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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표류한다니, 무슨 소리야?
문제는, 대통령실의 ‘날리면’이라는 해명이 등장하기 전까지, ‘날리면’으로 들었다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겁니다. 그 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이든’이라 들었습니다. 적어도 제 주변에서는요. MBC뉴스가 가장 처음 그렇게 듣고 대중에 보도했습니다. 그 보도를 접한 사람들은 ‘바이든’이 맞다고 확인했습니다. 눈에 띄는 오보나 왜곡, 날조 논란은 대통령실의 반응이 나오기 전까지 없었거든요. 국내 다른 언론도, 외신도 ‘바이든’이 맞다고 확인했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국가를 대표해 국제 행사에 참석한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가장 강력한 동맹인 미국의 의회를 모욕한 사건이 적절했는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실이 MBC뉴스의 보도를 부정하자 상황이 반전됐습니다. 윤 대통령이 한 말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었다고 누군가 주장하자마자, 대통령의 언어를 둘러싼 맥락이 모두 사라지고, 언어 그 자체만 남은 겁니다. 공론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왜 그 말을 했는지에 대한 논의가 사라진 채 무엇을 말했는지에 대한 논의만 남았습니다. 놀랍게도, ‘날리면’으로 들린다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여당 국회의원과 같이 윤 대통령과 이익을 공유하는 소수가 먼저 자신이 들은 바를 공론장에 보고했습니다. 다음은 KBS뉴스에서 인터뷰한 국민의힘 이용호 의원의 발언입니다.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에는 바이든, 이렇게 들었어요. 그런데 또 해명 이후에 또 날리면, 이렇게 들어가지고 계속 그 생각으로 들으니까 또 비슷해요. 그래서 역시 사람은 듣고 싶은 대로 듣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저는 뭐 거기에 잘잘못을 얘기하고 싶지는 않고, 따지고 싶지 않고, 어떤 게 맞는지를.
물론 이용호 의원은 ‘바이든’과 ‘날리면’ 중에 무엇이 맞는지 따지고 싶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날리면’을 공개적으로 긍정했다는 점에서 ‘봄바람 휘바이든’이 기타 모든 논의를 삼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이어서,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도 ‘바이든’이 아니라 ‘아 말리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나 ‘이 새끼들이’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였다는 주장이 인상적입니다. 적어도 대통령실에서는 ‘이 새끼들이’가 대한민국 국회를 가리킨 말이었다고 인정했는데도 말이죠.

이렇게 몇몇 주요 인물이 공개적으로 대통령실의 주장을 거들자 상황은 급격하게 반전됐습니다.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다수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를 두고 실시된 복수의 여론조사에서 ‘날리면’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응답자의 약 30%에 달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리얼미터가 집계한 2022년 9월 3주차 대통령 지지율은 31.4%였습니다. 윤 대통령의 문제적 발언이 보도된 9월 22일 당시에는 ‘날리면’으로 들었다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다가, 고작 일주일만에 무려 셋 중 하나에 버금가는 다수가 ‘날리면’이라고 듣기 시작한 겁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들었다고 보고하기 시작한 겁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사안입니다. 이 사건은, 내가 들은 바대로 듣지 않은 사람들을 부정하고 속 편하게 끝낼 사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치적 이해관계는 사실을 호도한다’거나 ‘감각은 의지의 영향을 받는다’는 식으로 끝내야 할까요? 정치와 감각은 진리에 비해 열등한 것이라고 끝내야 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현상은 표류하는 말이 의견의 바다에 난파된 과정입니다. 지난 가을, 우리는 철학적으로 아주 독특한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도했던 겁니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듣기와 말하기 사이를 표류하는 언어
‘봄바람 휘바이든’ 사건은, 말하자면 마치 이런 상황입니다. A가 무슨 말을 했습니다. B는 “사과가 떨어졌다”고 들었다 보고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과’로 듣고 사과가 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C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닌데? ‘사과’가 아니라 ‘바다’라고 한 건데?” 그리고 그 맥락에는 이런 말이 숨겨져 있습니다. “A를 지지한다면 모두 ‘바다’로 들어!” 그랬더니 A를 지지하는 3분의 1가량이 “어, 맞네, 사과가 아니라 바다였네, ‘사과가 떨어졌다’가 아니라 ‘바다에 떨어졌다’였네~”라며 마음을 돌린 겁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들었는지, 겉으로만 그렇게 보고한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A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모종의 규칙이 생긴 겁니다. 바로 ‘A를 지지한다면 “A는 ‘바다’를 말했다”고 말해야 한다’는 규칙입니다.
누군가를 지지한다면 이렇게 들었다고 해라! 그리고 반대한다면, 그 반대로 해라! 이 규칙은 음차된 외국의 이름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도 보입니다. 미국은 왜 미국일까요? 태초에 미국인은 중국인을 만났습니다. ‘니총날리라이?(你从哪里来?)’ 어디서 왔느냐는 중국인의 질문에 미국인은 이렇게 답했을 겁니다. ‘어메-뤼커(ǝmérikǝ).’ 대답을 들은 중국인은 ‘어메-뤼커’를 ‘미리견(美利堅)’으로 옮겼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오랜 기간 중국에서 미국은 미리견국으로 불렸습니다.
우리나라 기록물에서 미국의 국호가 처음 등장한 건 1853년 1월 6일입니다. 부산에서 봉화꾼 곽돌쇠(郭突釗)가 이상하게 생긴 큰 배 한 척이 표류한 채 둥둥 떠있다고 보고한 때입니다. 통역사를 대동한 관리들이 배에 올라 마흔세 명의 선원들을 만납니다. 미국인과의 조우가 기록된 첫 사례입니다. 그런데 관리들이 보자 하니, 사람 모양이긴 한데 머리는 덥수룩 고슴도치같고 코는 높고 괴상하게 생겼습니다. 누구는 눈이 퍼렇고 누구는 누렇고, 누구는 푸르고, 아주 신기했나 봅니다. 다행히 미국 선원들은 조선의 관리들을 기쁘게 웃으며 맞이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관리들은 통역사를 대동했음에도 그 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나라 이름이 뭐냐, 여기는 어쩌다 왔냐 물으니 선원들은 배를 가리키면서 ‘며리계, 며리계(旀里界)’ 할 뿐이었습니다. 배의 이름이 ‘사우스 아메리카(South America)‘ 호였거든요.

그렇다면 조선에서 미국은 ‘며리계’로 불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며리계’가 아니라 ‘미리견’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곽돌쇠가 사우스 아메리카 호를 발견한지 20년이 채 흐르지 않은 때에도 ‘며리계’는 쓰이지 않았습니다. 고종이 재임하던 1871년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미리견’만 기록됐습니다. 조정의 사관은 조선 사람이 들은 명칭보다 중국 사람이 들은 명칭이 더 옳다고 여긴 듯합니다.
개화기 조선, 미리견국은 짧게 미(美)국으로 불렸습니다. 아름다운 나라가 된 거죠. 일본에서는 미국을 ‘아미리가’라 불렀습니다. 아미리가(亞米利加)도 짧게 미국이 됐는데, 일본이 쌀 미(米)자를 쓰는 바람에 쌀의 나라라는 뜻을 품게 됐습니다. 조선에 중국이 미치는 영향이 줄고 일제가 본격적으로 식민화 사업에 돌입하자, 미(美)국보다 미(米)국이 더 쓰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미국은 얼마간 쌀의 나라로 불렸습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나서야 미국은 다시 아름다운 나라가 됐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반일감정을 드러내는 북한은 미국을 어떻게 부를까요? 북한은 2017년 조선중앙통신, 우리나라로 치면 KBS를 통해 일본을 “간악한 쪽바리”라고 공개 모욕한 적이 있습니다. https://m.youtube.com/watch?v=5NFiNlNXMaQ 그런 북한은 당연히 중국발 용어인 미(美)국이라 부르지 않을까요? 놀랍게도 북한은 미국을 일본식 명칭인 미(米)국으로 부릅니다. 하긴, 미국과 다른 모든 나라를 왕따시키는 북한이, 미국을 아름다운 나라라 부르는 건 뭔가 우스워 보입니다. 어쨌든 과거의 적보다 현재의 적이 더 싫다는 걸까요?
이렇게 언어는 표류합니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이 바이든을 ‘바이든’으로 부르든 ‘날리면’으로 부르든 상관이 없습니다. 미국이 ‘며리계’로 불리든 ‘미리견’으로 불리든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미국에 쌀이 많냐’, ‘미국이 아름답냐’는 논쟁도요.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언어의 실제 모습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언어는 파롤로 나타나고, 인간은 누구의 파롤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 ‘정확하게’라는 의미가 ‘인간과 독립하여’이라거나 ‘정치에 오염되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라면요.
우리는 꽤나 편파적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번에 두 공간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생각도 그렇습니다. 한꺼번에 여러 생각을 할 수는 없고 순차적으로 한 가지 생각만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처하지 못하는 어딘가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편파적인 이유입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인 한, 인간은 결코 불편부당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