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치양지에 대한 고찰─정치적 판단력을 중심으로

왕양명의 치양지

격물치지는 사물에 다가가 앎에 이른다는 말이다. 사물의 원리를 탐구하다보면 인간이 해야할 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20대 청년 시기에 격물치지를 위해 대나무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의 이치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탐구하던 왕양명은 이내 모든 사물에 사람의 마음이 닿지 않은 구석이 없다는 데 이르렀다. “마음 밖에 물이 없다”는 주장은 바로 그러한 뜻을 담고 있다. (전습록 Ⅰ, 83조목, 248쪽) 양명은 사람의 마음과 사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4조목
정조삭이 물었다: 지극한 선 또한 반드시 사물에서부터 구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께서 대답하셨다: 지극한 선은 단지 이 마음이 완전히 순수한 천리이기만 하면 된다. 다시 사물에서 어떻게 구하겠는가? 시험삼아 몇 가지 예를 들어 말해 보아라.
  정조삭이 말했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길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예절에 맞게 따뜻하게 해드리고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르게 봉양하는 것인지는 반드시 그 합당함을 강구해야만 비로소 지극한 선이 됩니다. 그래서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하는 공부가 있는 것입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단지 따뜻하게 해드리고 시원하게 해드리는 예의 절목이나 봉양의 올바름 같은 것이라면 하루이틀이면 모두 강구할 수 있으니, 어찌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하는 공부가 필요하겠는가? 오직 따뜻하고 시원하게 해드릴 때도 단지 이 마음이 완전히 순수한 천리이고자 하고, 봉양할 때도 단지 이 마음이 완전히 순수한 천리이고자 할 뿐이다. 이러한 일들은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하는 공부가 있지 않다면, 장차 처음의 털끝만큼의 차이가 나중에는 천리의 틈이 벌어지는 잘못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비록 성인의 경우라도 오히려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한결같게 하라는 훈계를 덧붙였던 것이다. 단지 그와 같은 의식과 절목의 합당함을 강구하여 얻은 것을 지극한 선이라고 말한다면, 연극배우가 따뜻하게 해드리고 시원하게 해드리며 봉양하는 여러 가지 의식과 절목들을 합당하게 연출한 것도 지극한 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서애는 이날 또 깨달은 것이 있었다.
(왕양명, 『실천적 삶을 위한 지침 전습록 Ⅰ』, 정인재, 한정길 역, 청계, 2007, 85-87쪽)

위 인용문을 살펴보면, 왕양명의 논의는 두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다. 첫째 전제는 인간의 행위가 인간의 마음(心)에서 비롯된다는 입장이다. 인간의 마음을 경유하지 않는 행위는 없다. 행위를 이끄는 것은 인간의 사단칠정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마음(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에서 천리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그 천리에 맞지 않으면 인간은 지극한 선을 행할 수 없다. 행위의 선악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전제는 행위의 결과와 함께 의도를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행위는 선한 결과를 낳을 뿐만 아니라 그 행위를 이끈 의도와 합치될 때에만 선한 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의도는 주자학에서 인간의 본성을 가린다고 비판받았던 인간의 마음(情)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결과와 의도는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만 먹고 행하지 않거나 행위만 하고 다른 마음을 먹는 경우에는 그것을 인간의 마음이나 행위라고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만 강조하는 입장은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하지 못한 것이거나 “연출”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왕양명은 다음과 같이 앎과 행위가 다르지 않다는 지행합일을 주장한다.

5조목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하나의 참된 앎과 행위를 지적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마치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고, 악취를 싫어하듯이 하라"고 말했다. 아름다운 여색을 보는 것은 앎에 속하고,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은 행위에 속한다. 아름다운 여색을 보았을 때 이미 저절로 좋아하게 되는 것이지, (아름다운 여색을 쳐다본 뒤에 또 하나의 마음을 세워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악취를 맡는 것은 앎에 속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은 행위에 속한다. 악취를 맡았을 때 이미 저절로 싫어하게 되는 것이지, (악취를) 맡은 뒤에 따로 하나의 마음을 세워서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코가 막힌 사람은 비록 악취가 나는 것을 앞에서 보더라도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몹시 싫어하지 않는데, 이것은 아직 냄새를 알지 못한 것이다. 가령 아무개가 효도를 알고 아무개가 공손함을 안다고 말할 경우도 반드시 그 사람이 이미 효도를 행하고 공손함을 행해야만 비로소 그가 효도를 알고 공손함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단지 이 효도와 공손함에 대해 말할 줄 안다고 해서 효도와 공손함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왕양명, 『실천적 삶을 위한 지침 전습록 Ⅰ』, 정인재, 한정길 역, 청계, 2007, 88-89쪽)

왕양명은 앎이 행위를 반드시 수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공부의 핵심은 앎을 실현하는 실천(致知)이다. (전습록 Ⅰ, 139조목, 400쪽) 격물치지는 행위 없이 이론을 중시하는 궁리와는 구분되지만, 모두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라는 점에서 성의정심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전습록 Ⅰ, 8조목, 103-104쪽; 137조목, 388-393쪽) 이것이 바로 마음에서 벗어나 사물의 이치를 구하는 일을 왕양명이 비판하는 이유이다. (전습록 Ⅰ, 133조목, 363-366쪽)

성인(聖人)은 양지를 실천하는 인간, 다시 말해 치양지(致良知)를 통해 마음을 순전히 선한 상태로 만든 인간이다. (전습록 Ⅰ, 138조목, 396쪽) 앎과 본성이 “마음의 본체”이며 “본성은 곧 리”라는 라는 말을 놓고 볼 때, 사단칠정을 리와 기의 함유 혹은 비율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앎을 드러내는 다양한 양상이라는 색다른 해석을 시도할 수 있다. 양지는 적절한 상황에 적절한 마음을 갖는 것, 다시 말해 적절히 판단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적절하지 않은 마음은 양지를 가린다. 이런 맥락에서 결과와 의도를 모두 중시하는 양명의 논의는 좋은 판단을 주장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판단은 무조건적으로 선한 규범을 실천하기보다 조건적으로 상황에 맞는 원리를 도출해 행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139조목
대저 세부 항목과 때의 변화에 대한 양지의 관계는 사각형과 원형, 긴 것과 짧은 것에 대한 그림쇠와 척도의 관계와 같다. 세부 항목 및 때의 변화를 미리 정할 수 없는 것은 방원, 장단을 이루 다 궁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 양지가 완전히 실현되면 세부 항목과 때의 변화로 속일 수 없어서 세상의 세부 항목과 때의 변화에 이루 다 응할 수 없다. 털끝만한 것이 결국 천리만큼의 큰 차이를 가져오는 오류를 내 마음 양지의 미세한 한 생각에서 살피지 않는다면, 또 장차 그 학문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이것은 그림쇠를 사용하지 않고 세상의 사각형과 원형을 그리려고 하는 것이며, 곱쇠를 사용하지 않고 세상의 긴 것과 짧은 것을 다 재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어긋나고 잘못되어 날마다 수고롭게 애써도 이루어지는 결과가 없다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 무릇 순임금이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내를 맞아들인 것이 어찌 순임금 이전에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내를 맞아들여서 하나의 준칙이 되었고, 그래서 순임금이 어떤 전적을 고찰하거나 어떤 사람에게 문의하여 그렇게 행한 것인가? 아니면 역시 그 마음 일념의 양지에서 구하여 경중의 마땅함을 헤아리고 부득이하여 그렇게 행한 것인가? ……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자신의 양지를 실현함으로써 이 마음이 감응하여 응대하는 사이에서 의리를 정밀하게 살피는 데 힘쓰지 않고 다만 아무런 근거 없이 그처럼 상도를 개변시킨 일들을 토론한다. 그리고 그것을 잡아 일을 처리하는 근본으로 삼음으로써 일에 임하는 데 잘못이 없기를 구하고자 하지만 그 또한 아득하다. ……
(왕양명, 『실천적 삶을 위한 지침 전습록 Ⅰ』, 정인재, 한정길 역, 청계, 2007, 401-402쪽)

왕양명은 현실의 다양한 사안들을 보편타당한 규칙에 포섭하는 태도에 반대했다. 이러한 이유로 양명은 도(道)가 “일정한 방향과 형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전습록 Ⅰ, 66조목, 218쪽) 양지는 서로 다른 사안에 각기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인간의 능력을 일컫는 것이고, 도는 적합한 판단이 갖추어야 할 원리를 일컫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도는 바로 양지이다.” “옳고 그름이 양지에 의거하기만 한다면” 판단은 상황에 적합할 것이고 “더 이상 옳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습록 Ⅱ, 265조목, 725-726쪽) 그러므로 양명은 양지가 곧 중화(中和)이며, 중화는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점을 알아내는 것”이라 했다. (전습록Ⅱ, 789쪽, 304조목) 그러나 중화는 “특정한 때에 특정한 일에 한정하여” 긍정되는 것일 뿐이지, 그것이 곧바로 “커다란 근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지극히 성실하지 않은 인간의 판단은 순전히 양지대로 실천하는 데 실패한 것이므로 아직 중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습록 Ⅰ, 76조목, 235쪽)

양지는, 인간의 본성이나 사법과 같은 보편타당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판단력에 비롯된다.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은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고, 악취를 싫어하듯이”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인은 본성을 갈고 닦은 소수의 특출난 인간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해당한다. 이러한 이유로 양명은 학자들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선을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善與人同)”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전습록Ⅱ, 788쪽, 303조목) 그러므로 왕양명의 각민행도는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판단력에 주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313조목
하루는 왕여지가 유람을 나갔다가 돌아오자, 선생께서 물으셨다. "유람하면서 무엇을 보았는가?" (왕여지가) 대답했다. "거리에 가득찬 사람이 모두 성인임을 보았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보기에는 거리에 가득찬 사람들이 성인이지만, 거리에 가득찬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리어 그대가 성인이었을 것이다." 또 하루는 동나석이 유람을 나갔다 돌아와서 선생을 뵙고 말했다. "오늘 이상한 일을 보았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 이상하던가?" (동나석이) 대답했다. "거리에 가득찬 사람들이 모두 성인임을 보았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이 또한 평범한 일이니, 어찌 이상한 일로 여길 수 있겠는가?" …… 나 덕홍이 황정지, 장숙겸, 왕여중과 병술년의 회시를 보고 돌아와서 선생께 '도중에 학문을 강의했는데, 믿는 자도 있었고 믿지 않는 자도 있었다'고 말씀드렸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성인으로 가장하여 다른 사람에게 학문을 강의했으니, 사람들은 성인이 온 것으로 여겨서 모두 두려워 달아난 것이다. 그래서야 어떻게 제대로 강의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하나의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학문을 강의할 수 있다."
(왕양명, 『실천적 삶을 위한 지침 전습록 Ⅱ』, 정인재, 한정길 역, 청계, 2007, 803-804쪽)

도덕적 판단력과 정치적 판단력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판단력에 대해 다층적으로 논의한 바 있다. 판단력에 대한 칸트의 논의는 크게 도덕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도덕적 차원을 살펴본다. 도덕적 판단은 무조건적 명령에 대한 복종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물론 칸트는 도덕적 판단력이 아니라 실천이성이라는 독특한 용어를 사용하지만 여기에서는 편의상 도덕적 판단력으로 한다) 칸트는 무조건적 명령의 근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지란 어떤 법칙의 표상에 맞게 행위하게끔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능력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오직 이성적 존재자들에게서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의지에게서 그것의 자기규정의 객관적 근거로 쓰이는 것이 목적이다. 이 목적은 그것이 순전한 이성에 의해 주어진다면,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똑같이 타당함에 틀림없다. 이에 반해 그것의 결과가 목적인 행위의 가능 근거만을 함유하는 것은 수단이라고 일컫는다. 욕구의 주관적 근거는 동기이며, 의욕의 객관적 근거는 동인이다. 그래서 동기들에 의거한 주관적 목적들과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타당한 동인들에 달려 있는 객관적 목적들이 구별된다. 실천적 원리들이 모든 주관적 목적들을 도외시한다면, 그것들은 형식적이다. 그러나 주관적 목적들을, 그러니까 모종의 동기들을 기초로 한다면, 그것들은 질료적(실질적)이다. ……
  그러나 그것의 현존재 그 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목적 그 자체로서 일정한 법칙들의 근거일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그런 것 안에서 그리고 오로지 그런 것 안에서만 가능한 정언적 명령, 다시 말해 실천 법칙의 근거가 놓여 있을 터이다.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백종현 역, 아카넷, 2005, 144-145쪽)

어떠한 동기도 도외시함으로써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타당한 목적 그 자체인 명령은 정언명령이다. 정언명령은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윤리형이상학 정초』, 132쪽)는 명령이며, 개별적 인간이 행위하기 위해 세운 모종의 준칙들을 보편적 자연법칙과 같이 만든다. 개별적 준칙의 보편화가 바로 윤리형이상학의 목적이다. 보편적 도덕법칙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이외에 어떤 것도 선한 행위가 될 수 없다.

반면 조건적 판단을 살펴보면 도덕적 판단과 사뭇 다르다. 칸트는 무조건적 명령 이외에 또 다른 행위의 근거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규정적 판단력은 그 자신만으로서는 객체의 개념을 확립하는 어떠한 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자율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리로서의 주어진 법칙들이나 개념들 아래에만 포섭을 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나 반성적 판단력은, 아직 주어져 있지 않은 법칙 아래에, 따라서 실제로는 대상들에 관한 반성의 원리에 지나지 않는 법칙 아래에 포섭을 해야만 한다. 이 때 이러한 반성을 위한 법칙이나, 또는 그때 그때 당면한 경우를 위하여 충분히 원리가 될 수 있을 객체의 개념은 객관적으로는 전혀 우리에게 없다. …… 그것은 인식능력의 합목적적 사용을 위한, 다시 말하면 어떤 종류의 대상들에 관하여 반성하기 위한, 단지 주관적인 원리가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와 같은 경우에 관해서 반성적 판단력은 자기의 격률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도 경험에 있어서의 자연법칙들을 인식하기 위한 필연적인 격률들을 가지고 있어서, 판단력이 자연을 경험적인 자연법칙에 따라 단지 알기만 하기 위해서도 개념을 꼭 필요로 할 경우에는, 반성적 판단력은 그러한 격률을 매개로 하여 개념──비록 그것이 이성개념이지만──에 도달하는 것이다. ……
  다만 우리의 이성은 이 두 결합을 그와 같은 하나의 원리 안에서 합일시킬 수가 없다는 것과, 따라서 판단력은 (사물 자체의 기능의 객관적 원리에 따르는) 규정적 판단력으로서가 아니라, (주관적 근거에서 나오는) 반성적 판단력으로서, 자연에 있어서의 어떤 형식들에 대해서는 자연의 기계적 조직의 원리와는 다른 원리를, 그러한 형식들을 가능케 하는 근거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만이 확실할 뿐이다.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이석윤 역, 박영사, 2017, 263-264, 266쪽)

위 인용문에서 보면 앞서 살펴본 도덕적 판단은 일반적인 법칙에 객체를 포섭하는, 다시 말해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는 판단력은 규정적 판단력이다. 반면 원리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객체를 반성할 때에는 반성적 판단력이 작용한다. 반성적 판단력은 경험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조건적이다.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 두 가지는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반성적 판단력은 미와 추를 결정하는 판단력이다. 반면, 규정적 판단력은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판단력이다. 칸트는 미추판단과 선악판단, 그리고 시비판단이 각각 동일한 범주의 판단력이 아니라는 점을 3대 비판서를 통해 논증했다. 그중에서 인간의 행위와 연관된 미추판단과 선악판단은 결코 둘 중 하나로 포섭될 수 있는 판단력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반성적 판단에 타인이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정치적 판단력이라고 평한다. 정치적 판단은, ‘세상이 망할지라도 정의를 행하라(Fiat iustitia, et pereat mundus)’는 도덕적 판단처럼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도 절대적으로 선악을 규정하기보다는, “다른 모든 사람의 동의를 ‘호소(woo)’하거나 ‘간청(court)’할 뿐”이기 때문이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 140쪽) 아렌트는 칸트의 판단력에서 타인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칸트와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비판적 사고란 자신을 "자유롭고 공개된 검토"를 받게 하는 것이다. 이는 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하면 할수록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러한 대중화의 희망 속에서 칸트가 바랐던 것은 …… 자신의 비판적 검토자 집단을 점차로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계몽의 시대는 "이성의 공적 사용"의 시대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유는 스피노자처럼 철학적 자유(libertas philosophandi)가 아니라 언론과 출판의 자유였다.
  앞으로 보게 될 것이지만 "자유"라는 말은 칸트에게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는 "자신의 이성을 모든 면에서 공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그의 작업 전반에 걸쳐서 분명하고 일관되게 정의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 『칸트 정치철학 강의』, 김선욱 역, 푸른숲, 2000, 86-87쪽)

정치적 판단에서 핵심은 정신의 확장(enlargement of mind)이다. 미추판단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판단은 “우리의 판단을 타인의 실제적 판단이 아닌 가상적 판단과 비교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놓음으로써” 이루어지는 판단이기 때문이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 93쪽) 이를 위해 불편부당성(impartiality)과 소통가능성(communicability)이 중요한 속성으로 대두된다. 먼저 불편부당성은 “타인들의 관점을 고려함으로써 획득된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 92쪽) “우리를 제약”하는 “사적 조건들로부터 우리 자신이 해방될” 때 획득되는 속성이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 140쪽) 그래서 흔히 칸트의 불편부당성은 무관심성(indifference)으로 불린다. 다음으로 소통가능성은 인간이 언어로 의사소통함으로써 인간다움을 드러내는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이다. 타인의 입장을 상상함으로써 느껴지는 이 감각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판단을 인류의 총체적인 이성과 비교하게 된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 137쪽) 불편부당성과 소통가능성을 통해 인간의 판단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도 동의할 만한 ‘타당한’ 판단이 된다.

치양지와 정치적 판단력

도심과 인심의 구분은 불편부당성에 대한 논의와 일맥상통한다. 왕양명은 인위적인 것이 섞였는지 여부에 따라 인심과 도심이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양명은 양지가 사람의 사사로운 생각이 섞이지 않은 도심이라고 설명했다. (전습록Ⅱ, 706쪽, 250조목) 인심은 곧 인욕이므로 사사로운 욕심에 따르는 마음이 도심을 방해한다고 볼 수 있다. (전습록 Ⅰ, 10조목, 109쪽) 이러한 이유에서 왕양명은 생계를 경영하는 것과 거리를 둔다. (전습록 Ⅰ, 56조목, 208쪽) 사심없는 마음이 리에 마땅한 마음이라는 주장은 궤를 같이 한다. (전습록 Ⅰ, 94조목, 262쪽) 판단에서 핵심은 불편부당성이다. 자신의 이익이 결부된 곳에서는 적절한 판단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각종 역사적 판단 사례에 대한 양명의 평가에서는 소통가능성과 연관된 의의를 도출할 수 있다. 진리는 보편타당한 것 이외에 모든 것을 거부하지만, 판단은 일반적인 것, 심지어 모순되더라도 동의 가능한 것을 중시한다. 직분에 걸맞은 사람이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공자의 정명에 대한 해석은, 도덕적 본성을 중심으로 한 맹자의 해석과 사법적 직분을 중심으로 한 순자의 해석으로 양분된다. 왕양명은 그 두 가지 해석을 따르는 대신 제3의 길을 제시한다. 행위에 대한 판단이다. 양명은 괴외와 첩의 사례를 예로 들며 본성이나 직분에 경직되지 않은 주장을 전개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표현은 “여러 신하와 백성들도 반드시 첩이 임금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라는 표현이다. 여기에서 양명은 도리에 맞다거나 법이 그러하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는 대신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전습록 Ⅰ, 43조목, 183-184쪽)

판단력을 중심으로 치양지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왕기와 전덕홍의 논쟁에 대한 왕양명의 논평과 사구교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판단의 본질에 대한 논의와, 훈련시킬 수는 있어도 가르칠 수는 없는 타인의 판단력을 기르는 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315조목
…… 두 사람의 견해는 서로 의뢰하여 사용하는 데 꼭 알맞으니, 각기 한쪽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여기서 사람을 접하는 데는 원래 다음 두 가지 종류의 방법이 있다. 근기가 영리한 사람은 곧바로 본원으로부터 깨우쳐 들어간다. 사람 마음의 본체는 원래 밝고 맑아서 막힘이 없으며, 원래 (정감이) 아직 발현하지 않은 평형상태이다. 근기가 영리한 사람은 단번에 본체를 깨달으니 그것이 바로 공부이며, 타인과 자기, 안과 밖이 한꺼번에 모두 통하게 된다. 그 다음 (근기의) 사람은 습관화된 마음이 있어서 본체가 가려짐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잠시동안 의념상에서 착실하게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도록 가르친다. 공부가 무르익은 뒤에 찌꺼기가 다 제거되었을 때는 본체도 전부 밝아지게 된다. 여중의 견해는 내가 여기서 근기가 영리한 사람을 접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덕홍의 견해는 내가 여기서 그 다음 근기의 사람을 위해 교법을 세운 것이다. 그대들 두 사람이 (상대방의 견해를) 서로 취하여 사용한다면, 보통 사람 이상이나 이하의 사람들을 도로 인도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각자 한쪽만을 고집한다면 눈 앞에서 바로 사람을 그르칠 것이고, 도체에 대해서도 각자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뒤에 말씀하셨다: 이후 벗들과 학문을 강론할 때는 절대로 나의 근본 취지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은 마음의 본체이고,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은 의념의 발동이며,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은 양지이고,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은 격물이다. ……
(왕양명, 『실천적 삶을 위한 지침 전습록 Ⅱ』, 정인재, 한정길 역, 청계, 2007, 808-809쪽)

양지는 시비와 선악, 호오가 한데 어우러진 판단이다. 치양지는 그러한 판단대로 행위하는 것이다. (전습록Ⅱ, 766-767쪽, 288조목) 사안에 따라 판단의 결과가 달라질 것이므로 판단 그 자체에 대한 선악을 논할 수는 없다. 다만 그 판단이 행위로 옮겨지면 행위에 대한 선악을 판단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의 행위에 대해 선악을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은 양지이고, 양지에 따라 행위함으로써 주변의 사물을 바로잡는 것이 공부에 해당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왕양명의 무선무악은 세계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사구교는 공과 허를 주장하며 세계로부터의 후퇴를 권장하는 불교의 무선무악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왕양명은 모든 인간을 차등 없이 사랑하는 묵자의 겸애를 거부하고,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일반적인 인류애를 긍정하는 공자의 인을 옹호한다. (전습록 Ⅰ, 93조목, 259-260쪽) 같은 맥락에서 모든 인간이 동일한 판단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판단력이 적지 않은 수준으로 배양된 사람과 판단력을 결여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교육법은 각자 따로 있게 된다. 평등과 차이의 묘한 조화가 왕양명의 심즉리설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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