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고대철학Ⅰ (4/6)]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이 글은 “서양고대철학1(강철웅, 박희영, 이정호, 전헌상 외 저, 도서출판 길)”을 읽고 제 나름대로 요약 및 해석한 글입니다.

철학, 더 나은 앎을 위한 싸움

제7-8장 소피스트

소피스트(sophist)는 지혜로운 자(sophia (지혜) + -ist (-한 사람)라는 일반명사이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지식 소매상이다. 소피스트들이 덕(arete)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학생들로부터 돈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적 배경을 고려하자면,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가 전성기를 맞은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아테네는 추첨제에 의한 민주주의를 통해 일반적인 민정을 다스렸고, 군사나 외교와 같은 중대한 국사는 투표로 선발한 인물들을 통해 처리했다. 아테네 청년들에게는 출세하기 위한 수사학과 논쟁술이 곧 최고의 덕이었고, 이러한 수요에 부응해 그리스 각 지역에서 소피스트들이 몰려들었다. 최초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Πρωταγόρας, Protagoras, B.C. 481 ~ 411)가 당대 최고의 정치가 페리클레스(Pericles)와 친교를 맺었다는 사실은, 소피스트들이 당시 정치 경제사에 끼쳤던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금전을 받고 지식을 전수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교육이 금전과 연계되면 교육의 목표가 ‘참된 지식의 전수’에서 멀어지고 오히려 ‘고객 만족’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소피스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헤겔이 소피스트들의 철학사적 의의를 재조명한 이후에 이르러서야 해소되었다.

소피스트들이 반론술(antilogike)과 쟁론술(eristike)은 소크라테스의 변증법(dialektike)와 구분된다. 쟁론술은 싸움에서 이기는 것만 목적으로 하는 기술(eris (싸움) + -tike (-하는 기술))이었고, 반론술은 어떤 주장을 무력화하기 위해 전혀 불합리한 주장을 마치 합리적인 양 우기는 기술(anti- (부정) + logo(s) (말) + -(t)ike (-하는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소크라테스가 사용한 변증법, 특히 그 중에서도 논박술(elenchos)은 상대의 주장으로부터 불합리한 주장을 이끌어내어 상대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요컨대 논박술은 반론술과 쟁론술보다 한 차원 높은 목표를 추구하는 말기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소피스트들이 철학사적으로 유의미하게 던진 물음은 인식론이다. 어떤 이름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그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부정하는 말은 결코 참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부정하는 단어나 문장은 본질적으로 그 지칭하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주장에 대한 반론은 결코 성립할 수 없다. 모든 긍정 문장은 참이며, 참과 거짓을 따지는 일은 의미 없는 일이다. 나아가, 소피스트들에 따르면 ‘A는 B이다’라는 식의 문장도 결코 성립할 수 없다. ‘A는 B가 아닌데, 어떻게 A와 B를 동치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장은 ‘A는 A이다’라는 동어반복적 문장인 경우에만 참으로 성립할 수 있다. 특히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모든 것의 척도다”라는 명제를 통해 모든 감각은 감각 주체를 떠나서는 결코 진술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참과 거짓에 대한 판단 역시 개별적인 인간 각각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고르기아스(Γοργίας, Gorgias, B.C. 485? ~ 385?)는 존재와 인식,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소피스트적 회의주의를 완성시켰다.

소피스트들에게 인간은 만물을 평가할 수 있는 위대한 주체이자 동시에 아무런 평가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 이해된다. 사회적 규범(nomos)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하는 문제가 이러한 입장을 잘 나타낸다. 소피스트들은, 법(nomos: ← nomizetai (믿어지다, 행해지다))이 자연(physis: ← phyomai (자라다))을 넘어 인간을 규율하는 권원(title, source of authority)을 찾는 일이 매우 어렵다거나, 오히려 아예 찾을 수 없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이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희곡이다. 안티고네는 오라비 폴뤼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르고자 하지만, 테베의 왕 크레온은 안티고네가 장례를 치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나는 그대의 명령이, 죽기 마련인 한낱 인간이 신들의 확고한 불문율들을 무시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안티고네> 453-455)

프로타고라스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것은 염치와 정의라는 정치적 자질일 뿐, 인간을 실질적으로 규제하는 구체적 법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안티폰(Ἀντιφῶν, Antiphon, B.C. 480? ~ 411)은 법을 다른 사람들과 합의한 약속 정도로 정의하고, 법이 유효한 경우는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때뿐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법이 정의롭다고 규정하는 것은 자연과 적대관계에 있으며, 법에 따른 정의는 그것을 준수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프로타고라스와 안티폰의 주장은 <국가>에서 트라쉬마코스(Θρασύμαχος, Thrasymachus, B.C. 459? ~ 400)의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전달된다. “정의는 다름 아닌 더 강한 자의 이로움일 뿐”(338c)이며, “남 좋은 일이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343c)이라는 것이다. <고르기아스>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는 칼리클레스가 법과 자연에 대한 소피스트들의 생각을 정리한다. 법은 약한 다수들이 강한 소수가 더 많이 갖는 것을 막기 위해 정한 것이지만, 자연에 따르면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보다 더 많이 갖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더 강한 자가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필연적 법칙이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V. 105)

소피스트들의 사회 인식은 현대 관점에서 상당히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덕(arete)은 가르침으로 전달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프로타고라스는 시민적 자질이 교육과 훈련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반론했다. 나아가 인간 사회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최초의 불완전한 상태에서 점차 완전한 상태로 발전해 나간다. 이러한 생각은 근대적 정치개념인 사회계약론의 시초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이 주장과 유사하게 히피아스(Ἱππίας ὁ Ἀθηναῖος, Hippias, B.C. 560? ~ 490?)와 뤼코프론(Λυκόφρων ὁ Χαλκιδεύς, Lycophron, B.C. 330? ~ ?)은 법을 시민들 사이의 합의 또는 약정으로 설명했다. 비슷한 생각이 플라톤의 <국가>에서 글라우콘을 통해 제시되기도 한다. “서로 간에 부정의를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도록 약정을 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로부터 사람들은 법률(nomoi)과 약정(sytheke)을 제정하기 시작했으며, 법에 의해 지시된 것을 합법적이고 정의로운 것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358e-359a) 이와 연관되어 에우리피데스(Ευριπίδης, Euripides, B.C. 480? ~ 406)는 신과 종교를 법의 보완적 요소로 해석한다. 에우리피데스에 따르면 법은 공공연한 행위만 규제할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도 인간의 행동을 통제할 장치가 필요했다. 따라서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신을 도입하여 신들에 대한 두려움을 그 장치로 삼았다는 설명이다.

나아가 평등권(isonomia: iso- (같은) + nomos (법))의 개념도 소피스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뤼코프론은 신분의 차이에 따른 차별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에우리피데스는 그의 단편 <알렉산드로스>에서 다음과 같이 태생에 따른 차별을 비판했다. “죽기 마련인 인간들 사이에서 좋은 태생을 칭찬한다면, 우리의 논의는 지나친 것이다. […] 좋은 태생을 법에 의해 자랑거리로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단편 52N) 그리스인들의 민족주의에 따른 우월감도 소피스트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안티폰은 “모두가 자연적으로는 완전히 똑같이 이방인이나 그리스인이 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 어느 누구도 이방인이나 그리스인으로 차별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우리 입과 코로 호흡을 하며, 손으로 먹기 때문이다.” (DK87B44 II. 352-353) 심지어 고르기아스의 제자 알키다마스(Ἀλκιδάμας, Alcidamas, B.C. ?)는 당대 소피스트들이 비교적 비판하지 않았던 노예제까지 비판하기도 했다.

제9장 소크라테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을 철학의 발아기로 비유한다면, 소피스트들의 등장은 철학의 개화기로 볼 수 있다. 소피스트들이 활동한 시기는, 이전의 자연철학자들로부터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네 측면, 즉 질료, 형상, 존재, 운동의 측면에 대한 검토가 시작되어, 본격적으로 각자 다양한 주장을 펼친 시기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소피스트들이 검토한 사안이 자연적 세계(physis)에만 국한되지 않고, 아테네의 정치 경제적 전성기와 맞물려 인간의 세계(nomos)까지 확장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부분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인간 중심의 철학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Socrates, B.C. 470? ~ 399)는 아테네에서 석공인 아버지와 산파인 어머니 아래 우스꽝스러운 외모로 태어나 크산티페(Ξανθίππη, Xanthippe, ?)라는 여인과 세 자녀를 낳았다. 소크라테스의 친구 카이레폰은 어느 날 델피(Δελφοί, Delphi)의 아폴론 신전에서 무녀로부터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무도 없다’는 신탁을 듣는다.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현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만난다. 첫 번째 사람은 정치인이었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대단한 걸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그 정치인보다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21d) 두 번째 사람은 시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지혜가 아니라 영감을 얻어 시를 지었고 자신들이 말하는 것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나아가, 시짓는 일(poiesis) 이외에 더 나을 게 없는 일에도 “가장 현명한 사람들인 줄로 스스로 여기고 있”었다. (22c) 마지막 사람은 장인(demiurgos)들이었는데, 자신의 기술(techne)이 아닌 “다른 일들에 있어서도 자신이 가장 현명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가장 현명한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무지조차도 모르는 이중의 무지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신탁을 들은 델피(Δελφοί, Delphi)와 소크라테스가 활동했던 아테네(Αθήνα, Athens)

무지의 지는 ‘내게 지혜가 결핍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sophia)에 대해 갈망(philein, 사랑하다)하는 일은 바로 이 무지의 지에서 비롯된다. 소크라테스는 신탁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본인보다 현명한 사람을 찾았으나 오히려 사람들의 무지를 확인시켜주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캐물음(exetasis)으로 말미암아 소크라테스는 사람들로부터 증오심을 얻게 되었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항목에 따라 불경죄로 고발을 당한다. 소크라테스는 (1)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2)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3)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들(daimonia)을 믿음으로써 죄를 범하고 있다. (24b)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이유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 ~ 404)에 패배한 뒤 30인 참주정으로 인해 힘든 시기를 겪었던 당대 아테네의 정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30인의 참주에 포함된 두 인물이 소크라테스를 추종했던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스스로를 가리켜 ‘굼뜬 말 등의 등에’처럼 ‘신이 아테네인들에게 보낸 선물’이라고 말하며, 시민들을 자극해 무지를 자각하게 만드는 임무를 다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인상적인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하다는 신탁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무지를 자처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스스로 어떤 주장을 제시하지 않고 질문을 통해 상대방으로부터 모순을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반어법(eironeia)을 통해 스스로 무지를 자처함에도 대화의 끝에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이해된다. 무지를 자처하는 태도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질문자의 입지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대화 상대방의 주장이 타당한지 검토하는 논박(elenchos, 엘렝코스)이 가능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식 논박은 어떤 윤리적 문제에 대해 스스로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상대방의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그 주장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자처하며 질문의 형태로 다양한 명제들을 제안한다. 그런데 이 명제들은 상대방이 초기에 제시한 명제와 상충하여 상대방의 논리는 모순으로 귀결되고 혼란(aporia, 아포리아) 빠진다. 상대방은 소크라테스가 제안한 명제들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와 논의하는 명제들이 상대방의 윤리적 신념 또는 태도, 인생관과 강하게 연관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논박하는 대상은 사전적인 앎이 아니라 실천의 기준으로서 가치 또는 신념이다.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로 인해 도덕적 근간이 흔들린 상대방은 수치심과 분노와 같은 영혼의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상대방의 일차적 무지(무지의 무지에서, 첫 번째 무지)가 깨졌다는 징표이므로 오히려 상대방에게 유익하다.

소크라테스를 자세히 기록한 제자로는 대표적으로 크세노폰과 플라톤이 있는데, 둘의 기록이 매우 달라 소크라테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확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크세노폰은, 훈련을 게을리하면 덕을 잃을 수도 있으므로 극기(enkratia)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기록하는 반면, 플라톤은, 덕을 일종의 앎으로 여겨 한벋 얻으면 잃지 않으므로 무절제(akratia)에 빠질 수 없다는 식으로 기록한다. 현대 널리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플라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어 크세노폰의 기록이 철학사적 의의를 크게 갖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으로 형성되는 품성(hexis)’이나 ‘자제(enkratia)’와 같은 개념들이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와 갖는 공통점을 고려할 때 크세노폰의 기록도 나름의 철학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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