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 개론

법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을 논할 때 기호학(semiotics)이 꽤나 도움될 듯싶다. 먼저 기호학의 논의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기호: 개념과 역사(Il Segno)』에서 기호학에 관한 개론을 펼친다. 내가 이해한 간단한 도식은 다음과 같다.

기호 현상에 관한 기호학적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해 스토아에서 활발하게 진행됐다. 에코는 로크를 근대 기호학의 아버지로 본다. 사물과 기호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스토아 학파, 오컴, 홉스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진행되어 왔지만, 로크에 이르러 기호학과 논리학의 동일성이 인정되며 기호의 지시적 기능이 필수적인 것만은 아닌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버클리, 흄, 칸트, 퍼스와 후설에 이르기까지 보편소인 개념을 공식화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퍼스는 지각이 삼단 논법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지각은 기호 현상이며 메를로-퐁티는 그러한 현상에 대한 현상학을 진행한 것이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언어에서 파롤(기표, 시니피앙, 말)와 랑그(기의, 시니피에, 뜻)를 구분했다. 예컨대 아프리카 국가 이름인 /가나/를 말할 때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발음하지만 그 발음을 듣는 사람은 <가나>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소리 기호는 스펙트럼처럼 구분되지만 그 기호를 해석하는 사람에게 나타난 뜻은 단일하다. 따라서 언어(기호)가 기표(파롤)와 기의(랑그) 둘 중 하나로는 설명될 수 없으며 오히려 양자의 관계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소쉬르의 주장은 의의가 있다.

퍼스는 기표와 대상이 지시적 관계를 갖는다고 보았다. 반면 프레게는 뜻(기의)과 지시체(대상) 사이가 자의적이라고 보았다. 에코는 대상 자체가 기호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기호와 대상의 관계를 설명한다. 기표와 기의가 작용하는 기호에서 대상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에코는 “[기표와 기의가 유사성을 갖는]유연적인 기호와, 상징 내지는 규약적인 기호를 구반할 수 없다”고 말한다.(93)

Sign elements and modes in semiotics | Download Scientific Diagram
이 도식에서 기호의 세 가지 구분은 퍼스를 따랐다. 책에서는 각각 도상, 지시, 상징으로 번역됐다.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Sign-elements-and-modes-in-semiotics_fig1_351704340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요소들이 각각 대립으로 체계화되며 기표와 기의가 서로 대응할 때 코드(구조)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에코는 “코드는 시니피앙[기표] 체계의 요소들과 시니피에[기의] 체계의 요소들 사이에서 의미적 대응관계를 정립한다”고 설명한다.(123) 자의적으로 보이는 기호 현상을 의미적 구조로 설명하는 새로운 관점은 모든 현상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보며 이론적 모델을 제시하는 구조주의로 응용되었다. 반면 촘스키의 변형 생성 문법은 표면 구조와 심층 구조를 구분하면서, 보편적 구조는 문장성분의 관계가 아니라 의미의 관계인 심층 구조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19) 그러나 옐름슬레우가 지적하듯이, 대치(기표의 변화에 따라 기의가 변화)와 교체(기표의 변화에도 기의가 고정) 현상이 공동체마다 서로 다른 코드를 갖고 있다는 데에서 기인하므로 보편적 구조에 대한 이론은 정립하기 어렵다.

Key Theories of Louis Hjelmslev – Literary Theory and Criticism
옐름슬레우의 대치와 교체를 보여주는 도표. 각각 나무, 목재, 숲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언어에 따라 다른 코드를 갖는다.
https://literariness.org/2018/03/19/key-theories-of-louis-hjelmslev/

옐름슬레우에 이르러서는 기호의 지시적 속성이 제거된다. 기호는 의미 내용과 의미 표현이 합치된 기능일 뿐이라는 것이다. 발신자는 미리 합의된 코드(규칙)에 따라 생각(의미 내용)하고 행동(의미 표현)함으로써 기호를 생성한다. 수신자는 생성된 기호(의미 표현)를 보고 코드에 따라 나름대로 기호를 해석(의미 내용)한다. 생성된 기호와 해석된 기호는 각각 외시와 내포라고 불리며, 기호 현상은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될 때 나타난다. 이러한 도식을 발전시킨 바르트는, 외시가 단지 기표와 기의의 관계인 기호(언어)로 나타나지만, 기호의 내포적 측면에 주목하면 수신자는 해석 과정에서 수많은 기의들을 낳는 가능성 혹은 연쇄에 놓인다고 주장했다. 언어로 시작되는 해석의 연쇄는 신화이다. 언어에는 언어적 코드가 작용하지만, 신화에는 사회적 코드인 이데올로기가 작용한다.

Barthes' Take on Semiotics: | theorisingfilm
이것은 바르트의 도식이지만 옐름슬레우에 따르면 1부터 3까지를 외시, 1부터 Ⅲ까지를 내포로 볼 수 있다.
https://theorisingfilm.wordpress.com/2013/01/26/8/

기호는 연속체로 존재하는 실체를 분절함으로써 의미를 형성한다. 해석소는 하나의 기표에 대응되는 기의를 도출하기 위한 다양한 기의적 요소들을 일컫는다. 여러가지 해석소가 결합되어 기호는 의미를 가지며 다른 기호와 구분된다. 그런데 문제는 해석소들 역시 기호로 표현된다는 점이고, 기호는 여러 가지 기의를 낳기 때문에 문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백과사전은 가능한 한 문맥을 설명하는 상호 참조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에코는 문화를 총체적 의미 체계라고 정의한다.(177) 문화는 그에 속한 사람들이 실체와 코드를 분할하는 방식이다. 문화는 끊임없이 움직이므로 완벽하게 기술할 수 없다. 따라서 문화를 설명하는 백과사전은 완성될 수 없다.(178) 의미의 변화는 내적 재구성과 외적 재구성으로 이루어지는데, 각각 기호학적 판단(분석판단)과 사실적 판단(종합판단)으로 이루어진다. 기호학적 판단은 “하나의 문화 단위에 코드가 허용하는 의미적 속성의 전체 또는 일부분을 부여”하지만 사실적 판단은 “새로운 경험에 기초하여 … 문화 단위에 새로운 의미 성분을 부여”한다.(178-179) 문화는 판단을 통해 변화한다. 따라서 기호학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며 사회적 힘을 구성하는 현상이다. 기호는 인식-지시-반복-생성의 과정을 거쳐 나타난다.

에코는 문화의 탄생 시점을 도구의 탄생과 연관지었다.(202) 기호가 상징, 놀이, 자아형성, 소통의 도구로 사용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에코는 파솔리니를 인용하면서 모든 사물이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호라고 주장한다. 에코에 따르면 해석학에서는 언어를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드러난다.(210) 내가 학부 1학년 2학기 때 접한 보드리야르는 기호학과 사회의 소비문화를 연결지었다. 워프(Benjamin Lee Whorf)는 물리적 현실을 분할하는 방법 예컨대 시간, 공간, 관계와 같은 개념들이 언어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224)

에코는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신실증주의가 과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나 인문학에서는 위험하기까지 했다고 평가한다. 기호의 일의성은 실험실처럼 통제된 환경에서만 가능한 이상일 뿐, 수많은 변수가 상존하는 일상생활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272) 에코는 퍼스를 인용하면서 인간이 곧 언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만 사고할 수 있고 인생은 사고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문화는 기호 체계의 체계이기 때문이다.(277-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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