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 자유란 무엇인가

Arendt, Hannah, “What is Freedom?”, Between Past and Future, The Viking Press, 1961. 143-171.
한나 아렌트, 「자유란 무엇인가?」, 『과거와 미래 사이』, 서유경 역, 푸른숲, 2005, 196-233.

역자가 자의로 문단을 쪼갰다. 아렌트의 문단구성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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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엇이 자유인가 묻는 일은 희망 없는 기획처럼 보인다. [자유는 인과법칙과 경험의 사이의 모순에 놓여 있다.] 2 이런 불투명한 문제에서 우리가 빚진 가장 위대한 설명은, 자유는 우리가 세계를 알고 이해하는 감각에서 확신할 수 있으며 더 이상 내적 감각이나 내적 경험의 장에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칸트의 통찰이다. [자유는 감각세계에서도 내면세계에서도 경험할 수 없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칸트는 감각세계와 사유세계를 구분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3 정치의 문제와 관련하여, 자유의 문제는 중요하며, 이 문제가 철학이 길을 잃은 불투명한 숲에 우리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어떤 정치 이론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는 사유의 영역에서 경험할 수 없다. 철학 전통은 자유를 정치의 영역이 아니라 의지의 영역에서 경험되는 것으로 왜곡했다.] 4 자유가 언제나 문제로서가 아니라 확실히 일상적인 사실로서 알려져 있는 영역은 정치의 영역이었다. [“정치의 존재 이유는 자유이며 그것이 경험되는 장은 행위이다.” (201)] 5 우리가 정치 이론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는 참주를 찬양하는 사람들도 고려하는 이러한 자유는 ‘내면적 자유(inner freedom)’ 즉 사람들이 외적 강압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고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는 내적 공간과는 정반대였다. [내면적 자유는 겉에 드러나지 않고 그 원인은 세계 소외이다.] 6 이러한 내적 자유의, 또는 인간 자유의 전유된 지역이 의식의 내적 영역이라는 이론의 파생적 성격은 그 기원으로 돌아간다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고전적 자유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픽테투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의지한 바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7 역사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에서 자유라는 문제의 등장이, 세계에서 노예가 될 수 있으면서 여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정식에 도달하기 위해, 그러므로 자유의 개념을 정치로부터 결별시키려는 의식적인 시도에 뒤선다는 사실을 꼽는 것은 흥미롭다. [타인에게 행사하는 힘을 통해 삶의 필요에서 벗어난다는 그 고대적 자유 개념에서, 내면적 자유는 방향만 바꾼 개념이다.] 8 그러므로 내적이고 비정치적인 자유의 개념이 사상사에 발휘했던 그 큰 영향에도 불구하고, 만약 세계적으로 만질 수 있는 실재로서 그가 자유의 조건을 처음으로 경험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내적 자유로부터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안전한 듯 보인다. [내면적 자유는 세계에서 말과 행위를 통한 자유의 경험 이후에 알 수 있다. 자유는 해방을 전제하고 타인의 존재 즉 공적 공간을 필요로 한다.] 9 명백히 모든 인간 교제의 형식이나 공동체의 종류가 자유로 특징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사가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자유는 정치와 밀접하다.] 10 그러나 정치와 자유의 일치는 정확히 현재 우리의 정치 경험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없다. [전체주의와 같이 정치가 오히려 자유를 제한하는 현상이 있다. 그럼에도 정치가 정치를 제한하기 때문에 자유가 가능하므로 정치와 자유는 양립 가능하다.] 11 정치로부터의 잠재적인 자유(freedom)라는 이러한 정치적 자유(liberty)의 정의는 우리가 가장 최근 경험한 것으로 재촉되지 않는다. [근대 사회 이후로 자유의 목적은 ‘안전’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남’이었다.] 12 그러므로 자유를 위한 정치를 불신하는 나름의 이유를 갖는 우리뿐만 아니라 근대 전체가 자유와 정치를 분리했다. [정치와 자유를 분리하는 시도는 공적 영역에 대한 불신에 비롯되며 관조를 중시하는 태도와 연관된다.] 13 이러한 전통의 거대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더욱 우리 경험의 긴급성을 말해줌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 정치로부터 자유의 결별이라는 같은 방향으로 압박하는데, 정치의 존재 이유는 자유이고 이 자유는 행위에서 우선적으로 경험된다고 내가 말할 때, 독자는 낡은 정설을 읽었다고 믿을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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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와 연관된 자유는 의지의 현상이 아니다. [정치적 자유는 동기와 목표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므로 의지와 연관되지 않는다. 목표는 행위가 아니라 도덕적 판단에 기반을 둘 때 인식되기 때문이다.] 2 자유로운 한 행위는 지성의 지도 아래에도 의지의 독재 아래에도 놓여 있지 않지만 내가 원리라고 불러야 할 어떤 전적으로 다른 것에서부터 튀어나온다. [행위는 원리로 인해 발생한다. 덕, 탁월함, 명예, 평등과 같은 원리는 지성의 지배를 받지 않고, 목표보다 지속적이고 동기보다 일반적이며, 행위를 통해 소진되지 않고 오히려 명백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자유는 원칙이 실행될 때 세계에 드러난다.] 3 행위에 내재된 자유는 아마도 마키아벨리의, 행운(fortuna)의 외형 안에서 인간 앞에 세계가 연 기회에 응답하는, 능력(virtù) 개념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 [행위의 목적은 수행한다는 그 사실 자체에 있지, 완성된 어떤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술적 기교와 유사하다.] 4 모든 행위는 기교(virtuosity)의 요소를 함축하기 때문에, 그리고 기교는 우리가 공연하는 예술(art)에 돌리는 탁월함이기 때문에, 정치는 주로 기술(art)로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행위의 산물인 정부를 예술작품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예술은 예술행위 이후 독립된 실존을 갖지만 국가는 인간의 지속적인 행위로 실존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5 여기서 요점은 창조의 과정에서 창의적 예술가가 자유로운지 여부가 아니라, 창의적 과정이 공공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세계에 드러나도록 운명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치와 예술은 타인의 현전과 조직된 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 6 그리스적 폴리스의 느낌으로 ‘정치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임의적이지도 억지스럽지도 않다. [정치의 어원인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는 정치를, 기교로서 행위의 자유를 추구하는 정치적 공간을 구성하는 일로 여겼다.] 7 정치적 영역 안의 경험에서 자유의 개념을 끌어들이려는 모든 시도는 이상하고 놀랍게 들린다. 왜냐하면 이 문제들에서 우리의 모든 이론은 자유가 행위보다 의지와 사유로 말미암음이라는 개념에 지배됐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삶의 필연성 아래 놓여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유가 의지와 사유의 산물이라고 오해하게 했다.] 8 그러나 그저 우리는, 모든 이론과 주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유는 정치의 존재 이유”라고 말하는 것은 뻔한 소리에 다름 아니라고 믿는 것처럼, 삶에 대한 우리의 명백히 독보적인 고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기를 멍청한 것이며 심지어 삶에 대한 잔인한 모욕이라고 다시 말해 그 관심사는 모든 선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주장된다고 비난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용기는 중요한 정치적 덕목이라고 우리는 당연히 중요하게 여긴다. [용기는 삶의 필연성에서 해방시켜 공적 영역에 들어서게 하는 덕목이므로 정치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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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백히 자유와 정치의 상호의존성이라는 이 개념은 근대의 사회 이론과 모순된다. [기독교와 근대는 정치와 구별된 사유에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자유는 오히려 정치와 상호의존적이다.] 2 자유의 문제에 대한 역사에서 기독교 전통은 실제로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고전적 고대에 자유는 배타적으로 정치적인 개념이었지만,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폴리스와 갈등 이후와 기독교에서 바울이 ‘나와 나 자신의 배타적이며 내면적인 논쟁’인 정치와 무관한 자유를 발견한 후로 철학적 전통이 형성됐다.] 3 고전적 고대성이 결코 고독의 현상 안에서 경험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고전적 고대성] 그것은 충분히 잘 알았다, 고독한 사람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하나-속의-둘’이라는 것과, 나와 나 자신 사이의 교제는 나와 내 동료 사람들 사이의 교제가 어떤 이유에서든 방해받는 순간에 시작된다는 것을. [고대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velle)와 무의지(nolle)를 동시에 경험하는, 고독(solitude) 속의 사유인 의지함(willing)를 발견했다.] 4 의지가 그 스스로에 갖는 것으로 보이는 마취효과는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그것의 본질은 명백히 명령하거나 복종되는 것이기 때문에. [고대에는 인식과 의지를 구분하는 데 그쳤을 뿐, 의지함 안에서 의지와 가능이 구분된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의지와 의욕이 일치되는 자기통제를 정치적 덕목으로 중시했다.] 5 고대 철학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 사이의 가능한 갈등을 알았다면, [고대 철학] 그것은 확실히 ‘내가-할-수-있다’의 내재적 특성으로 자유의 현상을 이해했거나 아마도 ‘내가-하고-싶다’와 ‘내가-할-수-있다’의 일치로 [자유의 현상] 그것을 정의했을 것이다. [의지함의 이중적 속성을 발견한 소크라테스는 하여금 ‘그것이 옳다고 아는 사람이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6 달리 말해, 의지(will)와 의지력(will-power)과 힘에의 의지(will-to-power)는 우리에게 거의 이상적인 개념들이다; 힘의 자리는 우리에게 사람에게 그 자신과의 교제라고 알려지고 경험된 의지의 능력이다. [의지와 능력이 일치될 때 인간은 필요라는 내면의 한계나 세계로부터 받는 제약들을 극복하고 의지를 실천할 수 있다.] 7 자유 의지에 대한 우리의 현재 개념을 확인할 또 다른 길이 여전히 존재한다, 종교적 곤경으로 탄생하고 철학적 언어로 정식화된, 자유에 대한 낡고 엄격한 정치적 경험에 반하는 [그러한 길]. [몽테스키외는 의지가 행위로 드러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고, 의지가 행위되지 않을 때 즉 의지가 무능할 때 의지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8 나는 자기 절제의 사례를 골랐다, 우리에게 이것은 의지와 의지력의 현상이기 때문에. [기독교적 의지는 정신이 명령하면 육체는 복종한다는 내면적 명령이므로 능력 없는 의지이다.] 9 의지력에 형성된 무능력과 한계를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주로 주위 세계의 관점에서 사람의 무력함을 생각한다. [기독교적 의지는 매번 무력함을 경험했으므로 지배하는 의지로 변화했다.] 10 그게 어찌됐든, 우리가 주로 의지와 의지력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의지하는 자아와 실행하는 자아 사이의 이 갈등에서 자라났다, ‘내가-하고-싶지만-나는-할-수-없다’의 경험에서, 즉 ‘내가-하고-싶다’는, 무엇이 의지되든지, ‘내가-할-수-있다’는 자아의 지배 아래 남아 있거나, 그 뒤를 치거나, 그것을 추동하거나, 그것을 더 자극하거나, 그것에 의해 파괴되어버리는 [그 경험]. [무능한 의지력은 힘을 추구하므로 잔혹한 전제정의 원인이 된다.] 11 나는 말해왔다, 철학자들은 자유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고, 자유가 더 이상 행위와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서 경험되지 않지만 의지와 그 자신과의 교제에서 경험될 때, 요컨대 자유가 자유 의지가 되어버렸을 때. [의지가 행위 영역이 아니라 사유 영역에서 이해됨으로 인해 주권(sovereignty) 개념이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루소가 그러한 주장을 했는데, 루소의 개인주의 이론은 ‘주권자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반박된다. 모든 정치적 행위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해 시민들이 법의 형태로 형성하고 준수하는 약속 안에서 수행된다.] 12 명백히 그러한 말들은 장 자크 루소의 정치 철학에서 메아리친다, 주권 이론의 가장 일관된 대표자로 남아 있던 [장 자크 루소], 그가 자유 의지로부터 끌어 왔기 때문에 개인 의지력의 엄격한 이미지로 정치적 권력을 이해할 수 있었던 [주권 이론]. [그러나 루소는 자유와 주권을 동일시했다.] 13 정치적으로, 자유와 주권의 이러한 동일화는 아마도 자유와 자유 의지의 철학적 등식이라는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결과이다. [비주권자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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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의 이 모든 문제가 한 편으로 기독교 전통의 지평에서 그리고 다른 한 편 근원적으로 반정치적 철학 전통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의 문제] 이것을 의지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행함(doing)과 행위함(acting)의 부산물인 자유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기 어려웠다. [자유와 행위가 상호의존한다는 것은 기독교적-반정치적 철학 전통에서 알기 어려웠다.] 2 그러나, 우리가 전에 이야기했지만 여기서 논의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이 설명은 철학자들의 글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스어의 archein(시작하다, 이끌다, 지배하다)과 pratein(완수하다), 라틴어의 agere(앞으로 가다)와 gerere(운반하다)는 모두 각각 시작과 완수를 의미한다. 그리스에서 삶의 필요로부터 자유로운 지배자가 시작하면 그 행위는 타인과 함께 완수됐다.] 3 라틴어에서 자유롭다는 것과 시작한다는 것은 역시 서로 연결됐지만 좀 다른 방식이었다. [로마에서도 자유로운 선조들이 도시를 건설해 역사를 시작했고 후손들이 그 건국을 증대시켰다.] 4 나는 이미 정확히 그 배타적인 정치적 기원 때문에 자유의 고대 개념이 그리스 철학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자유는 내적 성향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세계에 드러나는 행위였다. 특히 인간의 탄생은 세상의 시작을 재확인하는 사건이며 그렇기에 인간은 자유롭다.] 5 초기 기독교의 그 강력한 반정치적 경향은 너무 친숙해서 자유의 고대 정치적 관념의 철학적 암시를 처음으로 정식화해온 기독교 사상가의 개념은 거의 역설적으로 우리를 친다. [기독교 전통의 아우구스투스가 자유의 본질을 발견한 것은 로마의 정치경험 덕이었으며, 성서에도 자연적 과정을 중단하는 자유의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에 가능했다.] 6 단언컨대 지구 위에 놓인 인간의 삶은 지구의 자연적 과정 즉 차례로 우주적 과정에 둘러싸인 자동적 과정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우리도 유기적 자연의 일부인 한에서 우리 스스로는 비슷한 힘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인간사는 과정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자동성과 역사적 필연성을 갖게 된다.] 7 화석화의 시대와 예정된 운명에서 주로 살아남는 것은 자유의 능력 그 자체 즉, 모든 인간의 활동을 움직이게 하고 영감을 주며 모든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생산하는 숨겨진 근원인 시작하는 능력이다. [자유는 인간의 활동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실재성을 가질 때, 즉 행위가 정치적 공간을 창조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8 행위자가 아니라 과정의 관점 즉 행위가 일어나는 구조 안에서 그리고 행위가 방해하는 자동화 안에서 보이는, 모든 행위는 기적 즉 기대될 수 없는 무언가이다. [새로운 시작은 무한한 비가망성(infinite improbability)을 비집고 세계 속에 등장하는 것이다. 행위를 과정으로 볼 때 그 자동성을 중심으로 보면 유기체적 생명의 시작이나 인간의 진화는 인간사의 영역에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기적이다.] 9 나는 어떤 무한한 불가능성의 도래에 의해 방해되는 자연적 과정의 예시를 들었다, 우리가 평범한 경험에서 실재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소설보다 더 이상한 우연을 뚫고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은 시작(initium) 그 자체이므로 인간의 주도(initiative)로 발생하는 역사적 사건은 자연적 과정과는 다르게 언제나 기적적이다.] 10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바깥에 드러나고 사람이 시작이나 시작하는 자라고 고려하지 않을 때, 내일이 어제 같을 것이라는 기대는 압도적이다. [역사적 사건을 도외시한다면 무한한 비가망성은 세계의 영구성을 전복시킬 것이다.]


견해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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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political business is, and always has been, transacted within an elaborate framework of ties and bonds for the future─such as law and constitutions, treaties and alliances─all of which derive in the last instance from the faculty to promise and to keep promises in the face of the essential uncertainties of the future.” (164)
[모든 정치적 사안은 언제나 미래를 위한 결속과 유대의 정교한 제도 안에서 수행되고, 그렇게 되어왔다. 마치 법과 헌법, 조약과 동맹이 그러한 것처럼. 그 모든 결속과 유대는, 미래의 본질적 불확실성을 맞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사건에서 비롯된다.] 서유경 선생님 번역 잘못. “정교한 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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