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첫 문장은 이렇다.
πᾶσα τέχνη καὶ πᾶσα μέθοδος, ὁμοίως δὲ πρᾶξίς τε καὶ προαίρεσις, ἀγαθοῦ τινὸς ἐφίεσθαι δοκεῖ. 모든 기예와 모든 방법, 행위나 선택 같은 것들은, 어떤 좋은 것에 향한 것으로 보인다. (1094a1)
그러므로 이 책의 목표는, [1] 좋은 것이 무엇인지, [2] 우리가 어떻게 좋은 것을 제작/탐구/행위/선택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제작/탐구/행위/선택은 인간의 활동(ἐνέργεια)이다. 활동은 능력(δύναμις)을 실제로 발휘하는 것을 의미한다.
1. 가장 좋은 것은 행복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πρᾶξις)는 목적(τέλος)을 위해 수행된다. 행위들 중, 활동 자체(ἐνέργεια)가 목적인 것과 그 성과물(ἔργον)이 목적인 것으로 나뉜다. 행위의 원인(αἰτία)은 인간의 능력(δύναμις)이다. [Ⅰⅰ]
모든 목적은 또 다른 목적을 위한 목적이 되는데, 다른 모든 것의 목적이며 동시에 그 스스로 더 이상 다른 목적을 위해 수행되지 않는 목적은 그 자체로 총기획적인(설계자의, ἀρχιτέκτων) 목적이다. 그것을 바로, 가장 좋은 것(ἀριστόν)이라 한다. 가장 좋은 것을 탐구하는 학문은 정치학(ἡ πολιτική, 영어로는 the political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Ⅰⅱ]
행복은 자족적인 것(τῆς αὐταρκείας)이다. 여기서 자족적이라는 말은 스스로(αὐτόν) 돕는다(ἄρκειν), 즉 다른 어떤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다른 무언가를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행복과 자족은 같은 현상이다. 자족적인 삶은 강제된(βίαιος) 삶이 아닌 삶, 즉 삶의 필연성(ἀνάγκη)에 빠지지 않은 삶을 의미한다. 물론 그것은 활동에 따른 삶(βίος κατ᾽ ἐνέργεια θετέον)이다. [Ⅰⅵ]
그러므로 행복은 가장 안정된 것이다. 안정성(βεβαιότης)은 오랜 시간 동안 이리저리 바뀌지 않으며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운(τύχη)은 우연에 따라 인생에 즐거움이나 고통을 선사한다. 물론 계속해서 불운에 빠진 사람을 행복하다고 일컫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불운에도 고결하고 담대하게 견뎌낸다면 고귀하다(καλόν)는 칭송을 듣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으로 좋고 분별 있는 사람은 모든 운들을 품위 있게 견뎌낼 것”이라 말한다. 주어진 병력으로 싸움을 훌륭하게 싸우는 장군이나, 주어진 가죽으로 훌륭한 신발을 만드는 제화공이 대표적이다. 행운만 계속되는 건 인간인 한에서 불가능하다. 인간은 행운과 불운에 흔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Ⅰⅹ]
2. 행복을 위한 방법
행복을 위해서는 [3] 잘 삶(εὖ ζῆν)과 [4] 잘 함(εὖ πράττειν)이 필요하다. 다음 인용문을 읽어보자.
ὀνόματι μὲν οὖν σχεδὸν ὑπὸ τῶν πλείστων ὁμολογεῖται: τὴν γὰρ εὐδαιμονίαν καὶ οἱ πολλοὶ καὶ οἱ χαρίεντες λέγουσιν, τὸ δ᾽ εὖ ζῆν καὶ τὸ εὖ πράττειν ταὐτὸν ὑπολαμβάνουσι τῷ εὐδαιμονεῖν. 그러므로, 그 이름은 수많은 이들이 동의한 데 가깝다: 많은 사람들, 교양있는 이들이 말하는 행복은, 잘 삶과 잘 함으로 얻어지는 것으로서, 그로 인해 행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1095a17)
행복한 삶에 대한 현상은 세 가지 모습으로 드러난다. 짐승 같은 즐거움(ἡδονή)을 추구하는 향락적 삶(βίος ἡδύς), 명예(τιμή)를 추구하는 정치적 삶(βίος πολιτικὸς), 인간적인 즐거움(ἡδονή)을 추구하는 관조적 삶(βίος θεωρητικός)이 그것이다. 여기서, 향락적 삶과 관조적 삶의 즐거움이 가진 차이는 10권에서 설명된다. 핵심은 여유(σχολή)다. 삶의 필연성에 종속된 삶은 마치 짐승처럼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Ⅰⅴ]
오해하지 말 것.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의 좋음은 언제나 “인간의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거나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πρακτὸν οὐδὲ κτητὸν ἀνθρώπῳ)”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인간의 행위와 별개인 어떤 보편자로서 ‘가장 좋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스승 플라톤을 비판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독자 노선을 선언한다. 좋음의 이데아를 일종의 본(παράδειγμα)으로 가진다 해도 실제 행위와는 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Ⅰⅵ]
δόξειε δ᾽ ἂν ἴσως βέλτιον εἶναι καὶ δεῖν ἐπὶ σωτηρίᾳ γε τῆς ἀληθείας καὶ τὰ οἰκεῖα ἀναιρεῖν, ἄλλως τε καὶ φιλοσόφους ὄντας: ἀμφοῖν γὰρ ὄντοιν φίλοιν ὅσιον προτιμᾶν τὴν ἀλήθειαν. 그러나 적어도 진리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더구나 철학자로서는, 친숙한 이들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도 생각할 것이다. 친구들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 진리를 더 선호하는 것이 경건하기 때문이다.(1096a15)
3. 잘 삶이란 무엇인가?
잘 삶은 좋은 품성상태(ἕξις), 즉 탁월성(ἀρετή)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소유한 탁월성을 실제 활동으로 옮기기 위한 외적인 좋음도 필요하다. 부(πλοῦτος), 좋은 친구, 좋은 태생, 훌륭한 자식, 준수한 용모(οἶον καλλους)가 그 예다. [Ⅰⅷ] 일생을 온전하게 사는 삶도 중요하다. 무작정 오래 사는 장수가 아니라, 소유한 탁월성을 실천하기에 적당한 삶이다. [Ⅰⅸ]
잘 사는 사람은 좋은 습관을 통해 훌륭하게 자란 사람을 의미한다. 제일원리를 이미 갖고 있거나 쉽게 취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Ⅰⅳ]
잘 사는 자에게는 명예가 주어진다. 잘 사는 자는 탁월성을 갖는데, 탁월성은 명예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없다면 누구도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수 없다. 그러나 아무 타인이나 명예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실천적 지혜(φρόνησις)를 가진 사람만 잘 사는 자에게 명예를 줄 수 있다. 명예는 그에게 잘 살고 있다는 믿음(πίστις)을 준다. 명예는 교양있는 사람과 실천적인 사람이 추구하는 정치적 삶의 목적이다. [Ⅰⅴ]
평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이다.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좋은 성품(ἕξις)을 갖추어야 한다. 성품은 어떤 행동을 꾸준히 하는 습관(ἔθος)에서 비롯된다. 습관이 성격(ἦθος)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4. 잘 함이란 무엇인가?
잘 함은 좋은 활동, 즉 소유한 탁월성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잠자거나 아무 활동도 하지 않거나 죽은 사람은 활동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관조하는 자의 활동은 논쟁거리가 된다) [Ⅰⅷ] 죽은 사람은 활동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논의에서 제외하는 게 적절하다. [Ⅰⅺ]
탁월한 행위에는 칭찬과 명예가 주어진다. 어떤 이의 행위나 성과가 좋고 신실한 것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Ⅰⅻ] 다시 말해, 타인의 평가가 없다면 어떤 행위도 탁월성을 얻을 수 없다. 칭찬받고 명예를 얻는 행위가 곧 탁월한 행위다. 그러나 그 평가도 결국에는 탁월한 인간으로부터 나타나야 믿을 만하다. 판단력이 흐려 탁월하지 않은 자의 칭찬은 탁월하지 않은 행위에도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탁월한 자에게 탁월한 동료가 필요한 이유다.
행복에 관계된 탁월성은 단지 육체적 탁월성이 아니라 “완전한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어떤 활동”이다. 여기서부터 영혼의 탁월성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다. 영혼은 식물적인 부분(τό φυτικόν), 욕구적인 부분(τό θυμητικόν), 이성(언어)을 가진 부분(τό λόγον ἐχον)으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인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가지 정의가 공명한다. 『정치학』에서 밝히듯이, 인간은 본성상 폴리스적 동물이며, 이성(언어)를 가진 동물이다. 욕구적인 부분은 절제와 용기라는 탁월성에 관련된다. 자제력 있는 사람(ἐγκρατής)과 자제력 없는 사람(ἀκρατής)을 구분하는 기준은 영혼의 이 부분에서 비롯된다. 이성을 가진 부분은 지혜(σοφίᾱ)나 이해력(σύνεσις), 실천적 지혜라는 탁월성에 관련된다. [Ⅰxiii]
나는 여기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해본다. 도덕적 강제력을 감각하는 영역이 바로 의지, 즉 욕구와 관련된 부분이라는 점이다. “아버지의 말을 듣듯이 이성을 듣고 따른다”(1103a3)는 표현은 결정적이다. 감정은 직접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성의 명령에 복종한다. 반면, 이성은 스스로 묻고 답하며 새로운 영역을 확장한다.
5. 행복한 삶은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이렇다. 윤리학은 행복한 삶을 위한 학문이다. 행복한 삶은 잘 삶과 잘 함에서 비롯된다. 잘 삶도, 잘 함도 탁월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윤리학은 탁월성에 관한 학문이다. [Ⅰxiii]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은 정치학이다. 윤리학은 행복한 삶을 위한 방법을 아는 학문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방법은 정치학에서 논의된다. 정치적인 것은 최고의 좋음을 목적으로 한다. 시민을 좋은 성품을 가진 실천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Ⅰⅸ]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란 수학처럼 엄밀한 수준의 용어가 아니다. 교양있는 사람들(χαρίεντες)은 무작정 정확성만 추구하지 않고, 그 주제에 어울리는 정도의 정확성만 추구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 즉 행위에 대한 학문인 윤리학에는 무한히 정밀한 정확성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거칠게 말해진 것과 진리가 보인 모양(λέγοντας παχυλῶς καὶ τύπῳ τἀληθὲς ἐνδείκνυσθαι)’, 윤리학이 원하는 수준의 정확성이다. 특히, 다수의 행위에 관한 학문인 정치학은 앎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다. 윤리학, 정치학의 목적은 행위이므로 여러 행위들의 경험에 대해 논해야 한다. [Ⅰⅲ]
인간은 본성상 고독한 삶을 사는 동물(ζῶντι βίον μονώτην)이 아니라 폴리스적 동물(ζῷον φύσει πολίτικον)이므로 인간의 행위는 부모, 자식, 아내, 친구, 동료 시민을 위한 자족적인 것(τῆς αὐταρκείας)을 추구해야 한다. [Ⅰⅵ]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은 곧 정치학이며, 정치학은 윤리학에서 분리될 수 없다. 양자를 포괄해 행위에 대한 논의라 불러보자. 행위에 대한 논의는 수학처럼 제일원리로부터 출발하는 말들(οἱ ἀπὸ τῶν ἀρχῶν λόγοι)이 아니라 제일원리들을 향해 나아가는 말들(οἱ ἐπὶ τὰς ἀρχάς λόγοι)이기 때문이다. [Ⅰⅳ] 이런 생각은 나중에 칸트의 판단력비판과 아렌트의 판단이론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함께 보면 좋을 것들
힘에 대한 다양한 개념이 등장한다. 능력(δύναμις), 폭력(βία), 절제(κράτος), 필연성(ἀνάγκη)… 이 개념들은 아렌트에서 권력(power – δύναμις), 폭력(violence – βία), 강제력(force – κράτος/ἀνάγκη)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권위(authority)는 로마제국에서 비롯된 개념이라고 아렌트도 인정했으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체력(βάρος? σθένος?)이 나타나지 않는 건 의외다. 노동개념과 연관된 건 βάρος로 보이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