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ndt, Hannah, Responsibility and Judgment, ed. Jerome Kohn, New York: Schocken Books, 2005.
한나 아렌트, 제롬 콘 편, 서유경 역, 『책임과 판단』, 필로소픽, 2019.
저자 정보 및 소개
제롬 콘. 아렌트 문학 신탁의 수탁자. 뉴스쿨대학 대학원 교수, 아렌트 센터 소장. 아렌트 생전 헌신적인 조교였음. 아렌트 사후 Essays In Understanding, Responsibility and Judgment, The Promise Of Politics, and The Jewish Writings, Thinking Without Bannisters 등을 출간함.

서유경.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과 현대 정치적 함의: 정치행위와 인간실존의 역학>으로 박사학위 취득. <과거와 미래 사이>,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번역함.
내용 요약
아렌트 사망 전 10년 간 작성한 강연 원고와 강의, 논문들 중 아렌트 사후 미출간된 것들을 엮음.
문건 보충설명 (50-58).
- 서언: 1975년 덴마크 정부 소닝상 수락연설.
- 도덕철학에 관한 몇 가지 질문(127-276): 1965-1966년 “도덕철학에 관한 몇 가지 질문”(뉴스쿨대학교), “도덕의 기본명제들”(시카고대학교) 강좌.
- 독재 치하에서 개인적 책임(83-126): 1964년 <리스너>지 게재. 정치적 책임과 개인적 책임 구분.
- 집합적 책임(277-292): 1968년.
- 자업자득: 1975년 강의(또는 연설) 준비 원고.
- 나머지 에세이는 미국 사회 내 현안문제에 관한 에세이.
도덕적 자아와 정치적 세계는 얽혀있다. (옮긴이의 말)
? 1930년대 정체성의 상실과 비본래적 자아(non-authentic being a self)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지력이 달려서 이해하지 못함. 맑은 정신으로 다시 읽어볼 것. (서언)
1장 독재 치하에서의 개인적 책임 (1964)
나치의 전체주의는 도덕적 전통 규범이 모두 전도되어 합법적 범죄가 발생하는 관료제 시스템였다. 나치 부역자들은 그 시스템 아래 한낱 톱니(cog)였다고 주장하며 법적 책임을 면하려고 하지만, 복종은 지지를 의미하므로 오히려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치에 가담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반면, 비참여(nonparticipation)를 통해 (부역자들의 시각에서는) ‘무책임하게’ 사적 삶으로 도피한 자들은 mores set(도덕 규범)가 무너진 상황에서 판단을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양심을 지켰다. 판단은 모든 행위마다 행위자가 입법자로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능력이다.
2장 도덕철학에 관한 몇 가지 질문 (1965-1966)
나치 전범의 재판은 도덕성과 합법성이 충돌하는 경우,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합법성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지는 이성에 ‘자동적으로’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칸트가 제시한 도덕법칙은 현실세계에 적용되지 않는다. 법과 도덕규범은 전체주의의 기획 아래 너무나 쉽게 무너지므로, 행위를 이끄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양심이 그 대안이 되는데, 양심은 자아와 자의식 사이의 대화인 사유이다. 사유는 하나 안의 둘로서 인간이 하는 대화이므로 인간 복수성의 최초 근원이며 행위의 단초가 된다. 단, 사유는 행위를 바로 이끌지 못하는데, 그 대안으로 행위의 모델을 제시하는 판단이 작동한다.
3장 집합적 책임 (1968)
5장 리틀록 사건에 관한 성찰 (1959)
견해와 인용
[도덕철학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이 가장 많은 분량 차지. 아렌트는 정치와 도덕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민한 듯하다.]
서언 (1975)
“나는 실제로 어느 누구라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듯이 스스로에게 드러날 수가 없으므로 그 누구도 자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 법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 때문에 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겸손의 태도를 기꺼이 수용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오직 가엾은 나르키소스만이 자신의 반사 이미지로 인해 착각에 빠질 것이며, 어떤 신기루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여위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라도 자기 일에 대해서는 심판관이 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에 직면하여 기꺼이 겸손의 태도를 수용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한 사람의 신실한 기독교 신자라도 된 듯이 “내가 감히 누구를 심판한단 말인가?”라고 말하면서 나의 판단 능력을 통째로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서언, 1975, 70)
[who-ness 누구됨과 humility 겸손의 태도]
“‘사람 person’이라는 말의 어원[…] 라틴어 ‘페르소나 persona’에서 거의 변형되지 않고 아무런 이의 없이 유럽어 속에 수용되었습니다. […] ‘~을 통해 소리를 내다’라는 뜻의 per-sonare라는 단어는 가면을 뜻하는 명사 persona의 동사형입니다. […] 로마법에서 persona는 시민적 권리를 소유한 사람을 의미했고, 이 단어는 어떠한 특수 자질이나 독보성도 가지지 못한, 어떤 동물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한낱 인간종의 구성원일 뿐인 homo라는 단어의 뜻과 구별되어 사용되었지요. […] 세계가 우리에게 할당한, 그리고 우리가 세계극 속에서 무언가를 맡고자 한다면 반드시 수용해야 하며 심지어 획득해야 할 가면들이나 역할들은 교환 가능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거행되는 공적인 행사의 목적에 들어맞는 ‘공적인 인물’로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인정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띠든 간에 우리를 이러저러한 사람으로서, 이를테면 근본적인 의미로는 우리 자신이 아닌 어떤 것으로서만 인식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서언, 1975, 77-80)
[공적 영역에서 인정은 what-ness 무엇됨에만 주어진다. this-ness 개성(이것됨)은 who-ness 누구됨과 동등하게 사용된다.]
1장 독재 치하에서의 개인적 책임 (1964)
“우리가 감정이나 자기 이익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기능이 작동되는, 다시 말해 특수한 사례들이 그 밑으로 간단히 복속되는 기준이나 규칙에 묶이지 않은 채로 기능을 수행하면서 판단 활동 그 자체를 통해 그것만의 원칙들을 창출하는 어떤 인간의 능력이 현존한다고 가정할 경우에만, 우리가 확고한 [판단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이 매우 미끄러운 도덕적 지반 위에 [스스로] 발을 내딛는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된 것이라 하겠다.” (97)
[기존의 도덕적 규범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맥락에서, 판단이 작동하는 조건]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내가 톱니처럼 속해 있는 그 시스템이 한 일”이라는 대답에 대해 법정은 즉각 다음 질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당신이 톱니가 되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왜 계속 톱니로 있었는지 말해주시겠습니까?”” (104)
[전체주의적 관료제에서 전범은 비자발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전체주의적 관료제 ‘안에’ 들어가 있는 것 역시 자발적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옳고 그름의 판단을 위한 하나의 법적 기준으로 채택된 비참여(nonparticipation)는 상당한 문제들을 제기했는데 특히 책임의 문제와 관련해서 그러했다. 그 문제의 간단한 진실은 공적인 삶에서 완전히 물러난 사람들만이, 즉 어떤 유형의 정치적 책임도 거부한 사람들만이 범죄에 휩쓸려 함께 돌아가는 것을 피할 수 있으므로 법적 그리고 도덕적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논리인 셈이다.” (107)
“이제 그들 각각은 자신이 과거 어디에 서 있었고 무슨 일을 했었는가와 상관없이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고 사적인 삶으로 퇴각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쉽고 무책임한 방식으로 발을 빼는 선택을 했다고 주장한다.” (109)
[독재 치하에서는 모든 공적 삶이 비도덕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공적 삶으로부터 물러나 사적 삶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양심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용어들을 사용할 경우 독재 치하의 공적인 삶에 비참여한 자들은 복종이라는 이름으로 지지가 요구되는 자리 즉 ‘책임’지는 자리를 피함으로써 지지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다.” (125)
“그러나 그 비참여자들의 기준은 내가 보기에 이런 것과는 다른 기준이다. 예컨대 그들은 특정의 처신을 한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과 어느 정도로 평화로운 상태로 남을 수 있을지를 물어보았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결정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세계가 더 나아지리라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조건에서만 자신과 더불어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또한 참여를 강요당하면 죽음을 택했다. 약간 투박하게 표현하자면 그들은 살인을 거부했는데,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여전히 굳게 신봉해서라기보다는 살인자들─살인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을 경우에 자신들에게 따라붙게 될 오명─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120-121)
[비참여자들은 지지하지 않은 자들, 양심을 지킨 자들이다.]
“히틀러 정권의 경우 국가 기구 전체가, 온건한 표현을 쓰더라도 통상 범죄활동으로 간주되는 것을 집행했다. 보편적 기준에 따른다면 그 정권에서 범죄가 아닌 국가의 통치 행위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더 이상 범죄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법규에 대한 하나의 예외로서 ─예컨대 무솔리니 치하 이탈리아에서의 마테오티 살해나 나폴레옹의 앙갱 공작 암살처럼─ 집권당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 복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간헐적인 비범죄적 행위들 ─예컨대 히믈러의 인종 말살 계획 중지 명령─ 이야말로 나치 독일의 ‘법’에 대한 예외, 즉 절실한 필요가 얻어낸 양보 사례였던 셈이다.” (113-114)
[전체주의 상황에서 합법성과 비합법성이 전도된 상황. 완전한 범죄로서 합법성.]
“그러므로 인간 본성에 대한 차라리 낙관적인 견해는 예루살렘 재판의 판사들은 물론 모든 전후 재판의 판결문들이 명확히 기술하는 바, 즉 법과 여론의 후원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인간의 능력, 즉 최대한 자발적으로 모든 행위와 의도를 매번 새롭게 판단하는 능력을 전제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우리들 각자는 그게 누구든 행동에 돌입할 때마다 입법자가 되는 것이다.” (116)
[인간이 보편적으로 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가정할 때, 모든 행동마다 그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나름의 기준대로 판단한다.]
“우리는 도덕적 규칙과 기준이 하룻저녁에 바뀔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에 단단히 매달리는 우리의 하찮은 습관뿐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럴 경우에 훨씬 믿음이 가는 쪽은 의심을 품은 자와 회의를 품은 자들이다. 이는 회의주의가 좋은 것이라거나 의심하는 일이 유익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대상을 검토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최고는 이 한 가지만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다. 즉 무슨 일이 발생하든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한다는 사실 말이다.” (122)
[도덕, 법이 전체주의 정권에 의해 지속성을 상실하면, 인간의 판단 능력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다. 세계의 지속성을 세계의 실재에 대한 믿음이라고 읽는 경우, 판단 능력이 세계의 지속성을 보장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3권 자발성과 비자발성 부분과 비교해서 보면 흥미로운 논점이 발견될 것 같다.]
2장 도덕철학에 관한 몇 가지 질문 (1965-1966)
“실제로 나치 정권은 새로운 가치 세트를 발표했고 그것에 부응하여 고안된 법체계를 도입했다. […] 결과론적으로 말해서, 도덕은 범죄자가 아닌 일반인들과 관련해서 논의되는 하나의 모레스 세트 —즉 의지만 있다면 바뀔 수 있는 예의범절, 관습, 관례—로 주저앉아 버렸다.” (133-134)
[전체주의 정권 치하에서 도덕 규범과 법은 정권의 기호에 따라 바뀐다.]
“사법제도의 부인할 수 없는 위대성은 그것이 개별적인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야만 한다는 데 있다. […] 현대 사회에서 습관적으로 또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책임 전가는 당신이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 즉각 중지된다.” (138-139)
[개인에게 집중하는 사법제도의 특징은 책임 전가를 중단시킨다.]
“앞서 언급한 그 시스템 전체에 대한 모종의 적합한 반응으로서 그 언어도단의 공포는 우리가 기소, 변호, 판결이라는 순차적 담론 과정을 통해 개인들을 다루게 되는 법정 안에서 해소된다. 이러한 법정 절차가 도덕적 질문들에 구체적인 방식으로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이유—그것은 일반적인 범죄자들에 대한 재판 때와는 다르다—는 명백하다. 그 사람들은 평범한 범죄자들이 아니라, 지시받은 대로 행동에 옮긴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거의 열성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다.” (140)
[여기서 언어도단의 공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사유하기를 거부한 일”(136). 법적 담론 과정은 개인의 사유를 ‘강제’함으로써 책임 전가를 중단시킨다.]
“본래 양심(conscience)은 모든 언어에서 옳고 그름을 알고 판단하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의식(consciousness)이라고 부르는 것, 즉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알고 또 자각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 자기경멸이나 자기모순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바로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도덕 명제는 자명한 것이므로 그것에 의무 개념을 더할 필요는 없다. […] 바꿔 말하면 그들은 어떤 의무를 느낀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자명한 것이 아니었지만 자신들에게만큼은 자명한 무언가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양심—바로 그것이 양심 그것이었다면—은 어떠한 의무적 성격도 띠지 않았으며, ‘내가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보다는 ‘나는 이것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168-169)
[나치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자기 자신과의 무모순율’이라는 양심의 작동 방식을 살펴봄]
“내가 사유하고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의 대화 상대이듯이, 내가 행동하고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의 목격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행위자를 알고 있으며 그와 함께 살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그 행위자는 침묵하지 않는다.” (188-189)
“모든 사람은 ‘하나 속 둘(two-in-one)’인데, 이는 의식과 자의식(내가 무엇을 하든 나는 동시에 그렇게 하고 있는 나를 어떤 식으로든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의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무성의 대화, 즉 지속적으로 자신과 교제하며 대화 관계에 놓인다는 의미로도 그러하다.” (192)
“사유 과정에 관한 소크라테스-플라톤적 설명이 내게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비록 지나가는 말투로 언급되고는 있지만 사람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한다는 사실 요컨대 단 한 사람(Man)이 아니라 여러 사람(men)이 지구상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떄문이다. 비록 우리가 다만 혼자서 존재할지라도 우리가 이 ‘홀로 있음’을 말로 명료하게 표현하거나 실현할 때 우리가 동석 상태임을, 즉 우리 자신과 동석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된다.”
[양심과 사유, 인간의 복수성을 연결함]
“이 ‘나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기’는 의식 그 이상이고,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떤 상태에 있든 내게 수반되는 자각 그 이상이다. 나 자신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과 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사유 과정에서 명료하게 표현되고 실현된다. 그리고 그리고 모든 사유 과정은 나와 관련된 일이 발생할 때 나 자신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하나의 활동이다. 나는 여기서 나와 나 자신 간의 무성의 대화에 현전하는 현존 양태를 고독(solitude)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고독은 홀로 있음의 다른 양태들, 특히 가장 중요한 양태인 외로움(lonliness)과 고립(isolation) 그 이상이며 그 성격도 다르다.” (200)
[사유로서 양심을 정리함]
“정치적으로 말해서 사유와 행위의 주된 구분은 다음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유하는 동안 나는 오로지 나 자신의 자아나 또 다른 [나의] 자아와 함께 있는 반면, 행동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많은 사람과 동석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전능하지 않은 인간들의 힘은 오직 인간 다수성(human plurality)의 여러 형태 중 하나에 속해 있다. 다른 한편, 인간 단독성(human singularity)의 모든 양태는 정의상 무력하다. 그러나 나는 비록 하나지만 둘로 분열하는 방식에 의해서만 내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다수성은 심지어 [나의] 단독성이나 사유 과정에서 나타나는 [나의] 이원성에서조차 하여튼 근원적으로 현전한다.그러나 인간 다수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 ‘하나 속 둘’은 마치 최후의 동행 흔적—내가 나 자신과 더불어 하나인 상태일 때조차 나는 둘이거나 둘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한 것과 같다.” (212)
[인간 복수성의 관점에서 ‘하나 속 둘’로서 나는 복수성의 기원이 됨. 사유가 힘(power)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행위와 구분되지만 인간 복수성의 관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음]
[하나 속 둘과 의지 사이의 관계는 240쪽 참조.]
“바꿔 말해서 자기를 상대로 분열된 어떤 의지는 행위 수행 임무에 덜 적합한 데 비해, 자기 내부에서 분열된 어떤 정신은 심의라는 임무에 훨씬 더 적합하다. 만약 그런 것이 의지가 존재하는 방식이라면 그 의지가 무슨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의지함이 아니라면 내가 과연 어떻게 행동에 돌입하도록 부추겨질 수 있겠는가?” (240-241)
“이제 우리는 시선을 판단의 문제, 즉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진실과 거짓 사이의 진정한 중재자의 문제로 돌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옳고 그름을 어떻게 식별하는가의 문제에 국한하여 논의할 예정이다.” (262)
[270쪽 이하부터 상상과 제현, 예제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는데, 그것이 판단과 행위 사이의 관계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추가 독해 필요.]
3장 집합적 책임 (1968)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죄인이 아닌 것이다. 죄는 책임과 달리 항상 누군가를 지목하는 특성이 있다. […] 사법적 기준과 도덕적 기준은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공유한다. 그 둘이 항상 어떤 인물과 그 인물이 한 일을 연결한다는 것이다.” (279)
[법과 도덕은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함]
“여기서 내가 의도하는 바는, 한편으로는 정치적(집합적) 책임을,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 그리고/또는 사법적(개인적) 유죄를 좀 더 명확히 구분하는 선을 긋고자 하는 것이다. […] 거기서의 질문은 단연코 어떤 개인이 좋은 사람인지 여부가 아니라 그의 처신이 그가 사는 세계에 유익한지 여부다. 그 관심의 중심에는 자아가 아니라 세계가 놓여있다.” (282-283)
“인간의 처신과 관련된 도덕적 고려의 중심에는 자아가 서 있고, 정치적 고려의 중심에는 세계가 서 있다.” (285-286)
[정치는 공동체(집합)에게 책임을 전가함]
“우리는 공동체를 떠남으로써만 이 정치적이고 엄밀히 말해 집합적인 책임에서 도망칠 수가 있다.” (281)
“세계 내 정치적인 일에 대한 비참여는 항상 무책임성이라는 비난, 즉 우리가 서로 공유하는 세계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회피한다는 공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288)
“이 세속적인 도덕 명제들과 조응하는 듯한 그리고 그것을 타당하게 만들 유일한 것은 사유함이라는 활동이다. 그것은 가장 일반적이고 전적으로 비전문적인 의미에서 플라톤이 시도했던 방식대로 ‘나와 나 자신의 무성의 대화’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를 처신의 문제들에 적용했을 때는 상상력이라는 정신 능력이 그러한 사유에 높은 수준으로 관여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재현하는 능력, 여전히 부재하는 것을 나에게 현전하도록 만드는 능력이며, 그것은 모종의 관조된 행위인 것이다.” (291)
[정치적 악에서 책임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은 사유 활동이다.]
4장 사유함, 그리고 도덕적 고려 사항들 (1971)
“우리는 대개 어떤 외견의 세계 안에서 운신하며 이곳에서 가장 본질적인 사라짐 dis-appearance의 경험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307) [세계에 관한 언급이 나오긴 하나, 악의 평범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므로 맥락이 맞는지는 확실치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