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와 양명의 문제의식

유교는 기원전 500년대 공자의 말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다. 사도 바울과 같이 성인의 반열에 오른 해석가는 맹자. 그 외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이 거물급의 해석가가 바로 주자(주희)와 양명(왕수인)이다.

흔히 주자는 성즉리, 양명은 심즉리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쉽게 말해 사람의 본성이 선한데 악한 마음으로 가리워졌으므로 그 본성을 탐구하는 데 힘써야 하느냐(성즉리), 아니면 달리 본성이라 말할 건 없고 모두가 선한 마음을 알고 있는데 그대로 실천하지 않을 뿐이므로 실천에 힘써야 하느냐(심즉리)의 차이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주장에서 ‘규범’과 ‘판단’의 중요성을 본다. 성즉리와 심즉리가 등장한 이유는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가끔 악하다. 선한 것이 세상의 이치(리)라면 악한 것이 일어나기도 하는 이유는 인간의 기운(기)이다. 성즉리는 인간 안에 세상의 이치가 있지만 인간의 기운이 그 이치를 가렸다는 주장이다. 반면 심즉리는 인간의 마음이 세상의 이치와 인간의 기운을 모두 담은 독특한 무언가라는 주장이다. 세상의 이치가 규범이라면, 인간의 마음은 판단으로 기능한다. 인간은 규범을 지키기로 판단하기도, 어기기로 판단하기도 한다. 실수로 규범을 어긴 것이라면 할 말 없지만, 판단에 따라 어긴 것이라면 말할 구석이 있다.

인간이 좋은 앎(양지)을 갖고 있다면 판단이 틀릴 수 없다. 사실 모두가 그러한 앎을 갖고 있으나 그대로 실천하지 않을 뿐이다. 물건을 훔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도둑도 아는 이야기다. 도둑은 알지만 훔친다. 양지의 역할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다. 그러나 규범과 판단의 틀로 주자와 양명을 바라보는 것은 꽤 괜찮은 시도인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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