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말, 난파된 정치 ④ | 칼로 물 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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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자연, 분할하는 정신

우리는 참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의 ‘봄바람 휘바이든’ 사건에서, 1853년 조선 부산에 표류한 ‘사우스 아메리카 호’와, 1653년 조선 제주에 표류한 헨드릭 하멜 이야기까지. 이렇게 시공간적으로 먼 사건이 서로 유사한 이유는 바로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포착하는 방식이 바로, 표류하는 자연을, 정신이 분할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연 그 자체는 무지개와 같습니다. 무지개는 경계를 확정할 수 없는 연속체(continuum)입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말은 우리의 생각 속에서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 정신 현상이지만, 입을 떠나 상대방의 귀에 닿기 전까지는 경계를 획정하기 힘든 파동, 즉 자연 현상입니다.

연속체인 자연에서 모든 사물은 끊임없는 변화 아래 놓입니다. 대표적으로 브라운 운동(Brownian Motion)이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1827년,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이 최초로 보고한 현상입니다. 브라운은 현미경으로 꽃가루를 관찰하던 중, 입자의 모양과 생사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미세입자들이 끊임없이 불규칙하게 움직인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 끝없는 표류가 브라운 운동입니다.

브라운 운동의 실제 모습 (출처: Pollen Grains in Water – Brownian Motion)
브라운 운동의 궤적은 이렇게나 불규칙합니다. (출처: Ahmed El Kaffas (2008), Measuring the mechanical properties of apoptotic cells using particle tracking microrheology)
로버트 브라운은 아마 이런 현미경으로 브라운 운동을 관찰했을 테죠. (출처: https://www.fleaglass.com/ads/a-berge-late-ramsden-compound-microscope/)

브라운 운동의 원인은 사물들 사이의 상호작용입니다. 꽃가루가 표류하는 이유는 꽃가루가 너무 작았기 때문입니다. 현미경으로 작은 입자를 관찰할 때에는 도말법(smear method)을 사용합니다. 도말법은 얇은 유리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관찰하고자 하는 입자들을 그 위에 떨어뜨려 얇게 펴는 방법입니다. 꽃가루는 도말을 위해 떨어뜨린 바로 그 물방울 때문에 움직였습니다. 수많은 물 분자들과 충돌했기 때문에 꽃가루가 움직이게 된 겁니다. 세상은 사물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세상 만물은 주변의 만물과 끊임없이 부딪힙니다. 그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만물은 표류합니다.

모든 사물은 다른 사물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표류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수많은 공기 분자들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기로 인한 우리의 표류는 너무나 미세해서 보이지 않습니다. 공기 분자와의 충돌로 우리가 표류하기에는, 우리 몸이 너무 크고 공기 분자가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강물의 거대한 흐름이나, 사람이 가득 찬 지하철에서나 표류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 수준으로 관점을 확대해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세포가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우리 몸을 단단히 구성하지만, 수명을 다해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표류하는 먼지가 됩니다. 세포를 구성하는 단백질을 볼까요? 아미노산, 호르몬, 신경전달물질과 같은 수많은 분자들이 세포와 세포 사이를 표류합니다. 분자들이 다양한 반응으로 분해되고 합성되면서 우리의 안과 밖을 표류합니다. 분자를 이루는 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이 우리 몸을 이루고, 우리 몸을 이루던 물질이 몸 밖으로 떠납니다. 숨만 쉬어도 바깥의 공기가 들어오고 몸 안의 물과 공기가 나갑니다. 80일이면 우리 몸을 이루는 대부분(약 30조 개)의 세포가 교체되고, 1년이면 우리 몸을 이루던 거의 모든(약 98%) 원자가 교체됩니다.

표류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습니다. 일정하다는 말은 경계를 전제합니다. 특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일정한 것이니까요. 자연은 그런 기준이나 경계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경계는 오직 생물의 정신이 자연을 도려낸 결과입니다. 실제 자연을 관찰하면 어떤 경계도 발견할 수 없지만, 생물은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를 설정합니다. 우리의 정신도 이해되는 것과 이해되지 않는 것을 경계 짓습니다. 브라운 운동도 사실 브라운이 처음 발견한 게 아닙니다. 브라운도 논문에서 밝혔듯이, 이미 60년쯤 전에 Stiles와 Gleichen이라는 학자가 브라운 운동을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운동이 꽃가루의 생식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짐작했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견해를 비판적으로 계승해 학술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건 브라운이 처음입니다.

브라운 운동은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열의 분자-운동 이론이 요구하는 비유동 액체에 떠있는 작은 입자의 움직임에 관하여」라는 논문으로 일반화한 방정식을 도출한 이후부터 물리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현상이 됐습니다. 미세입자의 진동은 고전역학적으로는 무질서해 보이나 열역학적으로는 쉽게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이 연구는 모든 사물이 파동일 수 있다는 양자역학적 세계관이 태동하던 시기에 발표됐습니다. 미세입자들의 충돌이라는 현상은, 모든 원자는 입자여야 한다는 고전역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던 아인슈타인에게 더없이 알맞은 사례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연구가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전쟁 한가운데 위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한 세기 전의 브라운은 알았을까요?

자연은 이렇게나 무질서하고 무작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연속되어 있습니다. 브라운 운동에서 궤적을 그리듯이, 브라운 운동에 대한 연구의 역사에서 로버트 브라운과 아인슈타인을 꼽는 일은, 자연의 무한한 흐름에서 특정한 사례들을 선별하는 일입니다. 말 알아듣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공기의 파동에서 우리가 들을 소리만 선별해 듣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리에는 잡음(noise)이 섞여 있습니다. 잡음의 파도 속에서 표류하던 의미를 건져 올리는 게 바로 정신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말해왔다

정신은 자연을 나누고 쪼개고 분할하고 해체합니다. ‘생각’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디아노이아(διάνοια)는 ‘가로질러-‘라는 뜻의 디아(διά)와 ‘정신’을 뜻하는 누스(νοῦς)의 합성어로 보입니다. 그런데 디아는 ‘둘로 나눈다’는 디카제인(διχάζειν)에서 비롯된 듯합니다. 디카제인은 ‘둘’이라는 수를 뜻하는 뒤오(δύο)에서 왔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사유하는 우리의 정신은 스스로 묻고 답합니다. 단일한 정신이 질문자와 답변자 둘로 나뉘어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고 답하며 더 나은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변증법’, 즉 디알렉토스(διάλεκτος)라 부릅니다. 변증법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둘을 알기 위해서는 경계를 지어야 합니다. 경계는 정신의 활동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계’를 의미하는 호로스(ὅρος)는 말과 사물의 ‘정의(定義)’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방식의 접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사합니다. 인간의 정신이 자연을 나누는 행위는 ‘분석’이라 합니다. 분석(分析)이라는 한자어가 ‘나눌 분’ 자와 ‘쪼갤 석’ 자로 이루어진 이유입니다. 같은 뜻의 영어 어낼러시스(analysis)는 그리스어 아날뤼에인(ἀναλύειν)에서 왔습니다. 아날뤼에인은 ‘완전히-‘를 의미하는 아나(ἀνά)와 ‘풀다’를 의미하는 뤼에인(λύειν)의 합성어라 합니다. 사물에 경계를 지으면 자연히 풀어지고 쪼개지기 때문입니다.

‘쪼갠다’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로 템네인(τέμνειν)인데, 부정어 아(ἀ)가 붙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상의 상태’를 의미하는 아토모스(ἄτομος)가 됩니다. 바로 ‘원자’를 의미하는 영어 아톰(atom)의 어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결코 쪼갤 수 없는 무언가가 있던가요? 모든 것은 쪼개져 다른 것을 낳기 마련입니다.

세상 만물은 미세한 것들로 쪼갤 수 있습니다. 달리 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원자들로 구성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미세한 것들은 끊임없이 날리고 흘러갑니다. 우리 눈에는 동일하게 보여도 만물의 구성요소는 흐르고 있습니다. ‘흐른다’는 뜻의 플레인(φλεῖν)이 라틴어 플루에레(fluere)가 되고, ‘이미 흘러간 것’을 뜻하는 플룩수스(flūxus)가 ‘끝없는 변화’를 뜻하는 영어 플럭스(flux)로 쓰입니다. 표류하는 자연이 끝없는 변화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석’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아날뤼에인(ἀναλύειν)의 숨은 뜻을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알뤼에인(ἀλύειν)은 ‘헤맨다’는 뜻입니다. 알뤼에인에 부정어 아(ἀ, ἀν)가 붙어 표류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지 않았느냐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 정신은 자연을 분할해 더 이상 표류하지 않을 때, 자연을 올바로 분석했다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건 제 생각입니다.

소리와 헛소리 사이에서

분할의 결과물은 경계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물의 경계는 곧 그것의 정의(定義)입니다. 사물과 현상마다 이름을 붙이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했다 여깁니다. 그러나 진짜 이해는 그렇지 않습니다. 경계를 넘어 서로 다른 두 가지 사안을 함께 둘 때 우리는 ‘종합’한다고 하는데,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이를 쉰티테나이(συντιθέναι)라 일컬었습니다. ‘이해한다’는 말이 쉬네이나이(συνεῖναι)인 이유는 바로, 서로 달라보이는 개별적인 사례들을 모아 종합할 때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르는 현상을 이해라 여겼기 때문일 겁니다.

윤 대통령이 낸 소리는 표류하는 자연입니다. 사실 모든 목소리가 그렇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의미를 찾기 위해 경계를 설정합니다. 윤 대통령의 음성을 음소로 쪼개 해석한 각자에게는 ‘바이든’ 또는 ‘날리면’이라는 분명한 생각이 떠오른다는 겁니다. 그 생각이 다시 입밖에 나가는 순간 사람들의 동의와 반대에 부딪힙니다. ‘나는 바이든으로 들렸어.’ ‘무슨 소리야, 저건 날리면이지.’ 다시 상대방의 반응을 보고 생각합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저 자식이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생각과 말은 입을 경계로 자연과 정신을 오가며 진동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코스(Πλούταρχος)는 『영웅전(Βίοι Παράλληλοι)』이라는 책에 스물다섯 명의 그리스 영웅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중 첫 번째 이야기가 아테네를 세운 영웅 테세우스의 이야기입니다. 테세우스 편에는 유명한 일화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테세우스의 배’로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제 테세우스가 젊은이들과 항해하고 안전히 돌아온 서른 개의 노가 달린 배는 아테네 사람들에 의해 데메트리우스 팔레레우스의 시대까지 지켜졌다. 아테네 사람들은 꾸준히 배의 목재 중 썩은 부분을 제거하고, 적절한 나무로 교체했다. 그래서 그 배는 성장과 변화의 원칙을 논한 철학자들의 예시가 됐다. 몇몇 사람들은 그 배가 변함없이 남았다고 주장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남지 않았다고 논박했기 때문이다.

유행은 보그vogue 표류하다 독일어 wogen 표하다 Woge 파도

한 방향으로 표류하는 다수 엔드로피 확산

목적 갖고 운동하는 다수 연대 한 마음 한 뜻 공동체

공통점 다수임 다수결은 표류하는 다수와 연대하는 다수를 구분하지 못함

차이점 타자를 의식함 타자의 입장을 헤아림

명백한 감각은 가능한가?

프랭크퍼트 헛소리에 대하여, 헛소리는 진리에 관심 없음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연법칙에’만’ 따라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명이라는 게 사실 있을 법하지 않게 사물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건물도 계속해서 관리하지 않으면 부서지고 쪼개집니다.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신이 가장 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이라는 말은 아무도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은 상호작용함으로써, 의사소통을 통해 긍정과 부정을 함으로써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우리 마음속에서도 의지가 있어야 가능성이 실현됩니다. 의지는 원함과 원하지 않음이 동시에 나타나 하나를 이기는 현상입니다. 그러함과 그러하지 않음이라는 사유가 가능한 사람만 의지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아무도 그에 대해 찬성과 반대하지 않는 존재가 신입니다. 그런 상태는 평형입니다. 평형이야말로 가장 신적인 상태입니다. 죽음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이 계속해서 활동해야 사물도 정치도 죽지 않습니다.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합니다. “종을 횡단하는 피진”

언어의 분절성 빨간색 피진 첫 분절 상대방의 행동을 부르는 행동

폭력은 죽음 부르기 속마음에 가두기 언어를 빼앗기 다른 이름 붙이기 말 못하게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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