭 신자가 됨. (3.6) 라틴어 교만 typhus. 다윗의 시편 읽음. (4.8) 신은 내면의 빛. 영원한 내면이라 말함. 이 진리를 알지 못하던 스스로에게 화냄.
2. ㅇㅇ 1.1.-0.0.
(4.10)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고 지나간 생애에 대한 근심을 잊음. (6.14) 교육은 자기 자신을 이끌어내는 것(e-duco). 인식은 이성(ratio)으로 가르치고 권위(auctoritas)로 명령할 때 가능함. (8.17) 어머니 모니카는 스스로 술버릇에서 깨어남. (8.18) 지혜는 과거와 미래를 초월한 영원한 현재로서 언제나 존재함. (10.24)
3. ㅇㅇ 1.1.-0.0.
어머니 모니카는 아무데나 자기 시신을 묻되 어디서든 주님의 제단에서 자신을 기억해달라 당부함. (11.27) 어머니 모니카가 죽던 날은, 병석에 누운지 아흐레, 나이 쉰여섯, 아우구스티누스의 나이 서른셋 되던 해. (11.28)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죽음을 완전한 소멸로 여기는 때문. (12.29) 죽음은 인간 조건에 정해진 질서이므로 고통스러워할 이유가 없으나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러워 두 배로 고통스럽게 됨. (12.31) 어머니 모니카가 죽었으나 길게 통곡하지 않음. (12.33) (4.4.8 친구의 죽음에 대한 반응과 비교)
10권. 하느님을 찾고 인식하여
신을 알고 나를 알기
1. ㅇㅇ 1.1.-0.0.
[안과 밖] 신 앞에서 인간은 양심의 심연까지도 벌거벗음. 신은 숨길 수 없는 존재. 모든 것을 아는 존재. 신을 알면 나를 알게 됨. (2.2) 인간은 타인의 속을 알지 못함. 스스로에 대한 고백은 자기자신이 아니고서는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분별할 수 없음. (3.3) 타인의 속은 감각과 지성이 뻗칠(intendere) 수 없는 곳.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알리는 것도 사랑이고, 타인을 믿어주는 것도 사랑임. (3.4) 고백의 목적은 타인이 신의 가르침을 고백자의 속에서 발견하도록 돕는 것. (4.5) 타인에게 고백함으로써 이웃사랑을 실천함. (4.6) 심연은 인간 스스로도 자신의 속을 알지 못하는 것이지만, 신은 인간을 창조했으므로 모든 것을 앎. (5.7)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면의 감각으로 사랑한다는 것. (6.8) 스스로 존재물음을 제기할 때 인간은 인간 내면(homo interior, 넋)과 인간 외면(homo exterior, 몸)으로 나뉘는데, 신을 찾는 것은 안의 인간임. (6.9) 판단을 내리는 이성(iudex ratio)은 존재물음을 제기할 능력임. 사물은 덩어리일 뿐임(moles). (6.10)
2. ㅇㅇ 1.1.-0.0.
[기억] 기억의 궁전, 무수한 표상(imagines)들의 보물창고 (8.12) 사유는 어지러진 기억의 조각들을 긁어모아 한데 뭉치는 작업. cogere와 cogitare의 관계는 agere와 agitare, facere와 facitare의 관계와 같음. (11.18) 영혼의 정감(affectiones animi)을 보존하는 기억은 그 자체가 영혼임. (14.21) 언급하기 위해서는 기억에서 대상을 끄집어내 종과 유에 따라 분리(dividere)해야 함. (14.22) 이름 부르기는 감관에 사물이 없어도 기억에 표상을 현전하게 함. (15.23) 기억은 사물의 표상을 포착해 사물이 부재할 때에도 표상이 현재하는 것처럼 직관함. (16.25)
3. ㅇㅇ 1.1.-0.0.
[행복] 신을 찾으면 행복한 삶(beata vita)을 찾게 됨. (20.29) 행복은 감각이 아니라 즐거울 때 마음에서 경험한 바임. (21.30) 인간은 속기 싫어하지만 기만하고 싶어하는 존재임. (23.34) 신이 위치한 곳은 기억 속임. (25.36)
[절제] 신에게서 소외되어 밖으로 흩어나간 다수가 절제(continentia)를 통해 일자로 모임. (29.40) 첫 욕망은 동침(concubitus) 즉 색욕임. (30.41) 둘째 욕망은 식욕임. (31.43) 셋째 욕망은 후각임. (32.48) 넷째 욕망은 청각임. (33.49) 다섯째 욕망은 시각임. 쾌감은 아름다운 것에 대해 발생하나 호기심(curiositas)은 불쾌한 것까지도 경험하고자 하는 욕심(libido)임. 단순히 알기 위한 욕심은 쓸모 없지만 대자연을 탐구하는 원동력이기도 함. (35.55) 세속의 야심(ambitio saeculi)은 신이 아니라 인간 사이에서 받는 칭송(laus)을 의미함. 칭송보다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추구하더라도 이웃의 유익함(utilitas proximi)을 위해야 함. (36.59) 생명과 죽음의 원인을 정의와 죄악으로 둠.(43.68)
11권.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태초에 관한 주석
태초란 무엇인가, 시간과 영원
1. 천지창조 이전의 신 1.1.-10.12.
ratio, prudentia, sapientia, intellegentia,
[태초] 입을 막아 말을 못하게 한다는 표현을 할례하다(circumcide)로 표현함(2.3) 태초에(in principio) 신이 하늘과 땅을 만든 사건을 해명하는 것이 이 부분의 목적.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 즉 진리를 배우는 것은 언어를 통한 외적 작용이 아니라 사유로 인한 내면의 작용. 인간은 언어로 말하지만 신은 언어 없이 진리가 스스로 말함(=순수 오성(purus intellectus)) (3.5) 만물의 변화는 불변하는 신의 창조를 전제함. (4.6) 신은 말씀(Verbo)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함. (5.7) 인간의 언어는 시간의 분절을 전제하나 영원한 신의 말씀은 그렇지 않음. (6.8)
무엇이든 존재하였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 존재하지 않았다가 존재한다면, 죽고 생기고 하는 것임을 저희가 압니다. 따라서 당신 말씀에서는 그 무엇도 그치거나 교체되거나 하는 일이 없으니 참으로 불멸하고 영원하신 까닭입니다.
11.7.9.
신의 말씀은 지혜이고, 지혜가 곧 태초이며, 지혜는 내면의 어둠을 걷음. (9.11)
Sapientia, sapientia ipsa est, quae interlucet mihi, discindens nubilum meum, quod me rursus cooperit, deficientem ab ea, caligne atque aggere poenarum mearum;
지혜, 바로 지혜입니다. 그가 저를 들이비추고, 제가 지혜로부터 멀어지자마자 저를 다시 뒤덮는 저의 먹구름을 제게서 거둬버리는 것도 저 지혜입니다.
11.9.11.
Ad ipsam ergo Dei substantiam pertipnet voluntas eius.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란 그의 본체에 속하는 것이다.
11.10.12.
2. 시간 문제 11.13.-21.27.
[시간] 시간(tempo)은 순간의 집합이며, 영원(aeternitas)은 변화 없이 전체로서 현전함(totum esse praesens). (11.13)
Quis tenebit illud, ...
et videat longum tempus, nisi ex multis praetereuntibus motibus, qui simul extendi non possunt, longum non fieri;
non autem praeterire quidquam in aeterno, sed totum esse praesens;
nullum vero tempus totum esse praesens;
et videat mone praeteritum propelli ex futuro,
et omne futurum ex praeterito consequi,
et omne praeteritum ac futurum ab eo, quod semper est praesens, creari et excurrere?
(성염 역) 기나긴 시간이란 동시에 펼쳐질 수 없는 수많은 순간들에 의해서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아듣게 하겠습니까?
영원에서는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고 전체로서 현전합니다.
어느 시간도 전체로서 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과거는 미래에 의해서 밀려나고
모든 미래는 과거에 의해서 뒤쫓기며,
모든 과거와 미래는 항상 현재하는 것에 의해서 조성되고 전개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보게 하겠습니까?
(최민순 역) 그리고 시간이 길다 함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많은 운동의 흐름이 길다 함이지,
영원에 있어선 흘러가는 아무것도 없이 모두가 현재임을 알 것입니다.
따라서 시간이란 순수 현재일 수 없고,
과거란 미래에서 밀려나는 것,
미래란 과거에 뒤따르는 것이며,
모든 과거와 미래란 늘 현재인 그분한테서 만들어져 흐르는 것이 아니겠나이까?
11.11.13.
신은 전능자(omnipotens), 창조자(omnicreans), 보전자(omnitenens). (13.15)
Hodiernus tuus aeternitas;
(최민순 역)님의 오늘은 곧 영원!
(성염 역)당신의 오늘은 곧 영원입니다.
11.13.16.
신의 오늘은 내일에 밀려나지 않고 어제를 뒤잇지 않는 영원. (13.16)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음” 현재가 과거로 옮겨가면 시간, 그렇지 않고 현재로 남으면 시간이 아니라 영원. (14.17)
현재가 늘 현재로 있다면 과거로 지나갈 리 없으니, 따라서 시간은 없고 여우언만이 있게 될 것입니다.
11.14.17.
시간의 지속(duratio)은 기억과 언어의 결합. (15.18) 시간의 원자론
만일 시간을 찰나의 찰나로 쪼갤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만을 현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이것마저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움직임이 너무나 빨라서 순간도 쉬는 틈이 없는 것이다. 쉬는 틈이 있어야 과거와 미래로 나뉠 수 있는데 현재란 사실 아무런 틈이 없는 것이다.
11.15.
시간 중 여하한 부분으로도 쪼개질 수 없는(nullus partes divide possit) 것은 순간. (15.20) 언어로 나타나는 과거는 현재 기억된 과거의 표상. 미래는 현재 행위된 계획으로 존재. (18.23)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 (20.26) 시간의 측정은 시간의 부분 즉 간격(intervalla)으로 가능. (21.27)
3. 정신의 확장으로서 시간 22.28.-31.41.
시간은 어떤 확장(distentio)임. (24.31) 시간의 확장은 영혼 자체의 확장(tempus est distentio animi). (26.33) 시간이 어떤 간격으로 늘어남(tendebatur)을 영혼이 감지. (27.34) 시간 측정의 대상은 기억에 각인된 소리. (27.35) “내가 말하거니와 너 안에서 내가 시간을 잰다.” 현전하는 인상을 측정(metiore affectionem praesentem). 인상은 정동. “현재하는 지향이 미래를 과거로 끌어당긴다.” 주시(attentio)는 지속(perdurat). (27.36) 인간의 생명은 확장. (29.39)
12권. 하느님이 만드셨다는 하늘과 땅에 관한 주석
하늘과 땅이란 무엇인가, 형상(forma)과 질료(materia)
1. ㅇㅇ 1.1.-0.0.
[시초] 하늘의 하늘은 형상 그 자체 (2.2) 땅은 인간의 바탕이나 아무 형상이 없는 어두운 심연, 형태 없는 질료, 무의 극한으로서 무형 (3.3) 질료의 무형성은 변화의 조건, 변화는 가변적 사물이 형상을 수용하는 것 (6.6) 닮음(similitudo)과 거리, 안 닮을수록(dissimilitudo) 멀어진다. 질료는 무로부터 창조됨. 신의 지혜가 태초에 창조. 하늘은 크게, 땅은 작게. (7.7) 거의 무에 해당하는 무형성으로 인해 “가변적 세계는 지속하면서도 지속하지 않음”. (8.8) 사물의 변화가 시간을 구성하므로. 무형의 공간에서는 변화도 시간도 없으므로 순서도 질서도 없음. (9.9) 자연본성(natura)과 실체(substantia)는 변화하는 시간적 존재. 영원에서 시간으로 기우는 의지는 범죄요 죄악임. (11.11) 순수 지성(mens pura)은 하늘의 하늘, 질료 없는 형상, 신의 영원성을 향한 극한. (11.12) 순수 지성도, 태초의 땅도 시간의 변화를 겪지 않음. 시간은 일정한 질료에 대한 형상의 교체이기 때문. (11.14) 하늘의 하늘
2. ㅇㅇ 1.1.-0.0.
[해석] 같은 텍스트를 보더라도 두 가지 이견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사실의 진리(veritas rerum)에 관한 이견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의 의도(voluntas auctoris)에 관한 이견. 허위는 아무도 알 수 없음(nosse falsum nemo potest). (23.32) 아무도 저자의 의도를 알 수는 없음. (24.33) 저자의 의도를 안다는 주장, 타인의 해석은 틀렸다는 주장은 짜증남. 진리는 무모순적. 오만한 자는 진리가 아니라 자기 생각을 좋아하는 것. 진리는 공연한 것(공유물, res publica)이나 거짓말(mendacium)은 사사로운 것(사유물, res privata)임. (25.34) 변의 진리는 명백하나 타인의 생각은 그렇지 않음. 타인의 주장은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임. 텍스트의 무한한 해석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타인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전하는 것은 이웃사랑임. (25.35) 이웃사랑은 이해력 없는 사람에게도 진리를 알려주는 것. (26.36)
3. ㅇㅇ 1.1.-0.0.
[우선] 신은 무로부터 무형의 비유사성을 먼저 창조한 뒤 자신의 형상에 따라 유사성을 통해 형상화하도록 만듦. (28.38) 그러므로 말씀 즉 지혜가 곧 태초이임. (28.39) 무엇이 우선한다는 말은 영원, 시간, 선택, 시원에 따라 각각 다른데, 시원은 소리와 노래 사이의 관계에서 노래가 우선하는 것과 같음. 소리는 노래가 되기 위해 형상화함. (29.40) 어떤 독자도 저자가 저작 당시에 인지했던 바(의도?)를 알 수 없음. 단지 인간은 지성으로 진리를 알고 저자가 믿을 만한 인물임을 알기 때문에 저작의 내용을 믿는 것임. (30.41) 모든 독자가 텍스트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음. 텍스트의 미덕은 모두가 모종의 진리를 포착하도록 돕는 것임. (31.42) 이 글 역시 창세기의 짧은 글에 대한 다양한 해석임. (32.43)
13권. 유비적으로 성찰한 세계의 피조물
1. ㅇㅇ 1.1.-0.0.
[형상화] 정도(modus)에서 멀어지는 과도함(immoderatio)은 신에게서 멀어지는 비유사성(dissimilitudo). (2.2) 형상(forma) 없는 질료는 신의 지성으로 창조(creatio)되지 않는 경우, 즉 형상화(formatio)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어둡게 출렁이는 심연임. (2.3) 형상을 입는 것은 단지 존재하는 것을 너머 지혜와 행복을 향해 변화하는 것. (3.4) “성령이 물 위에 감돌다(super-ferebatur(← ferre) super aquas, 창세기 1:2)”는 문구와 “당신의 영이 그것들 안에서 쉰다(cumque requievisset in eis spiritus, 민수기 11:25)”를 해석함. 성령은 완전한 의지. 성령이 물 위를 감돈 것과 피조물 안에서 쉰 것은 스스로 자체에 만족한 것. (4.5) 성부는 존재를 창조한 자, 성자는 성부 안에서 피조물을 만들어 태초를 가능케 한 자. (5.6) 사물을 먼저 일러야 성령을 이해할 수 있음.
2. ㅇㅇ 1.1.-0.0.
[사랑] (6.7) 욕정(cupiditas)은 인간을 심연으로 담기고, 성령을 통한 사랑(caritas)은 인간을 신으로 고양함. (7.8) 천사와 인간의 타락을 ‘미끄러져 떨어짐’이라 표현함. 가변적인 것들은 영원한 것 안에서 안식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함. 타락은 빛의 옷(의상)이 벗겨진 것, 불안한 것으로 표현함. (8.9) 신을 향유하는(누리는) 것을 안식으로 표현. 선한 의지와 평화를 연결. 질서는 평온의 원인, 무질서는 불안의 원인. “중심은 사랑”이라는 표현을 통해 인간을 추동하는 것이 사랑임을 설명. (8.10)
[삼위일체] “존재하다, 인식하다, 의욕하다” 이 셋이 곧 불가분한 생명, 지성(sapientia), 존재자(essentia)임. 성부-존재esse, 성자-인식nosse, 성령-의욕volle. 신은 무한하나 삼위일체는 무한한 서로를 한정함. (11.12)
3. ㅇㅇ 1.1.-0.0.
[형상화] 신의 가르침을 처음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뿐, 아직 형상을 받아들인 것은 아님. (12.13) 인간의 영혼은 신을 믿으면서도 형상화되지 않아 심연으로 미끄러짐. 인간 인식의 불확실성. (14.15) 권위의 궁창(firmamentum)은 사멸하는 인간에게 허락된 말씀을 통한 생명을 의미. 아담과 하와에게 입힌 가죽옷(창세기 3:21)은 사멸의 상징이었으나 하늘을 가죽으로 펼쳐(육화된 말씀 즉 성경을 의미, 시편 103:2) 빛의 옷을 입혀 생명을 주었다는 해석. 옷이라는 소재로 형상화를 표현. (15.16) 성경도 육화된 말씀이니 망각되겠지만 영원한 본질은 변함없음. (15.18) 영혼의 갈증은 생명의 샘인 영원한 말씀을 갈구하는 마음. (16.19) 바닷물은 지상의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 분열된 의지들로 근심걱정을 일삼음. 물이 바다로 모이듯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 바다가 닿지 않은 땅이 생기듯 말씀을 원하는 사람들도 남음. (17.20) 진리는 땅에서 하늘을, 정의는 하늘에서 땅을 보는 것. (시편 85:12) 빛물체(luminaria)는 신의 말씀을 입은 존재자들. 형상화된 피조물. 빛물체는 낮과 밤, 가지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땅에 몰두하는 영혼과 하늘에 몰두하는 영혼을 나누어 보게 함. (18.22) 말씀은 해처럼 모든 것을 비추고, 빛물체는 별처럼 각각의 분별력을 얻으며, 비사(sacramenta ← μυστήριον)는 달처럼 시대에 따라 달라짐. (18.23) 비사는 믿는 자들의 행위로 나타남. (20.26) 하늘의 것에 대한 지식은 단일하고 영원하지만, 땅의 것에 대한 지식은 다양하고 성장-번식함. (20.27) 깨달은 자는 말씀을 전하는 자. (21.29) 신의 관리인은 심연의 소용돌이, 즉 세속의 욕구로부터 멀어져야 함. (21.30) 말씀을 따르고 속세에 대한 사랑을 억제하는 경우 신의 형상과 비슷한 살아있는 혼으로 재형성(reformatio)됨. (22.32)
4. ㅇㅇ 1.1.-0.0.
[판단력] 지성의 오성(intellectus)으로 만물을 판단함으로써 모든 것에 권한을 가짐. 하지만 말씀은 무한한 권위를 가지므로 인간은 그에 판단할 수 없고 단지 실행만 할 뿐임. 인간에 대한 판단도 불가능함. 영적 인간과 육적 인간은 태초부터 예정되어 있으나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음. (23.33) 인간의 판단력은 신의 말씀, 빛물체, 하늘이나 낮과 밤, 바다에 대해서는 권한이 없지만,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날짐승, 가축, 온 땅과 땅 위를 기는 모든 길짐승에 대해서는 권한을 받음. 언어의 표지와 음성에 대해서도 인간은 판단할 수 있음. 영적 인간은 옳은 것을 승인하고 그른 것을 부인함. 그렇게 하면서 바로잡아 나감. (23.34) 신은 인간을 축복하여 번성하고 땅을 가득 채우라 함.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일하지만 다양한 비사(행위?)와 언어로 표현됨. (24.36) 대자연(natura rerum)은 씨앗에서 태어나는 모든 것을 의미함. 단일한 말씀에서 나타나는 모든 인간적 다양성이 곧 대자연. 인간적 태아(fetus = conceptus, 임신 혹은 개념)들이 땅에 번성하도록 하는 것은 이성(intellectus)임. (24.37) 자기 배를 채워 즐거움을 얻지 말고 신을 자기 배로 삼아야 함. (공과 사? publicus et privaticus?) (26.39) 개개 지체들(omne=부분들 전체, totum=부분없음)의 질서정연한 집합이 곧 총체(universum)임. (28.43) 언어는 시간적이나 말씀은 영원함. (29.44) 성령을 통해 보면 모든 사물이 좋게 보임. (31.46)
5. ㅇㅇ 1.1.-0.0.
[성화] 이성(ratio)과 오성(intellectus)은 신과의 유사함(similitudo), 즉 신의 모습(imago)임. (32.47) 시간은 만물에 시작과 끝, 발생과 소멸, 완성과 결손, 형상과 결핍을 부여함. (33.48) 지상의 물질적 세계는 천상의 영원한 세계를 가리키는 표상(figuratio)임. 신은 말씀으로 질료를 창조(sacramenta produxisti)하고, 영혼을 형성(animam vivam formasti)했으며, 인간에 지성을 주어 쇄신(renovasti ad imaginem tuam)함. (34.49)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신이 보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은 그것이 존재하므로 밖으로 보고 그것이 좋으므로 안으로 봄. 인간은 신처럼 되어(성화, sanctificatio) 신 안에서 안식을 누릴 것임. (38.53)
인간은 평등하다는 생각이 판단력에서 나오는 것인가?
같이 하면 좋을 생각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 무한정자로서 영원
흄의 시간, 칸트의 시간
뉴턴의 시간, 아인슈타인의 시간
주요 인용
안과 밖, 심연과 현상
"옹알이와 갖가지 소리로, 갖가지 동작으로 사지를 버둥대며 제 마음의 느낌을 나타내 보고 싶었고 그래서 제 의사에 사람들을 복종시키고 싶었는데 마음먹은 바를 다 표현할 힘도 없었고 마음먹은 사람 다에게 표현할 힘도 없었습니다." (Ⅰ 8.13)
"그런데 당신께서는 제 가장 내밀한 데보다 더 내밀하게 계셨고(eras interior intimo meo) 제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데보다 더 높이 계셨습니다." (Ⅲ 6.11)
“당신 심판의 심연은 얼마나 알아낼 길 없습니까?” (Ⅳ 4.8)
“제 자신이 제게 커다란 수수께끼가 되었습니다(ipse mihi magna quaestio)” (Ⅳ 4.9)
“제가 저에게 불행한 터전이 되어버렸으니, 저는 그 터전에 있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저의 마음이 저의 마음을 피해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제 자신을 피해 제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디인들 제가 저를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Ⅳ 7.12)
“그러니 보라, 그분이 어디 계시고 어디서 진리가 빛을 내는가! 마음 가장 안쪽에(intimus cordis) 계시는 분인데 우리 마음은 그분한테서 떠나 헤맸다.” (Ⅳ 12.18)
“인간 자체가 위대한 심연이다(grande profundum est ipse homo).” (Ⅳ 14.22)
“인간에게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이가 있다. 그 심연이 자리 잡은 본인조차도 알지 못하는 깊이다.” Enarrationes in Psalmos 41,13)
“주님, 당신의 눈에는 인간 양심의 심연(abyssus humanae conscientiae)까지도 벌거벗는데, 제가 당신께 고백하고 싶지 않다 한들 제 안에 있는 무엇이 당신께 숨겨지겠습니까?” (Ⅹ 10.22.2)
“주님, 제가 바로 여기서 고생을 하는 중입니다. 제 자신을 두고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저 자신에게 고통의 땅, 지나치게 땀을 흘리는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 저, 기억을 하는 영혼인 저입니다. 저 아닌 것이 저한테서 멀리 있다면야 그다지 놀랍지 않습니다. 저보다 저한테 가까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제 기억의 위력이 저에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기억을 빼놓으면 제가 저를 이름하지도 못하는 터에 말입니다.” (10.16.25)
“바닥 모르고 한정이 없는 그 다면성! 바로 이것이 영혼이고 바로 이것이 저 자신입니다. 그러면 저의 하느님, 저란 대체 무엇입니까?” (10.17.26)
“당신의 눈으로 보시기에도 제가 저에게 의문점이 되고 말았으니 제 자신이 곧 제 번뇌입니다.” (10.33.50)
“제 선익은 더 이상 밖에 있지 않았고 저 태양에서 육안으로 찾는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9.4.10)
경계
“아름다운 것들도 생성하고 소멸하느니, 생성하면서는 마치 존재하기를 시작함과 같고, 완성에 이르려고 성장하며, 완성에 이르면 노쇠하여 소멸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꼭 노쇠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이 결국 소멸합니다. 그러므로 생성하여 존재를 지향할 적에, 존재하려고 그만큼 빨리 성장할수록 비존재를 향해서도 그만큼 서둘러 갑니다. 이것이 사물의 한도(限度, modus)입니다. 당신께서 사물들에게 그런 한도를 주신 까닭은, 저것들이 사물들의 부분이고 무릇 모든 부분들이 동시에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멸하고 계승하면서 모든 부분들이 전체로서 작용하고 전체의 부분들이 됩니다.” (Ⅳ 10.15)
“기나긴 시간이란 동시에 펼쳐질 수 없는 수 없는 수많은 순간들에 의해서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아듣게 하겠습니까? 영원에서는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고 전체로서 현전합니다. 어느 시간도 전체로서 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과거는 미래에 의해서 밀려나고 모든 미래는 과거에 의해서 뒤쫓기며, 모든 과거와 미래는 항상 현재하는 것에 의해서 조성되고 전개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보게 하겠습니까?” (11.11.13)
“현재가 시간으로 존재하려면 과거로 옮겨가야 하고, 과거로 옮겨감으로써 시간이 됩니다.” (11.14.17)
조각조각 찢기다 = discissus (11.30.40)
사랑
“그가 죽었는데도 ‘또 한 사람의 그’였던 저는 살아있다는 것이 더 이상했습니다. 누군가 자기 친구를 가리켜 ‘자기 영혼의 반쪽’이라고 한 말은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Ⅳ 6.11)
정욕(cupiditas), 색정(libido), 애정(dilectio), 애덕(caritas). (13.7.8 주석 56)
기억
의지
의지가 두 개로 분열된다. (
하고 싶다는 것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ubi hoc non erat velle quod posse). “적어도 여기서는 할 수 있는 능력이 곧 하고 싶은 의지였고, 하고 싶다는 것은 곧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8.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