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엔느 질송,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이해』, 김태규 역, 누멘, 2018.
제2부 제1장 「지혜」부터 제2장 「도덕적 행동의 요소」까지.
Étienne Gilson, Introduction à l’étude de saint Augustin, Librairie Philosophique J. Vrin, 1949.
아우구스티누스의 지혜 개념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관
인식의 목적은 행복이다. 철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피하고 선을 택하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려준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므로 지혜는 행복에 이르는 수단이다.
인간은 동물과 동일한 외면적 자아인 육체와 신적 개념을 직관하는 내면적 자아인 정신을 갖는다. 인간은 동일한 정신 안에 둘(duo in mente una)로 있다. 정신의 기능은 육체를 위한 활동적 삶으로 기능하는 열등한 이성과 정신 그 자체를 위해 관조적 삶으로 기능하는 우월한 이성으로 나뉜다. 단일한 정신은 두 정체성 사이에서 결단해야 한다.
두 가지 삶: 활동과 관조
지상의 활동적 삶은 관조적 삶을 위해 존재하지만 인간은 탐욕(cupiditas)으로 인해 활동적 삶에 집착한다. 이때 인간은 신을 거부하고 멀어져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교만을 범한다. 물질적 감각에 대한 기억들이 지식이다. 반면 보편적이고 영원한 신적인 관념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겸손이다. 지식은 지혜를 추구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 인간의 고유성을 발현하는 것이 지혜이므로 타락할 수 없다. 그러나 지식과 지혜는 동일한 원천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정신의 삶은 일곱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사물세계에서 점차 멀어져 신과 가까워진다. 정신의 삶은 신과 죽음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지식이 믿음과 합쳐질 때 지혜가 된다. 지혜를 향한 앎의 욕구는 신이라는 원리와 실천이라는 결과와 함께 있는 호기심이므로, 단순한 지식적 호기심과 다르다. 정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 때 인간은 인간의 제도가 신적 제도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만물의 최초 원리인 신을 발견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도덕 개념
덕의 규칙, 질서의 법
인식과 실천의 관계. 사물의 본질을 아는 것과 행동의 규칙을 아는 것은 같다. 지혜는 보편적이고 공통적이며 영원한 최고의 선이다. 수와 지혜는 묵상(관조)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수의 질서는 육체를 주관하지만 그 본질은 행동의 질서와 같다. 자연적 조명으로 수의 인식이 가능하고, 도덕적 조명으로 행동의 지혜가 가능하기 때문에 신은 두 조명의 단일한 원천이다. 자연적 조명은 타고난 인식이며, 신적 조명은 도덕적 의식(양심, conscientia, συνείδησις)이다.
도덕적 의식은 인간에게 행동의 필연성을 제시한다. 존재, 인식, 행동은 그 질서가 모두 같다. 성경에서 지혜는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도달하여 사물들을 질서지우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이 두 질서에서 판단의 필연성을 얻으니 이것을 영원한 법칙, 즉 자연법이라 부른다. 자연법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완전히 질서지우기를 요구한다. 질서는 우월한 것에 열등한 것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인간의 법 체계는 신적 질서인 자연법에 예속된다.
신은 조명을 통해 인간에게 명령하지 않고, 자연법을 실천할 방법을 제공한다. 그 방법들이 곧 덕이다. 덕은 신이 인간의 영혼에게 준 생명이다. 육체에 대한 집착인 악덕은 의지에서 나온다. 절제, 분별, 정의, 인내의 네 가지 덕은 육체와 영혼의 종합체인 인간이 신의 인식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이다.
의지와 사랑
자연은 법칙에 종속되어 있어 필연성이 작동한다. 그러나 인간은 법칙을 실현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법칙을 원하고 따르기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의지는 곧 인간이다. 의지는 탐욕, 기쁨, 슬픔, 두려움의 네 감정을 유발한다. 의지는 무언가를 얻거나 보존하려는 자유로운 움직임이다. 의지는 감각 작용을 가능케 해 감정을 유발한다. 의지는 정신이 대상에 접촉하도록 하고, 대상이 사라진 뒤에도 기억하도록 한다. 의지는 곧 감각 자료들로 상상 세계를 구성하도록 하는 상상력이다. 앎에 대한 의지는 탐구이며, 탐구는 인식을 가능케 한다. 이때 인식은 그 대상의 등급에 상관없이 즉 지식이든 지혜이든 구분하지 않고 작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에서 무게에 따라 불-공기-물-흙의 위치가 정해지는 것처럼, 사랑은 의지를 추동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위치를 결정하도록 한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이다(pondus meum amor meus).” 그러므로 도덕은 사랑의 대상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다. 사랑은 의지를 결정하고, 의지는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평가는 행동에 따른 결과에 대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느냐에 대해 이루어져야 한다. 악행은 왜곡된 사랑이므로 질서를 파괴한다. 질서를 유지하는 사랑은 최상의 선에 대한 사랑이므로 애덕(caritas)이다.
애덕
애덕은 사랑해야 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그 대상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신을 사랑한다면 신이 추구하는 선(善)을 원하는 것이다. 사랑이 의지를 움직이는 목적은 이웃 사랑과 신 사랑 두 가지 사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웃 사랑에서 나의 선은 타인의 선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타인과 완전히 동일해지고 이때 나는 타인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된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동일하고, 동등하다(opta aequalem).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 신에게 종속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서로 주고 받는 상호성이다. 상호성이 없다면 관계는 끊어진다. 사랑은 서로 다른 둘을 연결해 하나로 만든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으면 분열이 없다.
신 사랑은 이웃 사랑과 다르다. 인간은 여러 선 중 하나의 선이지만, 신은 선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할 때에는 적도(適度, modus)를 지켜야 하므로 나를 희생할 수 없지만, 신을 사랑할 때에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신에게 남김없이 내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신이라는 최고의 선을 소유할 수 있으며, 이때 이 사랑을 애덕이라 부른다. 애덕은 도덕적 삶 자체이며, 신 사랑이 영혼을 모두 점유하고 있으므로 어떻게 의지하더라도 모두 선하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dilige, et quod vis fac).” (In Epist) 그러므로 애덕은 인간의 덕을 완성시킨다. “신은 사랑이다(Deus caritas est).” (1 Joan)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애덕은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신이라는 사랑의 실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동시에 신을 사랑하는 영혼의 활동을 의미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