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은 이렇다. “어저께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함께 피레우스로 내려갔었네.” 이 책 자체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이 안의 대화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이며, 화자들은 종종 다른 대화를 인용하기도 함.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빈번히 등장. 아리스톤은 플라톤의 아버지, 글라우콘은 플라톤의 형.
이 책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의미의 영역인 호로스(ὅρος)를 말 되는 이야기 즉 로고스(λόγος)로 풀어나가는 여정을 담았다. 의미의 영역은 있어야 할 곳에 그것을 두는 티테나이(τιθέναι)로 그 경계가 명확해지는데, 이때 소크라테스는 의도적으로 문제를 쪼개어 생각하지 않는다. 온전한 세계에 합당한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영역을 구하는 것, 세계를 의도적으로 쪼개어버리는 템네인(τέμνειν)이 아니라 경계를 나누는 네메인(νέμειν)인 것이다.
주요 대화자 중심으로 보면 재밌다.
케팔로스는 죽을 때가 거의 다 되어가는 노인인데, 노인의 지혜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이가 많아서 현명하거나 우둔해지는 게 아니라 그냥 현명한 사람이 나이를 먹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케팔로스는 큰 부자이기도 했는데, 재산이 많아 좋은 이유로 무언가를 많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는 것을 든다. 남에게 주는 피해란 의도치 않게 약속을 어기는 것, 빚진 것을 갚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의 정치적 의미를 볼 수도 있겠는데, 넉넉하면 피해자가 적다는 점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사회적인 측면이 정치적 영역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폴레마르코스는 케팔로스의 아들인데, 나치의 카를 슈미트가 깊이 참고한 듯하다. 정의란 친구에게 이롭게, 적에게 해롭게 하는 것이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누가 친구인지 적인지 인간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런 정의는 신에게나 어울린다. 인간은 실수하는 존재, 확신을 갖고서도 훗날 철회하는 존재,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아나가는 존재다.
트라쉬마코스는 착한 빌런이다. 소크라테스가 칭찬하며 그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모습은 아주 볼 만하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며, 불의가 내게 더 이익을 준다는 논지는 지금까지도 강력하다. 소크라테스도 트라쉬마코스와 싸우며 명언들을 많이 날린다.
보수와 보상은 다르다. 보수는 제가 원해서 받아내는, 일종의 기술인 테크네(τέχνη)로 만들어낸 결과이다. 테크네는 말을 잘 타거나 배를 잘 몰거나 시를 잘 짓거나 하는, 사물을 대하는 기술이다. 좋은 보수는 상대를 사물로 대할 때 얻을 수 있다. 반면 보상은 겸손하며 동시에 당당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탁월함(ἀρετή)을 기준으로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사람만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보상을 받는 그는 나보다 탁월한 자보다 더 많이 갖기를 원치 않지만 덜 탁월한 자보다는 많이 갖기를 원한다. 덜 탁월한 자가 나보다 많이 가짐에도 겸손을 이유로 침묵을 지키는 건 겸손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벌을 받는다. 돈이나 명예만 보상인 것이 아니라 그 벌도 보상의 일종이다. 그 벌에 따라 주변 사람은 합당하게 돈과 명예를 주어야 한다. 나를 위해 이롭게 하는 것보다는 남을 위해 이롭게 하는 것이, 또 그것보다는 남의 도움을 받아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낫다는 말은 보상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체의 핵심이다.
모든 것에는 나름의 일(ἔργον)이 있다. 어떤 것의 일은 그 일을 그것만으로만 할 수 있고, 가장 훌륭하게 해낼 때 그것의 일이 된다. 정의는 생명(ψυχή)의 일인 잘 살기(εὖ πραττειν)를 가능케 한다. 그게 행복이다.
마지막에 트라쉬마코스가 정의가 불의보다 행복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자신의 고집을 철회하는 부분은 극적이다. 벤디스 여신의 축제를 소크라테스를 위한 잔치로 하자는 말은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을 설명하게 될 때 느끼는 즐거움을 담은 표현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소크라테스가 본질(그런 것, εἶναι)만큼 현상(내게 그렇게 보이는 것, δόκει μοι)도 중시했다는 점이다. 인간은 실수한다. 원래 그러한 것과 내가 본 것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원래 그러한 것은 끊임없는 로고스로 호로스를 찾아나갈 때에야 가능하다. 그 자체가 영원히 변치 않는 본질, 우시아(οὐσί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