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ndt, Hannah, “On Violence”, Crises of the Republic, Harvest Book, 1972, 103-198.
한나 아렌트, 「폭력론」, 『공화국의 위기』, 김선욱 역, 한길사, 2011, 149-266.
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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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권력의 문제]
폭력은 언제나 수단을 필요로 하므로 목적-수단 관계를 세계를 적용한다. 인간사에서 폭력의 특징은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압도한다는 점이다. 아직도 국제사회에서 폭력은 문제를 해결하는 최후의 수단이며 다른 대체물을 찾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사회과학자들은 여러 가설을 바탕으로 이론을 제안함으로써 생각을 대신한다. 그들의 이론은 어떤 사태(event)도 발생하지 않는 일상적 세계에만 적용될 수 있으며, 이러한 접근 방식은 상식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이러한 이론은 권력과 폭력 사이의 관계에 적용할 수 없다. 무기의 발전으로 폭력이 권력을 전도하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구 제도의 모순이 스스로 멸망한다’는 새로운 혁명사상이 등장했다. 신좌파는 폭력을 예찬하는데 이러한 사상은 그들이 바탕을 둔 헤겔-마르크스의 비폭력적 사유-노동의 개념과 모순된다. 신좌파가 폭력을 예찬하는 원인은, 기술의 진보가 폭력을 증대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세계가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력을 당한 자가 폭력을 꿈꾼다’는 제3세계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하며 마르크스를 왜곡한다. 나아가 신좌파는 폭동을 도덕적으로 옹호하며 마르크스의 지도자 개념과도 모순된다. 이러한 이론과 현실의 불일치는 마르크스에 내재한 ‘진보적 역사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폭력적 본질로 인해 진보할 수록 세계를 파괴하는 과학기술을 고려할 때, 진보는 미신에 불과하다. 폭력은 행동(behavior)이 아니라 행위(action)를 통해서만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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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권력에 대한 전통적 해석]
플라톤 이래로 권력은 폭력과 동일시되어 왔다.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 철학에서 신-인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명령-복종 관계로 권력을 해석하는 전통을 낳았다. 16세기 장 보댕, 17세기 홉스, 근대 관료제에 이르기까지 권력은 타인의 의지를 지배하는 강제력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평등체제(isonomia)를, 로마는 도시(civitas)를 살펴보면 권력이 명령-복종 관계가 아니라 법에 대한 지지로 이해됐음을 알 수 있다. 고대에서 “법에 대한 복종”이라는 표현은 “시민들이 동의한 법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지지: 진정한 권력]
통치자의 통치 행위를 지지함으로써 인민은 통치자를 지배한다. 물질화(materializations)된 권력은 정부 기관으로 나타난다. 지지가 권력의 원천이라는 사실은 민주주의부터 군주제까지 모든 정체를 아우른다. 정부 권력은 “의견의 강성(strength)”이며, 의견의 수에 비례한다. 독재는 “최고로 폭력적”이면서 “최소로 권력적”이다. 폭력은 도구에 의존하기 때문에 수적 우위를 요구하는 권력과 달리 소수의 통치가 가능하다. 따라서 권력은 폭력이 아니다. 권력이 사라진 공동체는 붕괴된다.
[용어의 구분]
공적 문제가 지배의 문제로 오독되어 정치적 힘에 관한 용어가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권력(power)은 공동의 행위(act in concert)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권력은 사람들이 모여 공동의 행위를 하는 그 순간 그곳에서 생성되며 이후에는 별다른 행위를 하지 않아도 권력이 계속해서 생성된다. 강성(strength)은 개별적 존재자에 내재된 속성으로서 다수의 힘에 압도될 수 있다. 강제력(force)은 폭력과 유사하게 쓰이지만 비인격적이라는 점에서 폭력과 다르다. 권위(authority)는 사람들이 의문시하지 않고 따르는 경우의 힘이며, 강제나 설득이 필요하지 않다. 권위에는 존경이 요구되며 경멸은 권위를 훼손한다. 제도화된 권력은 권위의 형태로 나타난다. 폭력(violence)은 도구적 본성을 지니며 강성을 증폭시키는 힘이다.
[권력과 폭력 비교]
폭력은 명령-복종 관계를 전제한다. 폭력을 수행하는 존재자가 인간인 한 폭력은 권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전체주의나 노예제 사회에서도 권력이 작용했다. 인간사의 영역에서는 권력이 필요충분조건이며, 정부를 구성하는 본질로서 정당화가 불필요하다. 반면, 폭력은 도구적이므로 정당화가 필요하다. 권력은 평화[비폭력]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목적-수단 범주의 사고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되므로 폭력의 조건이 된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하지만 권력을 다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권력이 사라지면 폭력은 권력을 대체하는데, 폭력은 사회 안의 모든 권력을 파괴하므로 결국 사회가 유지되지 못한다. 이때 사회 지배를 지속하기 위해 정부의 형태는 테러라는 전체주의적 형태를 갖는다. 전체주의의 테러는 모든 권력을 거부하고 사회를 원자화한다. 유의할 점은 이러한 구분이 ‘폭력이 곧 악’이라는 주장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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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이데올로기, 참여민주주의]
생물학 및 동물학적 접근으로 폭력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폭력을 비합리적이고 짐승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그릇된 전제를 바탕으로 수행된다. 분노에 따른 폭력이 비합리적이고 병적으로 나타나기는 하나, 그 분노가 발생하는 원인은 오히려 정치적 행위나 정의감과 연관되어 있다. “오직 조건들이 바뀔 수 있지만 바뀌지 않는다고 의심 살 만한 곳에서 분노는 일어”나기 때문이다. 폭력은 이 불균형을 조정하기 위해 반정치적으로 나타난다. 분노의 원인은 위선(hypocrisy)에서 발생하는데, 위선은 세계를 은폐하는 속성을 갖는다. 세계를 드러내야 할 말이 사람들 앞에서는 합리적인 듯 꾸미며 뒤에서는 오히려 세계를 은폐할 때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과 폭력을 생물학적 이론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폭력에서 정치적 함의를 이끌어내려는 시도 아래 폭력과 동일시된 권력은 무한한 팽창을 추구하고, 인종주의와 같은 사이비과학적 이데올로기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행위는 예측불가능한 본질을 가지므로, 폭력이 가진 합리성은 단기적 목표만을 추구할 때 유의미하다. 행동이 행위를 대체할 수록 폭력에 대한 유혹은 강렬해진다. 탄생성에 따라 신참자로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행위는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만든다. 창조성은 삶의 과정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폭력이 행위를 대체할 수 없다. 권력의 중앙화가 아닌 동료 시민의 참여가 민주주의의 대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