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용과 의미 그리고 목적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51 도구성과 제작하는 인간Instrumentality and Homo Faber에서 효용과 의미를 통해 목적을 구분한다. 우리는 흔히 ‘저것을 위해 이것을 한다’고 할 때, 저것을 목적으로 이것을 수단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수단 관계가 언제나 같은 상황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경우는 빚을 갚기 위해 금전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이때 화자는 채무가 탕감되기를 기대하며 채권자에게 금전을 제공한다. 제공된 금액이 채무액을 달성하는 경우 상환은 곧바로 중단된다.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목적이 달성된 이후에 제공되는 수단은 아무런 효용을 산출하지 않는다. 이때 ‘빚을 갚는 일’의 목적을 생각해볼 수 있다. ‘더 많은 돈을 모으기’, ‘부담감 떨쳐내기’ 따위의 또 다른 ‘목적’들이 곧바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목적들의 목적을 또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연쇄적 목적-수단 관계 속에 놓인 목적을 아렌트는 효용적 목적”in order to”으로 설명한다.

둘째 경우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안개꽃을 준비한 경우이다. “당신을 위해 이 꽃을 준비했어”라고 할 때, 물론 사람에 따라 매우 달라지겠지만, 대체로 화자는 청자로부터 어떤 효용도 바라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당신을 위해 이 꽃을 준비했어”라는 말은, “이 꽃을 받고 당신이 내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어”라거나 “이 선물이 우리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무형적 자본이 됐으면 좋겠어”라는 말로 대체되지 않는다. 만약 대체된다고 생각된다면, ‘상대가 기뻐하는 순간 꽃 주기를 멈출 것인가?’ 하는 질문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효용적 목적에 따른 목적-수단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목적이 달성됐다고 하더라도 행위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목적들은 그 목적들의 목적을 떠올리기 어렵다. ‘왜 사랑하는가?’하고 물을 때 ‘행복하기 위해’와 같은 원론적인 답변이나 ‘사랑하니까’처럼 중언부언할 수밖에 없다. 그 목적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내게 의미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수단 관계를 아렌트는 의미적 목적”for the sake of”으로 설명한다.

아렌트는, 흔히 공리주의자로 대표되는, 제작하는 인간Homo Faber이 세상만사를 효용적 목적의 틀로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제작하는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상적인 모델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활동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세계 속에서 ‘저것이 무엇인지’ 혹은 ‘어떤 행위를 할지 말지’에 대해 판단할 때, 얼마나 많은 효용을 산출하는지, 즉 ‘이것이 내게 유익한가?Is it useful for me?’를 유일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목적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인해 무의미함에 빠지게 된다. 목적-수단 관계의 연쇄고리는 끝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작하는 인간은 가장 이상적인 목적으로 의미적 목적을 추구한다. 그 자체 목적이 되는 의미적 목적만이 목적-수단 관계의 무한소급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HC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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