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서양고대철학1(강철웅, 박희영, 이정호, 전헌상 외 저, 도서출판 길)”을 읽고 제 나름대로 요약 및 해석한 글입니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로고스
제4장 헤라클레이토스
탈레스를 필두로 한 밀레토스 학파의 중심적인 논의 대상은 ‘다양한 사물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는 무엇인가’였다. 그들 내부에서도 눈에 보이는 물이나 공기와 같은 질료를 제시하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페이론(무한정자)과 같은 질료를 제시하기도 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의 비례적 조화와 같은 질료 없는 형상을 세상의 원리로 제시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필롤라오스는 한정자와 비한정자의 조화를 제시했다. 요컨대 헤라클레이토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최초로 질료와 형상 사이의 관계를 논의한 사람들로 평가할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Ήράκλειτος, Heraclitus of Ephesus, B.C. 535 ~ 475)는 질료와 형상 논의로는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다만, 질료와 형상을 관통하는 ‘변화’에 대해서 최초로 언급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그에게 적합할 것 같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책을 썼다고는 하나 현재 남은 건 약 120여 편의 단편이다. 단편은 명료한 언어로 쓰여 있지 않고 해석의 여지가 많아 당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철학을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고민하는 과정으로 여겼던 헤라클레이토스가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철학은 박학다식함이 아니다. 따라서 피타고라스를 사기꾼이라고 일컫는 등 선배 철학자들을 비판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근본적인 진리이자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것이 로고스에 따라 생긴다.”(단편 1) 로고스를 통찰하는 방법은 스스로를 탐구하거나 지성을 사용해 현상을 관찰하는 두 가지이다. 특히, 현상은 감각을 사용해 인식할 수밖에 없으나 진리는 현상 이면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감각은 믿을만하지 못하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진리의 ‘표지’로 작용하므로 현상 이면의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로고스는 자연의 원리 또는 사물의 본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만물의 생성과 운동의 근원적인 원인으로도 볼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는 공통적인 것”(단편 2)이므로, 만물이 겉으로는 여럿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다양성 이면의 통일성을 찾아내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통일성은 대립자들의 균형과 조화의 원리이다. 부분 없는 전체는 없고 전체 없는 부분은 있을 수 없으므로, 전체와 부분은 상호의존하며 투쟁하면서 모순적 조화를 이룬다. “대립하는 것은 한데 모이고, 불화하는 것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모든 것은 투쟁에 의해 생겨난다.” (단편 8) 활과 활시위의 관계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를 적절하게 형상화한다. 활은 밖으로, 활시위는 안으로 끊임없이 당긴다. 양자의 서로 다른 긴장과 투쟁이 활을 활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단편 51) “같은 강에 발을 담근 사람들에게 다른 강물이, 그리고 또 다른 강물이 계속해서 흘러간다”(단편 12)는 예시들은 전체와 부분, 변화와 안정, 불화와 조화 사이에 작용하는 대립적 성질들의 통일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로고스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고찰은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것을 한데 모아놓은 것이 아니냐는 상대주의의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특히 물고기들은 마실 수 있지만 사람은 마실 수 없기 때문에 “바다는 가장 깨끗하면서도 가장 더럽다”(단편 61)는 주장은 이런 비판에 가장 취약하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세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세계는 시작과 끝이 없이 “모두에게 동일”하며 “영원히 살아 있는 불”(단편 30)처럼 운동과 변화를 영원히 반복하는 과정이다. 세계는 변화의 과정과 정체성의 유기적 통일체로서, 변화라는 대립적 성질로부터 정체성이라는 통일성을 갖는다. 플라톤은 단편 12 두고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크라튈로스> 402a)며 헤라클레이토스적 흐름을 정체성이 결여된 변화로 해석한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플라톤처럼 논리적 엄밀성을 추구한 인물이 아니다. 단편 12는 강의 정체성을 흐름이라는 변화의 과정에서 찾은 것으로 해석해야 헤라클레이토스가 의도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의 원소들(물, 불, 흙) 중에 불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다른 밀레토스 철학자처럼 불을 만물의 근원(arche)로 여기지는 않았고,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그것은 불을 만물의 ‘교환물’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것은 불의 교환물이고, 불은 모든 것의 교환물이다. 마치 물건들이 금의 교환물이고, 금은 물건들의 교환물이듯이.”(단편 90) 원소들은 다른 원소의 죽음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며 상호변환하고 이러한 과정은 전쟁과 투쟁으로 불린다.(단편 36, 80) 로고스는 불과 신, 투쟁으로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르게 불린다. 이러한 경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불이 다른 요소들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스스로 끊임없이 운동하는 원소이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을 살아있게 하는 영혼이 불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세계가 운동하는 원리로서 불은 인간이 정체성을 갖고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된다. 죽음(thanaton)은 영속적인 상태가 아니라, 삶에 대립되어 존재가 사멸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영혼은 삶과 죽음이 활과 시위처럼 투쟁하는 “불사자”이면서 동시에 “가사자”인 존재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단지 활시위가 끊어지듯 대립자들의 투쟁의 한 극단이 드러난 일시적인 사건일 뿐이다. 영혼은 삶과 죽음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생각의 원인이기도 하다. “생각하는 것은 모두에게 공통이다.”(단편 113) 당대 그리스인들은 각자의 수호신(daimon)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는 운명론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생각을 비판한다. “성품(ethos)이 수호신”이라고 주장하며 습관을 통해 굳어진 성품이 삶을 결정한다는 것이다.(단편 119) 지혜는 좋은 선택을 이끌고, 좋은 선택에 따라 실행하는 노력의 과정은 좋은 성품을 이끈다. 따라서 “나 자신을 탐구”(단편 101) 영혼 안의 “스스로 자라나는 로고스”(단편 115)를 가꾸어야 한다.
>> 플라톤의 헤라클레이토스 비판을 살펴볼 때, 플라톤과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기준에서 견해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끝없이 변화하는 연속적인 자연현상을 단속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언어가 얼마나 엄밀하게 사용되어야 할까?” 수학에서 이차함수와 그 기울기로 예를 들자면, 자연은 언제나 미분가능하게 변화하지만 인간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울기는 일차함수로만 표현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함수의 기울기가 때에 따라 달라지므로 각 점에서 기울기를 나타내는 것을 포기하고 이차함수가 기울기라는 이데아를 갖고 있다고 이해하자’는 입장이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이차함수와 일차함수가 겉으로는 다르게 보이나 결국은 매한가지이다’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다시 말해, 연속적인 변화나 운동을 해석하기 위해서 인간은 단속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순간은 과거가 되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는 자연현상의 일부만을 담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직관적으로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동일한 것으로 해석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논리적으로 더욱 엄밀한 것은 플라톤의 논법이지만,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도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 플라톤의 영혼론과 자연법 사상(physis-nomos 비교),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성격적 탁월성 논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논의에서 일부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단편 101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을 탐구하며 영혼을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독배을 앞둔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영혼을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14c) 나아가, 이 주장은 독자로 하여금 헤라클레이토스적 불의 정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단편 114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합리적 사고는 로고스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인간의 법들은 하나인 신의 법에 의해서 양육되기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인간의 법과 관습(nomos)이 자연(physis)에 기반해야 한다며 법의 근원을 신의 법에서 찾는 플라톤의 주장과 유사하다. 한편, “인간에게는 성품이 수호신”(단편 119)이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은 쾌/불쾌에 따라 형성되는 감정(pathos)은 합리적 사고 능력(dynamis)에 따라 선택의 근거가 되며 축적된 선택들이 성격(hexis)을 형성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상당히 흡사하다. 이러한 이론적 유사성에 대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직접적으로 공을 돌리지는 않았지만 독자들은 유의해서 읽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