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권 막바지 트라쉬마코스의 논의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2권은 책 전체를 아우르는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핵심적 부분이다.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질문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가지 주장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보자.
트라쉬마코스는, ‘올바른 것(τό δίκαιον)은 더 강한 자(ὁ κρείττων)의 이로운 것(τό συμφερον)’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강자도 사람이니, 실수하면 자기에게 이롭지 않은 것을 법률로 정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한다. 그리고 실은 통솔하는 자(ὁ ἀρχον)가 따르는 자(ὁ ἀρχομενον)의 이익을 위해 통솔해야 진정 통솔하는 자라고 규정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는 ‘올바른 것과 올바름(정의)은 남에게 좋은 것(타인에게 선한/행복한/유익한 것, ἀλλότριον ἀγαθόν)이므로, 강자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복종하며 섬기는(πειθομενον τε καὶ ὑπηρετοῦτος) 사람들(οἰκεία)에게는 피해(βλάβη)가 된다고 반박한다. 반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남들보다 크게 많이 가질(더 많이 주장할/탐욕 부릴/사취할, πλεονέκτειν) 수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누군가 더 많이 갖는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더 많은 보상이 그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주장에는 두 가지 맥락이 숨어 있다. 하나는 정의란 그 본성상 타인의 이익이라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강자에게는 그 정의의 본성이 통하지 않고 단지 복종하며 섬기는 약자에게만 통한다는 점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참된 통치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금전이나 명예 등의 보상이 따르는 것이고 반박한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통치를 당하는 벌(ζημία) 역시 그 보상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 점은 인상적이다. 식견 있는 사람(γιγνωσκον)이라면 스스로를 이롭게 하거나 타인을 이롭게 하기보다, 타인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올바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조화를 이루어 공동체가 제대로 기능하도록 만든다. 악인의 무리도 그들 사이에서는 올바름이 작동하기에 악한 일을 할 수 있다. 한 사람에게도 올바름이 적용된다는 말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인격이 나와 나 자신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혼(ψυχή)의 기능(ἔργον)은 보살펴지는 것(ἐπιμελεῖσθαι)과 이끄는 것(ἄρχειν), 상의되는 것(βουλεύεσθαι)인데, 혼이 좋은 상태에 있으면 잘 해내게(잘 살게, εὖ πράττειν) 된다.
여기까지가 트라쉬마코스와 소크라테스 사이에 일어난 대화의 요약이다.
이에 글라우콘은, 이익과 결부하지 않더라도 트라쉬마코스의 문제제기가 합당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정의로운 것’과 ‘정의로운 듯 보이는 것’ 사이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다. 정의로운 것은 그 자체로 수고롭지만, 정의로운 듯 보이는 것에는 보상(μισθός)이 따른다. 보상은 돈과 평판(δόξα)에 따른 신용(εὐδοκίμησις)이다. 그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게 불의한 짓,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면서도 정의로운 듯이 꾸민다. 법은 단지 서로 올바르지 못한 짓으로 피해보지 않도록 약속한 것(συνθέσθαι/συντίθεσθαι)에 불과하다. 글라우콘은, 기게스(Γύγης) 신화를 예로 들며,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모든 이는 탐욕(πλεονεξία)을 좇을 것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가장 불의한 사람은 실제로 올바른 사람인 것(εἶναι)이 아니면서 올바른 듯이 보이는(δόκειν) 사람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자에게 통치와 혼인, 거래에서 더 많은 보상을 줄 것이고, 신들도 그로부터 더 많은 제물을 받을 것이므로 그를 더 잘 돌볼 것이다.
아데이만토스는, 글라우콘의 논의에서 더 나아가, ‘올바른 것’은 그 자체로 찬양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올바른 것’에 찬양했던 이유는 사실 ‘올바른 듯이 보이는 것’에 따른 보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의 마음속에 “절제와 올바름은 아름다운(καλὸν) 것이긴 하되 확실히 힘들고(어렵고, χαλεπόν) 수고로운(괴로운, ἐπίπονον) 것”이라 생각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것은 더 달콤하고(ἡδύ) 얻기 쉬운(εὔπετες) 것이되 평판과 법으로만은 수치스러운(αἰσχρόν) 것”이라 생각한다.(364a) 이런 이야기는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혼에 영향을 준다. 당대의 그리스 사람들은 신이 올바른 자에게 불이익을, 올바르지 않은 자에게 이익을 내릴 것이라 믿고 있다. 신화도 결국 법(관습, νομός)과 시인(ποιητής)으로 인해 전해지는 것이므로, 이런 의견이 계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보상 즉 결과(귀결된 것, ἀποβαίνεσθαι)와는 무관하게 올바름을 찬양해야 한다.
정리하면, 글라우콘은 인간 세계에서 실재가 현상에 가려져 있음을 주장했고, 아데이만토스는 그러한 현상이 실은 믿음의 영역임을 주장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실재와 현상은 다르며 현상이 가린 실재를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믿음과 다른 새로운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방법으로 논의를 이끌어 나간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행위로 구성된 정치체(국가, πολιτεία)를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한다. 아마도 인간 내면의 영역은 행위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으로 이상적인 모습의 정치체를 계속해서 그려 나가다 보면, 모종의 올바름을 발견하게 되고, 그 올바름이 한 명의 인간에게도 정확히 적용되리라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돼지들의 나라, 염증상태의 나라가 나타난다. 먼저, 모든 나라(πόλις)는 인간이 자족(αὐτάρκης)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다른 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필요(χρείᾱͅ) 때문인 것이다. 나라의 탄생 지점,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의 구분 지점은 다름 아닌 필요다. 필요는 음식, 집, 옷 순으로 급하고 중요하다. 돼지들의 나라(ὑῶν πόλις)는 모든 구성원이 각자 최소 필요를 충족하며 절제하는 참된 나라(ἀληθινῇ πόλις)이자 건강한 나라(ὑγιής πόλις)다. 반면 사치스런 나라(τρυφωσᾱ πόλις)에서는 구성원들이 각자의 필요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염증 상태의 나라(부풀어오른, φλεγμαινουσα πόλις)이다. 탐욕(πλεονεξια)이 싸움(πόλεμος)을 낳는다. 이와 더불어 수호자(φυλακικὸς/φυλακή)의 자질(ἔθος)은 개(κύων)와 같이 적과 친구를 구분하고 그에 맞게 행위하는 자질이며, 그것이 철학자(배움을 사랑하는 자, φιλόσοφος)의 자질임이 논구된다.
다음으로 소크라테스는 그런 국가에서 시가(μουσική)가 아주 중요함을 주장한다. 이야기(λόγοι)는 혼을 형성(πλάττειν/πλάσσειν)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언어가 세계를 구성한다는 가다머의 주장을 떠올린다.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유통되고 있는 신화를 분별하며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다. 이야기의 규범(τύπος)을 법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선한 것의 원인이 되는(αἴτιον τὸ ἀγαθόν)” 신(θεός)의 모습을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신을 규정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데, 이는 언어가 세계를 만들고 정신이 세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신이 나쁜 일의 원인도 된다는 거짓(ψεῦδος)을 말할 것이 아니라, 좋은 일만 주관한다는 참된 것을 모방해야 한다고 끝맺는다.
정리해보니 2권이 제일 중요하다. 국민이 개(κύων), 돼지(ὗς)라는 누군가의 말은 어쩌면 수호자와 생산자를 염두에 둔 철학적인 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