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엔느 질송,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이해』, 김태규 역, 누멘, 2010.
우선 대강 초고를 옮긴다. 윤색한 글은 나중에 따로 써보기로 하자.
생애. 쾌락주의 → 마니교 → 회의주의 → 플로티노스 → 기독교. 신을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신을 알기 위해서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
마니교의 한계. 선과 악의 대립논리. 어둠의 신 = 죄악 합리화. 성직자의 삶과 신앙인의 삶 구분.
첫 번째 단계: 신앙
“지식은 믿음에서 출발한다.” 확고부동한 진리와 불안정한 믿음이라는 틀을 돌파한 시도. 알아야만 믿는가?
“알기 위해 믿어라. (Crede, ut intelligas.)” 인간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신앙은 지적 겸손의 태도. 신앙 없는 이성은 회의주의.
> 게티어 논변.
두 번째 단계: 이성적 확증
회의주의 비판. “믿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지식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확고한 기반이 없다면, 회의주의는 탐구를 포기하게 될 것. 자신의 존재가 확보됨.
“나는 실수한다, 나는 존재한다. (Si fallor, esse.)” 나의 존재는 모순율의 기반. 참은 참을 낳는다. 거짓은 참을 낳지 못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의 논변
세 번째 단계: 영혼과 생명
‘인간은 어떤 조건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사고하는 실체이다. (Homo est substantia rationalis constans ex anima et corpore.)”
헤브라이즘 인간관. 성경의 인간 창조 설화 정당화. 헬레니즘 인간관 “육체는 영혼의 감옥”.
육체는 공간을 점유한다.
영혼은 ① 생명의 원인. 영혼은 육체가 숨쉬기를, 육체가 영혼과 일치하기를 욕망한다. 다시 말해, 영혼은 육체를 사랑한다. anima (생명).
② 감각하는 영혼. spiritus (상상력, 기억). 육체를 질서지우는 영혼.
③ 사고하는 영혼. mens (정신). 영혼의 고차원적 기능 ratio(분석적 이성)와 intellectus(종합적 이성).
영혼과 육체의 교통. 육체는 우주와 동일시되는 감각적 세계의 부분. 영혼은 생의 이데아, 즉 육체가 살아가도록 작용하는 원리. 죽음. 영혼은 반대의 것을 갖지 않는다. 신의 필연성 요청.
신의 영속성(Eternality)과 영혼의 불멸성(Immortality) 구분. 불멸은 죽어서 없어지지 않는 것. 영속은 언제나 불변, 현재. 종자적 이성(ratio seminalis)과 아렌트의 개념 비교.
네 번째 단계: 감각적 인식
“감각은 육체에 대한 영혼의 주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작용(sense)과 감정(passion)을 엄격히 구분한다. 육체는 영혼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영혼은 육체의 변화를 언제나 주시한다. 영혼은 육체를 사랑해서, 육체 외부의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육체를 보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감각은 육체에 대한 영혼의 주시(non latet, 모르고 있지 않음) 활동이다.
(1) 물리적 사물이 육체에 변화를 가하고 (자극단계, 외적감각), (2) 영혼이 육체를 주시하다가 육체의 변화를 감지하면 (감각단계, 내적감각), (3) 영혼의 주의 즉 기억이 비로소 감각들을 연결하고 조합해 인식한다. (인식단계) (p.147-148) 이러한 인식이론은 ‘어쨌든 감각되는 모든 것은 물리적 사물’이라는 유물론의 비판에 노출된다. 따라서 물리적 실체의 존재를 확인하는 영혼의 빛을 요청한다. 감각도 영혼의 질서에 놓여야 한다.
> 같이 보면 좋을 것: 로크의 백지론(tabula rasa), “.” 라이프니츠의 단자론(monadism), “단자는 창이 없다.”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occasionalism), “신만이 진정한 원인이고, 다른 자연적 원인은 기회적 원인(occasional cause)이다.”
다섯 번째 단계: 이성적 인식
1. 내면의 스승
지식은 신으로부터 온다. 언어를 통해 지식이 전달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통해 지식의 형성 원리 설명. 가르침: 관념의 전달.
관념의 본질은 공통성. 관념의 전달 수단으로서 언표. 언표의 본질은 기호. 말과 행동. 동일한 언어는 동일한 관념을 담지하지 않는다. 예시) 더 좋게 판단, 우연의 일치, 오해. 관념의 교환이 아니라 단지 언어의 교환일 뿐. [이해는 언어의 이해가 아니라 정신의 이해. 그렇다면 정신의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말들을 올바르게 듣고 그것의 의미를 아는 것은 원칙적으로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정신을 아는 것이다.” (157)
선생이 학생을 가르칠 때. 없던 지식을 가르치는가, 내재된 지식을 일깨우는가? 『메논』의 예. 학생의 역설, 모르면 배울 수 없고, 알면 배울 필요가 없다. 정신 안에 미리 가지고 있는 의미가 들어있다. 선생의 가르침이란 내면의 빛을 보도록 질문을 던지는 것.
- 영혼은 내부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플라톤의 선존재 개념 비판.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이 육체 전에 존재한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진리는 단지 발견할 뿐. 생득관념으로서 이데아 비판. 이데아를 넘어선 보편지, 즉 수학적, 도덕적, 철학적 진리. 소유자에게 행복을 주는 지식. 보편지식의 주체로서 신. 보편지식이 없다면 소통할 수 없다.
[칸트의 공통감과 유사한 설명. 감각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감각적인 것들이 존재한다.] “~.” (167) - 영혼이 내부의 것을 끌어내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은 정신 일치의 원인으로서 ‘내적인 스승’. 영원한 지혜이며 불변하는 덕인 그리스도.
(171)
감각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경험주의 거부, 플라톤적 생득주의 거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보편지를 통해 가능하다.
> 아렌트의 세계인식과 비교해도 좋을 부분. 아렌트는 같은 것을 보고 서로 다르게 인식해서 세계의 실재가 보장된다고 주장.
내적인 스승으로서 신.
2. 영혼의 빛
신은 진리의 원천이다. 신 : 인간 = 해 : 달 = 지성적인 것 : 지성적이어야 하는 것. 지성은 신에 의한 빛의 증여, . 플라톤의 은유 + 플로티노스의 구분.
신은 정신적인 빛의 원천. 신이 조명한 것을 보는 건 신의 빛을 보는 것. 조명된 것이 신의 빛 그 자체는 아님. mens intellectualis (지성의 존재), res intelligibilis (지성적 실재)는 신적인 관념들, 즉 이데아, 형상, 종, 이성, 규칙 등. “신을 통해서 진리를 볼 뿐만 아니라 신 안에서 진리를 본다.” (185) “신의 관념을 보는 것은 신을 보는 것이다.” (185)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은 신의 관념을 직접 인식 즉 직관(intuition)하는 것이 아님.
불멸하는 감각적인 것을 아는 지식(시간적인 것에 대한 합리적 인식)은 신적 조명이 아님. 보편타당하고 불변하는 지성적인 것(영원한 것의 정신적인 인식)만 신적 조명. (192) 질서, 수, 신적인 비례…. 보편타당한 지식은 우리가 완벽히 알 수 없다.
cf. p.119 영원성(eternity)과 불멸성(immortality). 영혼은 신의 일부가 아니므로 영혼의 본질은 불영속적.
cf. p. 171. 과거에 관한 플라톤적 회상은 현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적 기억으로 대치된다.
3. 영혼의 생명
정신의 생명은 탐색 즉 물음이다. 탐색의 원인은 앎이다. 영혼은 자만에 빠질 때 자기 자신을 잃는다. 영혼과 신은 기억을 통해 알 수 있다.
정신의 생명은 탐색. 삶의 목적은 진리 발견. 진리 발견이 가능한 조건은 선행된 앎. 무지는 배움의 조건이 될 수 없음. 알고자 하는 욕망이 배움의 원인. 알고자 욕망한다는 것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 알려지지 않는 것은 사랑할 수 없음. 안다는 것은 영혼이 대상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 영혼이 대상을 향해 움직이는 것은 표상.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알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음.
신과 영혼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영혼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함. 그런데 영혼의 본질은 앎과 생명이므로 영혼은 본질적으로 영혼에 대해 알고 있음. 그렇다면 어떻게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가 가능한가? 무지한 것과 잊어버리는 것의 구분. 영혼은 신 안에서 앎과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완전해짐. 영혼이 자기충족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신으로부터 멀어져 불완전해짐. 육체적 욕망과 감각에 탐닉함. 물질적 이미지에 압도되어 ‘순수 사유’인 영혼의 이미지를 망각함. 그러나 감각이 영혼을 완전히 가리는 것은 아니고, 영혼은 감각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려고 노력함. (223-224)
“행복한 삶은 진리의 기쁨이기 때문이다(beata quippe vita est gaudium de veritate).” (228) 인간은 완전한 평화와 행복이라는 이상을 기억하고, 그 속에서 찾음. 모든 사람이 행복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행복은 진리. 불완전한 앎은 행복 아님. 가장 완전한 앎은 영혼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것, 즉 진리를 위한 진리.
찾는다는 것은 기억에서 회상을 통해 찾는 것. 망각이자 현존. [상기와 구분할 것] 기억은 추억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생산하는 능력. 감각적인 것보다 지성적인 것이 더 높은 차원. 대부분의 지식은 감각을 통해 알게 되나 순수 추상적인 것들은 내면의 스승을 통해 알게 됨. 현재의 기억은 순수 추상적인 것들을 기억해내는 것. “과거의 기억보다 더 광대한 현재의 기억이 있다.” (230)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나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의 잠재적 지성, 즉 지금 떠올리고 있지 않지만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 알고 있는 것은 떠올릴 수 있는 것. 생각하는 것은 정신에 어떤 생각을 지금 떠올리는 것.
인간은 신도 기억함. 단 사물이나 관념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을 떠올림. 인간은 신 안에서 지식을 얻을 수 있음. 그러므로 신의 존재는 “과거의 이미지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현존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232) 그러므로 인식론은 그 자체로 신존재증명. 영혼으로 인해 육체가 살고, 신으로 인해 영혼이 산다. “신은 우리의 생명의 생명이다(vita vitae meae).” 신은 증명 대상이 아니라 발견 대상이다.
4. 미해결된 문제들
아우구스티누스와 플로티노스(플라톤)의 구별. 창조의 개념. 그리스도교의 ‘무로부터 창조’와 네오플라톤적 ‘하나로부터 유출(발생)’. ‘인간이 신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은 ‘인간은 신과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므로 인간은 신에 의해 무로부터(ex nihilo) 창조된 것. (238)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로티노스의 유출설을 채택한 것은, ‘신과 본질이 같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라 ‘신에 의해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 보편타당한 지성적 질서는 신적이나 인간은 신적이지 못함. (242) 플로티노스의 영혼은 스스로 내부의 빛을 발견해 자기 자신에 의지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혼은 신으로부터 빛을 받기 때문에 신에게 의지해야 함. (243) 인간의 지식은 신의 진리가 될 수 없으므로, 인간의 언어는 신의 진리를 담을 수 없고, 다만 ‘은유’를 통해 드러낼 수만 있음.
견해
회의주의와의 구분
조명. 제일원리로서 신. 플라톤, 좋음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 부동의 원동자. (Virtue) 플로티누스, 빛. 마니교의 빛, 물리적인 빛과 정신적인 빛을 동일시. 기독교의 신.
지식. 선이해. 데카르트 본유관념, 칸트 선험적 종합판단. 지식을 소유한다 = 개념화한다. Begrieff. 언어로 관념을 묶을 수 있는가? 사유의 존재화. 가능태의 현실화.
복합적 실체라는 인간관. 그리스도교가 공유하는 육체+영혼=인간론. 칸트 도덕론에서 입법자와 수행자로서 인간. cf. 소크라테스적 인간관. 인간은 육체에 잠시 깃든 영혼이며, 이성적이다. 아폴론적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